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문학의 바다로 -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도서]

글 입력 2020.03.2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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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제목,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이다.


책에서 제목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책의 모든 내용을 포괄하는 하나의 짧은 문장, 제목은 그를 집약하고자 애쓴 소치일 테니 말이다. 이렇게 말하기로서니, 제목은 책의 참 정수. 400페이지를 1줄의 문장으로 응축하는 일이란……


그래서 나는 책을 읽자면, 우선 빈 페이지에다가 책의 제목을 써둔 채로 독서를 시작한다. 독서 중간중간 깊이 와 닿은 내용들은 그 밑으로 채워져 들어온다. 그러나 이 의식, 빈 페이지에 제목 하나를 덩그러니 마련해두는 것은 생산적 독서 행위를 위함 이전에, 여정의 도중 제목을 잊지 않기 위함. 대주제이자, 목적이자, 길을 잃지 않고 독서를 마무리할 수 있기 위해서 마련하는 하나의 장치이다.


그리고 일 회독이 끝났다. 이런 장치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내가 길을 잃은 것일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도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라는 명제에 담겨 있을 저자의 생각과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저자가 비유하는바, 문학에 ‘빠져 죽음’은 무엇이고 그것은 왜 기피의 대상인 부정적인 것이 되었나? 직감하는 것 없지 않지만, 분명하게 제시된 것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이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한, 나는 책을 다시 훑어 보아야 했다. 제목은 책의 가장 처음에 접하는 ‘질문’이고, 그에 대한 ‘답변’은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 긴 여정 속 난립하는 생각들을 하나로 집약하는 행위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는 바 있기에.


머리말인 ‘책머리에’를 다시 편다. 흘리듯 지나친 첫 문장이 다시 보인다.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는 저자가 재작년 펴낸 ‘책에 빠져 죽지 않기’와 상관이 있는 책이라는 말. 분량 문제로 외따로 빠진 것들이라는 말. 곧 책날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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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하나도 채우지 못했던 책들은 수만 권으로 불어났고, 이제 나는 더 이상 책들을 세지 못한다. 이 책들을 다 읽으려는 욕심은 바닷물을 전부 들이켜겠다는 것만큼이나 무망한 욕심이다. 언젠가 그 욕심을 다 비우게 되면 인생의 마지막 책장에 20권 정도만 남겨놓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까지 내가 씨름해야 하는 현실은 책의 바다이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다.

 

- ‘책에 빠져 죽지 않기’ 서문 中


 

“책 읽기가 계속되는 한, 책의 바다에서 벌이는 고투에서 살아남는 한, 나는 계속 읽고 쓸 것이다.”



저자가 재작년에 펴낸 책, ‘책에 빠져 죽지 않기’의 머리말이 여기 인용되어 있다. 여기서 책의 바다와 익사의 모티프에 대해 조금 알겠다. 물론 애초, 그리 낯선 비유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책의 바다에 익사한다는 말은, 무엇을 비유하는 것일까. 문학이 세상엔 너무 많아 죽을 때까지 읽더라도 다 읽지 못할 정도라면, 그것을 하나의 무궁한 원천인 바다로 비유할 수 있겠지. 위의 서문에 입각해서 생각해보자면, 세상 모든 책을 전부 내 안에 가져보겠다는 마음은 자명한 욕심이다.


이 책은 영국·미국·프랑스·독일·러시아 문학과 일본·중국·한국 문학을 두루 다루고 있는 서평이니, 문학의 총체인 이 바다 위 어떤 길라잡이로서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바다에서의 길라잡이라고 한다면 역시 나침반이고, 저자가 기피하는 것인 익사에 대한 대립 항으로서의 배이다.

 

‘너무 많아 다 갖지 못할 일이니 우선순위를 두고 탐독하라. 또한, 길이 너무 많아 길을 잃을 터이니 나침반을 가지고 항해하라’는 말 정도로 해석하기로 한다. 걸작들로 칭해지는 것을 모조리 읽기에도 생의 시간이 그리 충분치는 않을 것이니 ‘문학의 나침반’, 그 필요를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문학으로 익사한 자의 슬픔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 슬픔을 알고 느끼는 만큼, 익사로부터의 도피는 절실하거나 마땅한 것이 될 것이다.

 

 

 

문학이 필요한 이유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선, 바다로 들어가고자 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 않은가? 문학을 읽기 위해선, 문학을 필요로 해야 한다. 심지어 이 책을 손아귀에 넣고, 기어이 피게 만드는 데까지도 문학에 대한 필요가 있어야 했다. 이 책이 문학 길라잡이서라는 것을 능히 직감하기에. 공교롭게도, 위의 서론 후 책의 시작엔 곧바로 ‘문학이 필요한 이유’라는 이름의 챕터가 등장한다. 퍽 마음에 드는 순서이다.


 

“책은 각자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거나, 그게 아니면 존재를 견딜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18세기 영국 평론가 새뮤얼 존슨의 말이다.


(중략)


다만 실즈에게는 그 두 선택지 가운데 한 가지는 배제된다. “각자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은 별로 유효한 처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 실즈로서는 단순히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책은 ‘엄청난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 책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 각자의 존재를 견디게끔 해주는 것, 그것이 책의 존재 목적이다. 모두가 동의하진 않더라도 그런 생각으로 책을 쓰는 작가들이 있고, 또 읽는 독자들이 있다.


- p. 15

 


개인적으로는 아주 공감하는 말이다. 어쩌면 스스로 이 책을 쥐게 만든 어떤 필요도 여기에 있었지 않았나 한다. 지금 괴롭지 않은 사람, 지금 즐거운 사람은 문학으로 돌아올까? 아주 고요한 곳에 처해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그저 듣곤 상상을 펼치는 행위인, 문학 행위로 돌아올까? 나는 질문해보았다. 물론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다.


문학의 효용 가치는 정말이지 인간만큼 다양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중 가장 여실한 가치는, 생의 고통을 완화하는 것이 아닐까, 아직 내 젊은 짧은 식견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가치란 분명 희소성에 기반을 두는 성질이라면, 생의 고통을 완화하는 것이 높은 희소성을 가지는 것이라곤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것을 충족시킬만한 것들은 역시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은가?

 

생의 고통을 문학을 통해 완화하는 것, 다른 비유를 가져오자면 ‘문학을 통한 치유’라는 꽤 유명한 비유를 들 수 있겠다. 나는 왜 이 식상한 말에 공감을 가지게 되었을까. 역시 그 체험과 필요를 너무도 깊이 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지금 괴로운 때에 책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소상한 과정과 내력을 다 밝히자니 지지부진하겠고, 꽤나 사랑하는 문학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만 이야기하고 싶다. 대개는 시이지만, 소설의 아름다움 또한 가까이 공감할 수 있었다.

 

‘책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 각자의 존재를 견디게끔 해주는 것,

그것이 책의 존재 목적이다.’

 

책을, 문학을 향유하는 독자의 입장과 까닭이야 숱하게 많겠지만, 책이 존재하는 까닭, 책이 쓰이는 까닭은 위의 명제에 그 본질을 둔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문학이 예술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나는 섣부른 생각을 가져본다.

 

예컨대는 만인의 예술이 된 명저들, 본 책에서 서평의 대상으로 다룬 역작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왜 우리는 그 책들을 예술작품이라고 떠올렸던가. ‘예술작품’ 이 네 글자에는 분명, 모종 존경과 감탄, 감동 등의 감정이 짙게 베여 있었다. ‘어떻게 이런 대단한 것을 쓸 수 있었지?’ 하나, ‘이렇게나 나를 울리고 또 기쁘게 만드는 것이 있을 수 있다니.’ 둘. 그리고 문학을 통한 치유의 요인인, 공감과 발견, 셋.


작가는 ‘있을 법한’ 세계를 창조하고 그를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이면, 우리 독자는 그 안에서 인간을 발견한다. 우리와 닮은 그들, 나약한 필멸자들의 오뇌를. 즉, 작가는 인물과 배경과, 삶을 설계하고 우리는 그를 맞이하고 그려내고, 조금의 앎을 건져 간다.

 

응당 나의 일상과는 멀되, 분명 어딘가 ‘있을 법한’ 허구, 그 인물들은 하나의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추었다. 숱한 문학 속 무수한 유형의 인간과 그 속성들은, 결국 전부 지금을 ‘살고 있는’, 또한 매일을 ‘살아갈’ 나를 위함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지금 내가 답을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소한 삶에 정처해, 이 반경 너머의 것인 어떤 해소와 해갈 혹은 탈출을 찾던 내가.

 

지나치게 효용론적인 시각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문학을 예술로 바라보는 일은, 심미적인 감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문학이 애초 완전히 심미적일 수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 청각에 직접 닿는 음악, 시각에 직접 닿는 미술에 비하자면 말이다. 글은 일단 눈에 닿는 ‘검은 것’이고 그 위로 우리는 스스로 가진 상상력을 이용해 나의 그림을 그린다. 완벽한 청사진을 작가는 그려두었지만, 여전히 이 안에 전개되는 영상은 나의 그림이기도 한 것이다.

 

사건이 진행되는 공간, 인물의 생김새와 표정까지 우리에게 모두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여태 본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한낱 말로는 그 얼굴을 그려 보일 수 없다. 이 말의 위로, 내가 가진 어떤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기억이 소환되는 것이라면. 나아가선 여러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의 원형 위로 내가 심상의 붓을 드는 것이라면, 일종의 DIY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예술로서의 지위는, 그러므로 선사 받는 아름다움보다는 선사 받는 ‘의미’에 의함이 아닐까. 참 건방진 생각이다.

 

이 책은 예술로 공인된 명저들에 대한 서평이다. 그리고 그 서평이 가지는 의의는, 책에 담긴 의미를 잘 규명하는 데에 있을 것이고 말이다.


 

 

문학의 주인공과 나, 우리에 대하여


 


'존재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존재를 견디게끔 하는 것.'

 

이 중 전자, 존재에서의 벗어남이 부정되는 까닭에 깊이 동감한다. 존재에서 벗어나는 감각이란 낭만적 환상을 통해서 짧게만 지속될 수 있는 것,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터이니 말이다. 순간의 고양감, 세차게 몰아치는 낭만적 감동의 폭풍은 반드시 스러지게 마련이지 않았던가. 시간의 지엄함 앞으로 스러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필멸자의 감정은 더더더욱이.


일상과 현실보다 굳게 짜인 감각은 없었다. 결국, 책이 끝이 나고, 어두운 나의 서재로 돌아오면 꿈은 깨거나 깨어지는 법, 현실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존재로부터의 해방, 그 순간 고양된 감각은 반드시 깨어지는 것이 되어, 외려 슬픔을 상기시키거나 허무를 피워올릴지 모르겠다. 애초 존재로부터의 자유가 가능한 것 인지에서부터 나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나 지금 여태 나를 오래도록 괴롭혀온 나의 현존재로부터 벗어났지, 그것은 너무도 자유로웠어.’ 하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감각으로, 언제나 그랬듯 감각은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감각과 실재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므로. 존재로부터의 자유가, 실재하는 나의 어떤 변화도 없이 내적인 움직임만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면, 글쎄 고요하게 까닭도 모르게 왔듯, 그렇게 가지 않을까.


만약 그 잠깐의 감각을 위하여 독서에 매진하는 것이라면, 조금 슬플지도 모르겠다. 바라는 해방의 감각이 실재하는 삶의 영역에 없음을 알아, 자꾸만 그를 찾아 돌아오는 모습일 테니. 그러나 천일을 가는 감각은 없었다. 짧은 생명력을 지니는 그것의 얼굴이 다만 유한해, 서고 지고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 때에 우리가 찾는 해방의 ‘감각’이란 무엇일까. 짧은 잊힘과 깨어짐의 반복이라면.


그러므로 책은, 선물인 '존재로부터의 해방의 감각'보다는, 가르침인 '존재에 대한 인내의 까닭'으로 작용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는 저 말에 동의한다. 그 가르침이란 여기, 내 앞을 타이르는 명백한 스승의 손짓이라기보다는, 멀리서 아롱지는 깨달음으로의 은밀한 인도일 것이다. 소설과 소설가는 웬만해서는 무엇이라 명백히 선언하지 않는다. 다만 삶을 보여줄 뿐. 나 여기 깊은 고통에 있는 때, 해방으로의 갈증과 의지가 여실히 불타오르고 있다면, 바로 그 간절한 눈빛이 저 삶 속에서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도망치지 못할 값이라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은 인내하는 일뿐이다. 생이 지금 잊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고통이고, 이에 우리 할 수 있는 전부가 인내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모색할 만 한 것은 ‘잘’ 혹은 ‘너끈히’ 인내하는 방법이 된다. 그 방법 자체, 혹은 그 방법으로 안내하는 길이 세상에 여럿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책인 것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 괴롭지 않은 이, 슬프지 않은 이, 혹은 지금 즐거운 이는 문학으로 돌아오겠는가, 나는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저기 바깥엔 너무도 명백한 감각인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은 아직 나의 것인데도? 의식의 영사기를 열심히 돌리어 흐릿한 영상을 그리곤, 구경하고 질문해보는 것이 전부인 이 고독한 곳으로?


 

“나는 문학이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길 바라지만, 그 무엇도 인간의 외로움을 달랠 수 없다. 문학은 이 사실에 대해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문학은 필요하다.” 그런 문학이 없다면, 우리는 더 외로울 것이다.

 

- p. 19

 


문학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곧 외로움에서의 완전한 탈피, 그 약속 혹은 보증이다. 문학은 그저 외로움을 조명한다. 그 안에서 춤추는 캐릭터는 온몸으로 여실히 그 외로움을 겪는다. 날 대신해, 혹은 나와 같이.


그래서 그다음은? 캐릭터는 그 외로움을 겪으며, 견디는 것에서 이야기는 마치던가, 아니면 극복을 향하여 이야기는 나아가던가. 그것은 책마다 각각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마땅한 모습들, 견딤에 뿌리 두고 있을 것이고 말이다.

 

 

 

결론


 

말이 길었다.

 

그러므로 나와 저자가 생각하는 책, 특히나 문학의 가치는 ‘존재를 견디게끔’ 만드는 것에 있다. 만약 이 필요를 여실히 가지고 있는 어떤 이라면. 넘실거리는 갈증을 안고, 또한 그를 대결하며 인내하는 와중에 해소를 꿈꾸고 있는 이라면, 문학으로 들어오길 바란다. 그리고 그러한 필요로 이 바다에 들어온 당신께는 나침반 하나가 필요할 것이다. 바다는 너무 지나치게 넓어 바다이기에. 길이 지워져 사방 수평선 너머로 향한 모든 곳이 길이 되는 여기, 곧 바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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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모조리 공감하는 당신께라면, 이 책을 권할 만 하다. 저자의 말, “너무도 유명한 작가와 소설에 대해 간략하게 말하기(p.291)”가 이 책에는 잘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800 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을 가지고도, 서평은 10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그리 큰 배경지식 없이도 쉬이 읽히는 이 책, 문학으로 항해하기에 앞서 편안한 이정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아마, 내가 먼저 이를 나침반으로 삼기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즈는 자신이 온 마음으로 믿는 55편의 작품을 나열하고 그 이유도 간략하게 덧붙이고 있는데, “수많은 책을 그럭저럭 아는 것보다 10여 권의 책을 아주 깊이 아는 것이 낫다”는 D.H. 로런스의 충고를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55권의 맹우들이라면 꽤 든든한 처지이지 않을까. - p. 17

 

언젠가 그 욕심을 다 비우게 되면 인생의 마지막 책장에 20권 정도만 남겨놓게 될지도 모르겠다. - ‘책에 빠져 죽지 않기’ 책머리에 中



항해의 끝, 우리에게 남는 것은 100여 권 안 되는 수의 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를 진정으로 가지기 위해선, 꽤 긴 항해를 해야 할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길이 있는지 없는지를 우리는 온몸으로 체험해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재의 삶과, 저 가상된 삶 모두를 겪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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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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