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꿈을 꾸는 이들이 만들어낸 나의 꿈, 뮤지컬 최후진술

글 입력 2020.03.3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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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최후진술은 별, 그러니까 꿈을 쫓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윌림엄 셰익스피어,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 접점이 없던 두 역사 속 위대한 인물을 1564년이라는 같은 시대적 배경으로 묶어 둘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사실 뮤지컬 최후진술에 대해서만 서술하더라도 꽤나 할 말이 많을 만큼 좋은 작품이지만, 나는 이 뮤지컬과 나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혹은 나의 덕질 서사기쯤 되겠다.

 

사실 아트인사이트에서 기회를 주기 전에 나는 이미 이 뮤지컬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2018년 7월, 1년간의 해외여행을 한 달 앞둔 때였다. 우연한 기회로 ‘최후진술’을 관람하게 됐고 첫눈에 흠뻑 빠져버렸다. 놀라운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발랄하고 통통 튀었고, 무대의 활용력이나, 두 배우간의 케미, 별을 묘사할 때 조명의 사용 등 매력적인 요소가 너무 많은 뮤지컬이었다.


특히나 무대 위쪽의 전구가 하나둘씩 반짝이며 별을 묘사할 때는 나도 모르게 홀린 듯 천장을 바라보며 그 안의 별들을 좇게 됐다. 여행 전이라 한창 돈을 아끼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씐 듯이 OST를 샀고, 여행을 떠날 때도 태블릿에 넣어갔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최후진술은 내게 ‘좋아하는 뮤지컬’ 정도였다.

 

내가 간과했던 것은, 내 여행일정 안에 영국과 이탈리아가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템즈 강을 혼자 걷고 있을 때 불현 듯 최후진술의 한 구절이 떠올라서 음악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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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진술의 넘버인 '그래도 지구는 돈다'가 재생되는 화면.

뒤쪽에 희미하게 피렌체 두오모가 보인다.

 


따뜻한 늦은 봄 어느 날

강가를 혼자 걸으며 생각했지.

잊고 있었어 오늘은 아들의 세례식.


근데 가기가 싫어.

석양에 잠시 멈췄다

그냥 계속 걸어 다녔지.


특별한 건 없었어.

그냥 걷고 싶었을 뿐.

미안해. 이렇게 내가 한심한 아빠라서.

 


아마 여기서 나오는 강변은 템즈 강이 아니라 그의 고향에 있는 아본 강이었을 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분명 셰익스피어는 이 강변도 걸었을 테니까. 이 음악을 들으며 템즈강변을 걸을 때마다 나는 마치 글감을 찾아 사색하는 셰익스피어라도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자그마한 연결고리 하나가 그 순간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뮤지컬의 메인인 갈릴레오의 삶의 배경이었던 이탈리아에서 더욱 심화됐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피사의 몰락가문 출신이고 그의 삶 대부분을 피렌체에서 보낸 사람이다. 즉 갈릴레오는 피렌체의 그의 방에서 바라봤던 별들을 그렇게나 열망하고 사랑했던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었는데, 그냥 혼자 노래를 들으며 피렌체의 아르노 강변을 걷다가 ‘최후진술’의 노래가 귀에서 흘러나올 때 번개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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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울게했던 아르노의 강변.

늘어선 가로등과 물에 비친 반사가

마치 별이 수놓인 하늘을 연상케한다.

 


하늘을 봐

밤하늘에 별들의 무도회 시작되네.

죽은 별들의 파반느,

어린 별들의 살타렐로


하늘을 봐

밤하늘에 별들의 합창이 시작 되네

달의 노래는 비바체

은하수 물결은 안단테.


(...)


하늘을 봐

밤하늘에 황금빛 무도회 시작되네

새까만 용광로 속에서,

황금 별들이 춤추잖아.


하늘을 봐 (하늘을 봐)

밤하늘에(밤하늘에)

황금빛 멜로디 들려오네.


별의 속삭임 칸타빌레 깊고 푸르른 노빌레.


 

아르노 강변을 따라서 가로등이 죽 늘어서 있었고, 형광등의 불빛은 물에 비쳐 반사되고 있었다.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인 ‘별이 빛나는 밤에’서 별과 가스등과 물에 비친 반사가 구분이 가지도 않게끔 서로 어우려져 단지 완벽한 ‘별이 빛나는 밤’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아르노 강변의 불빛은 마치 별처럼 보였다.


최후진술 무대에서 하나씩 점멸하던 전구의 불빛과, 그를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좇던 갈릴레오의 눈길이 선했다. 나는 지금 그가 살았던 곳에서 그가 사랑했던 장면을 바라보고 있구나. 그 생각이 드니 갑자기 눈물이 울컥 나오려고 했다. 더욱 더 많은 불빛을 보고 싶어서, 별을 좇는 갈릴레오와 같은 마음으로 강변을 따라 더욱 더 많은 가로등을 한 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갈릴레오가 살던 그 때와 달리 별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별들의 합창이자, 무도회였다.

 

그렇게 그 한겨울의 강변을 몇 시간이고 걷고, 또 걸었다. 손이 얼어서 셔터를 누르기 힘들 때까지. 그렇게나 바라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뮤지컬 최후진술을 보지 않았다면 내게 별 의미 없었을 야경이 나를 그 무엇보다 행복하고 벅차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그 이후 아르노 강변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이 됐고, 피렌체에서 나는 습관처럼 “힘든 사람이여, 아르노 강변을 보라!”고 말하고 다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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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시장이 열렸던 캄포데이 피오리 광장.

멀리 브루노의 동상이 보인다.

 


피렌체 이후 로마에서도 갈릴레이의 흔적들을, 아니 최후진술이 내게 가져다준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갈 곳을 정하기 위해 지도를 뒤지다가 ‘캄포 데이 피오리’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내 눈을 의심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이것도 최후진술의 넘버였는데?


급하게 검색을 해보니 이곳이 ‘브루노’, 그러니까 갈릴레오 이전에 지동설을 주장했던 인물이 처형당했던 장소였다. 발걸음을 재촉해 가보니 그곳에선 시장이 열려있었고, 저 멀리 브루노의 동상이 보였다. 단지 넘버를 좇아서 여기까지 왔을 뿐인데 뜻밖에 로컬 시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행복한 기분으로 시장을 구경하고, 브루노 동상 앞에 섰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갈릴레이의 마음으로 동상에 인사를 올렸다.

 

바티칸에서 나올 때는 장난스레 ‘그래도 지구는 돈다’를 흥얼거렸다. 실제 갈릴레이가 바티칸에 의해 종교재판을 받고 나오면서 이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이 음악을 바티칸에서 흥얼거린다는 것에서 오는 감동을 막을 순 없었다.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했던 흥얼거림이었는데 부르면 부를수록 목이 메어왔다.

 


내 말 들려요?

미안하지만 대화의 속편은

못 쓴 게 아니라, 안 쓴 거야!


이젠 내게 시간이 없어.

지금이 마지막 기회

나, 이제 말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돈다

지구는 춤춘다.

밤하늘의 무도회, 지구는 춤춘다


(...)


연극이 끝나갈 때 주인공의 마음에

황금빛 무도회 시작되면

천국과 지옥은 사라지고.

인생의 최후진술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질문과 대답들과 후회 없는 노래


무대의 조명 빛이 하나 둘씩 꺼지면

나의 주인공은 밤 하늘 별이 되네


 

별을 좇고, 소설을 좇던… 꿈을 좇는 그들의 모습과 여행을 하는 내 모습이 겹쳐보였다. 생활고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놓을 수 없어 여행을 지속하는 나와, 자신의 실리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꿈에 미쳐있는 그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니 지금 그 순간이, 그 순간을 살아가는 내가 더욱 사랑스러워졌다. 뮤지컬 한 편이 이렇게나 내 여행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니. 참 나답다 싶으면서도 이 뮤지컬을 만들어준 모두에게 감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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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는 이의 모습.

이 모습은 나도 꿈꾸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도 약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귀국한지 어언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 우연히 나는 아트인사이트로부터 최후진술에 문화초대를 받았다. 처음 문화초대 공고가 왔을 때부터 설렜다. 오랜 옛사랑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랄까. OST를 다시 꺼내듣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최후진술을 관람하러 갔다.

 

그리고… 여전히 이 뮤지컬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전등이 하나둘 씩 점멸할 때 내 머릿속엔 아르노의 강변이 펼쳐진다는 것. ‘캄포 데이 피오리’에선 광장에 외로이 서있던 브루노의 동상이, ‘그래도 지구가 돈다’에선 너무나 행복했던 바티칸이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귀국 후 꽤나 시간이 지난 지금은 취업준비라는 현실에 치여 여행을 잊고 살곤 했다. 자꾸 떠올리면 괴로워지니까 현실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초라한 내 모습만 자꾸 보게되니 우울감이 찾아왔었다. 뮤지컬 최후진술은 잊고 있던 나의 사랑스럽고 반짝이는 모습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해주었다. 여행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다시 그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어주는 뮤지컬이라니. 내가 어떻게 이 극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꿈을 꾸는 이들의 꿈은, 나의 꿈이었던 여행을 더욱 꿈만 같게 만들어줬고 현실로 돌아온 이후에도 또 다시 꿈을 꾸게 만들었다. 아마 뮤지컬 최후진술의 OST를 보거나, 앞으로도 올라올 공연을 보는 한 나는 계속해서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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