[Opinion] 사랑을 기록하는 일 - '단순한 열정' [도서]

글 입력 2020.04.2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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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오-Love ya!' MV


 

얼마 전 나를 당황시킨 질문이 있다. “넌 사랑이 어떤 거라고 생각해?”


평소 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으로 고민할 만큼 로맨틱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감정에 메말라가는 2020년에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나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사랑, 사랑, 무엇… 한참을 고민한 후에 멋쩍어 하며 그것은 집중하는 일이라 답했다.

 

내 일생의 어떤 순간이 온통 그 사람으로 가득차는 일이라고. 나를 잃는 일은 언제나 위험하지만, 사랑이 시작된 순간 나의 모든 삶은 당연스럽게 그 사람이 되어버리는 일이라고. 그리고 말을 뱉는 순간, 동시에 나는 사랑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말하는 것은 늘 어렵다. 사랑을 시작한다. 일상이 요동치고 있음을 느낀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연락을 한다. 지금 이 순간에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루종일 생각한다. 할 일을 하는 와중에도, 공부를 할 때도, 친구를 만날 때도 내 주의의 한편을 차지하는 것은 그 사람이다. 진부한 일상의 침범이 가장 새삼스럽기도 하다. 듣지도 않던 외국 가수의 노래를 듣는다든지, 생전 먹지도 않았던 ‘매화수’를 일주일에 한번씩은 마신다든지, 그 사람의 집에 내 칫솔이 꽂힌다든지. 오랜 시간 혼자 쌓아온 인생에 또 다른 누군가를 들인다는 것이,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내 속에 서서히 묵직하게 들어오는 기분이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그런 압도적 느낌 속에 살다가, 가끔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다 요즘 어떻냐는 말을 들으면 턱 막힌다. “요즘 좋아.” 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달리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한테 벌어진 너무나도 큰 일들을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할지, 지금 나의 사랑을 어떻게 왜곡 없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본다. ‘이 사람과의 사랑은 어떻지?’ 하나하나 짚을 수 없다. 지금 이 사랑에 너무 잠겨있기 때문에.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지금의 마음을 잡아두고 싶다고. 하지만 야속하게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언젠가 내 삶을 차지했던 누군가와의 일들을 나는 제대로 떠올릴 수조차 없다. 나의 회상에 현재가 계속 개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지금의 내 사랑을 끊임없이 밝혀야 한다. 끊임없이 이 사랑은 어떤 것인지 스스로 밝히고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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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는 자전적 소설 <단순한 열정>에서 이 고된 작업을 시도한다. <단순한 열정>에서 작가이자 주인공은 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 일을 반추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11)



누군가가 삶을 온통 차지하게 되는 일,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 말하는 상태를 주인공은 ‘열정’이라 명명한다. 그녀는 이 열정을 누리는 일이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19)다고 말한다. 하나의 책을 써내듯, 사랑의 열정을 겪는다는 것은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19)하는 일이 따른다.


그녀는 인과관계에 따라, 완성된 스토리로 자신의 열정을 풀어내려 하지 않는다. 그녀와 ‘그 사람’ 사이에 있었던 어떤 경험들을 들추어내 해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 해석의 시도는 그녀의 사랑을 해석의 틀에 맞춰 변형시키는 일이다. 그녀가 사랑을 할 때 그랬듯, 열정의 형태는 결코 매끄럽거나 정돈되어있지 않다. 그녀는 다만 파편적으로 기억하던 어떤 순간과 그때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심지어는 적나라하다시피 할 정도로 기록한다.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만이 그때의 감정을 변질시키지 않고 그대로 붙잡아둘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이라 생각하며, 그 당시의 생생한 욕망, 집착이라 싶을 정도의 극도의 불안 상태까지 가감없이 드러낸다.


이 묘사가 너무도 강렬하고 솔직해서, 일각에서는 “편집증이나 정신병으로까지 느껴지는, 광기에 가까운 사랑의 허기”(88)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러한 병적인 상태라는 인상에 더해, 사랑의 대상인 ‘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 평가까지 더해져 1991년 출간 당시 문단의 반응은 싸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잠시 유보하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말하자면 그녀가 가졌던 ‘열정의 정수’들이 그녀의 글쓰기에 모이고, 게다가 그것이 어떠한 여과 없이 표현됨으로써 유발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사랑의 시기에 겪는 감정들이 ‘아름다운’ 것이야말로 가장된 것일지도 모른다.



일단 화장을 하고 머리 손질을 하고 집 안 정리를 끝내고 나면, 설령 시간이 남는다 해도 원고를 고친다거나 책을 읽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A를 기다리는 것 외의 다른 일에 조금이라도 정신을 빼앗겨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백지 위에 날짜, 시간, 그리고 “그가 올 거야”라는 문장을 적고 그 사람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을 끄적였다. (15)



그녀는 그것들을 ‘열정의 기호’라고 말한다. 그 기호들을 한데 모아 최대한으로 그 당시의 열정을 그려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녀는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52)이라고 말한다. 아니 에르노에게 그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는 것은, 어떤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그녀에게로 온 단어(66)’에 대한 탐구와 기록이다.


*

 

누군가가 나에게 온 일, 관계나 감정 따위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일은 너무도 잔인하고 지단한 과정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간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나의 비관적인 미래가 현재의 행복을 변질시키도록 놔두고 싶지 않아서, 지금을 제대로, 절실히 감각하고 싶어서 끊임없이 지금의 사랑을 스스로에게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을 기록하는 일에 대해 쓰는 소설들은 우리에게 그 가능성을 열어보인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은 열정의 기호들을 모음으로써 나의 오늘의 사랑, 오늘의 열정을 그대로 들여다보게끔 한다.

 

 

[장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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