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오래 사귀었다. 잦진 않았지만 헤어짐의 순간이 있었다. 그 때마다 울고 불고 마음의 바닥까지 드러낸 건 아니었다. 종국엔 그걸 드러내는 일을 패배나 실패라고 생각하여 당신에게 자존심을 부렸다. 공감하고 표현하는 것보다 승패가 더 중요했다. 헤어짐을 통보받을 때도 그랬다. 미안하다며 붙잡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그게 이기는 거라 생각했다. 당신이 후회할 거라 생각했다.
재회를 바라는 마음이 기어 올라왔다. 편지를 부쳤다. 비겁한 마음이었다. 비겁한 행동이었다. 구차한 내 마음을 반영하여 편지를 적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편지를 부치는 행위자체가 치졸했다. 어떻게든 좋은 마지막을 당신에게 새기고 싶어서였다. 보고 싶고 재회를 바라는 마음만큼 인상적인 마지막을 연출하려는 심상도 분명 있었다. 거기엔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시도가 없었다. 여전히 내가 중요하고 내가 어떻게 보일지 고민한 행위였다. 내 마음만 앞섰다.
재회를 바라는 비겁한 마음도 증발한 때가 왔다.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똑같았다. 그것과 별개로 가능성은 축소돼갔다. 이제는 그 희박함을 인정하는 때였다. 그런 마음에서 <성인>을 들었다.
성인 - 기리보이
넌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니?
난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지
나름대로 잘 돼서 나는 너무 행복한데
생각이 너무 많아 밤에는 못 자고 있지
아무런 상관없는 너가
너무 바빠 다 잊고 생각 안 나던 너가
너에게 말한 바램들을 다 이루고 나서야
내팽개친 순수함을 난 다시 주워 담고 있지
얼마 전 너의 번홀 찾았어
다행이야, 나도 번호를 안 바꿔서
혹시 이건 미련일까 한참 생각해봤지만
이건 그냥 생각나서에 조금 더 가까워
이런 날이 올까 상상도 못 했어 난
예전에 우리 치고 박고 난리도 아니었잖아
그래, 그땐 그게 정말 최선의 방법이었어
지금은 절대 겪을 수 없는 큰 감동이었어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 난 달력을 보네
그냥 생각이 나서, 그냥 생각이 났어
우린 다른 곳에서 똑같은 아침과 밤을 보네
그냥 생각이 나서, 그냥 생각이 났어
I'm fine, 너가 없는 도시에서
꿀리면 안 돼, 흐르는 눈물 모른 척 했어
다 소용없는 짓, 괜찮은 척
메마른 몸의 예쁜 여잘 쟁취하는 것
근데 그것도 별로 오래 못 가더라고
갈 사람은 가고 일만 배신 안 하더라고
그래서 너무 빨리 달린 거야
그래서 지금 너에게 창피를 팔리는 거야
뭐, 니가 어떤 여자였건 아무 상관도
돈이 필요하다거나 어떤 바람도
심심해서도 아냐, 그냥 생각이 나서
그냥 생각이 났어, 갑자기 정신 나가서
지금 생각해보면 우린 잘못한 건 없어
그저 변해가며 고쳐갈 뿐, 뭐라 할 건 없어
난 다시 태어났어, 많은 경험 후에
널 미워한 게 후회돼, 전부 똑같은데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 난 달력을 보네
그냥 생각이 나서, 그냥 생각이 났어
우린 다른 곳에서 똑같은 아침과 밤을 보네
그냥 생각이 나서, 그냥 생각이 났어
아무런 이유도 없어, 너를 보는 게
아무런 조건도 없어, 너를 보는 게
우리 서로 사랑하지 않잖아
우린 이제는 머리를 쓰잖아
생각 없이 웃자, 그냥 생각 없이 웃자
생각 없이 웃자, 생각 없이 웃자..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 난 달력을 보네
그냥 생각이 나서, 그냥 생각이 났어
우린 다른 곳에서 똑같은 아침과 밤을 보네
그냥 생각이 나서, 그냥 생각이 났어
I'm fine
Thank you
And you
<성인>의 화자는 이별한 지 오래됐다. “아직도 그 일을”하는 그는 너도 마찬가지냐고 묻는다. 어떤 관계라고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무관한 사이가 됐지만 “그냥 생각이 나서” 네 번호를 찾는다.
전화를 걸지, 목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같은 것들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그냥 네 번호를 찾아봤다는 게 중요하다. 사진도 지우고 메신저 내용도 지우고 그 번호에 부여했던 특별한 호명도 다 지웠을 테다. 너를 잊으려는 노력의 발로다. 그럼에도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너와 함께한 어떤 순간들이 각인돼 있다. 전화번호도 그렇다. 그걸 수단 삼아 너에게 닿기 위해 온종일 시도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너는 무슨 목소리가 될지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고 네 사소함을 알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싸우면 다시 붙잡고 싶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그 숫자들이 상징하는 건 너와 내가 겪은 일상의 누적인 동시에 우리 사랑의 고유함이다. 화자는 그 일상과 고유함을 되새기고 싶어 번호를 찾는다. 사랑한 때에 너는 특별했고 나는 “순수했”다.
“그냥 생각이 나서”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정신 나가서” 네 생각을 한다. 그냥 생각이 났다는 건 그럼 변명일까. 갑자기 정신 나가서 너를 떠올린 경험이 많다면, 그렇게 되지 않으려 “다른 여잘 쟁취하거나 빨리 달렸”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 무색해진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일상과 무관하게 갑자기 네가 떠오르는 경험을 종종 한다. 그래서 너를 떠올리는 일이 갑자기 정신 나가는 일과 같다고 말한 걸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서로의 일상에 개입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그 개입을 온당하다고 받아들이는 감각이다. 사랑이 오래 지속되면 내가 사랑하는 너는 당연한 일부가 된다. 눈과 코와 입이 있고 호흡할 수 있음을 자문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은 너를 그런 당연한 전제로 만든다. 당연함의 상실은 공백이 크다. 불편하다. 더 마음이 아프다. 이별은 당연함을 잃는 일이다.
공백과 불편함과 고통을 동반하는데 그러니 너를 잊는다는 건 말도 안된다. 갑자기 정신나가서 너를 떠올리는 일이 맞다. 어쩔 수 없이, 제멋대로 네 모습이 상영된다. 우리 모습이 지나간다. 왜나면 너는 내 당연한 것들 중 하나였다. 주기는 길어질 수 있다. 그러나 화자는 아마 계속 “그냥 생각이 나고 갑자기 정신 나가”는 경험을 할 테다.
따져보면 “우린 잘못한 게 없다. 변하고 고쳤지만” 고친 자리엔 봉합의 흔적이 남는다. 변하고 고쳐도 제자리를 맴도는 성정의 우리는 다시 그 봉합을 헤집고 만다. 시간이 지나며 풀어진 봉합 자국을 다시 메꾸려는 시도역시 지지부진할 때, 그 때는 사랑이 끝나는 지점이다. 그건 네 탓도 아니고 내 탓도 아니다. 사랑은 한시적이다. 거기가 종결지점인 것뿐이다. <성인>은 사랑에 대해 환기시켜주는 노래다.
“사랑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고 종국엔 배신으로 수렴된다” 그런 문장을 봤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계기가 있다고 믿지만 실은 그 계기는 별 게 아니다. 상대의 맥락 없는 행동에 내 마음을 투영하여 계기라고 이름 붙인 게 전부다. 네가 처음부터 특별하여 내 자리에 들어왔다고 말하지만 실은 네가 아니고 누구였어도 그 자리에 진입할 수 있었다.
우리는 외롭고 공허한 동시에 특별해지고 싶은 존재들이어서 사랑의 계기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 내 사랑은 특별하다고 믿는다. 별 것 없이 사랑을 시작하는데 사랑의 계기가 특별하다고 믿는 일 자체가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다. 그러니 사랑이 배신으로 수렴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특별한 너라고 믿었고 특별한 사랑이고 믿었는데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사랑이라서다.
사랑이 이렇게 별 게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은 나도 똑같다. 앞으로 내게 사랑의 기회가 다가올지 말지 모르겠지만 그 사랑이 특별했으면 좋겠다. 별 것 아니어도 특별하다고 스스로를 기만할 요량이다.
당신과의 사랑을 되새겨본다. 특별하지 않았던 순간만큼 특별한 순간이 많았다. 기만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그 때 당신이 빛나지 않으면 나도 빛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