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에 빠진 긴 생머리 소녀, '폴라로이드 작동법' [영화]

김종관 감독 - '폴라로이드 작동법'
글 입력 2020.03.2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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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지...’ 좋아하는 선배의 발소리가 문밖 너머로 들려올 때, 소녀는 초조하게 물 컵만을 만지고 있다. 컵 안에서 살며시 녹고 있는 얼음은 설레임에 녹아드는 그녀의 마음을 은유한 것만 같다.


선배가 등장하자, 소녀는 힐끗힐끗 선배를 바라본다. 얼굴은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채로.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작동법을 설명해 주는 선배의 말은 그녀에게 들리지 않는다. ‘혹시라도 내 마음을 들키면 어쩌지’, ‘떨려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는 눈빛으로 그녀는 무력하게 선배의 눈빛, 손짓만을 바라볼 뿐이다.

 

줄곧 소녀의 얼굴만이 클로즈업 되어 보여 지는데 어쩔 줄 몰라 하며 붉게 달아오른 표정이 돋보인다. 미세한 눈동자의 떨림 하나하나까지 포착하여 떨림과 긴장을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소녀의 얼굴에는 살짝살짝 빛이 닿는데, ‘혹시 내 마음을 들키기라도 하면...’이라는 아슬아슬한 심정을 표현한 것만 같다.


반면 선배의 얼굴은 영화상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목소리만이 소녀의 귓가에 들릴 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부끄러워서 잘 쳐다보지 못하듯이 이런 소녀의 심정을 반영하여 의도적으로 촬영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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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선배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다. 줄곧 선배를 쫓는 그녀의 눈동자처럼 대상을 바라보고 포착하는 카메라는 그녀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폴라로이드 사진 또한 언제까지나 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첫사랑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줄곧 클로즈업으로 찍히는데, 마치 선배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인 것처럼 강조되어 보인다. 좋아하는 사람과 붙어있기 위해 함께 공부를 하거나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는 것처럼,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배우는 것 또한 그녀가 선배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구실로 작용한다.

 

소녀가 입고 있는 흰옷과 화장기 없는 피부는 마치 순수함을 표현한 것만 같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오직 순수하게 선배만을 바라보는 마음을 잘 나타내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감추고 싶어도 감춰지지 않는 떨림이 느껴지는 표정은 순수한 어린아이를 보는 것만 같다.


소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투명한 유리조각이 생각난다. 감추고 싶어도 속마음이 투명하게 보이고, 너무나도 깨끗하고 연약해 보이는 소녀의 이미지 때문에. 흰 눈같이 새하얗고 맑은 이미지로 인해 혼자만의 사랑이 너무나도 아련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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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소녀는 거의 말이 없다. 짧게 단어 몇 마디를 언급할 뿐. 선배의 물음에도 “네.”라고 대답하는 등 소녀는 말을 잘 잇지 못한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서면 작아지듯 소녀의 마음도 한없이 작아질 뿐이다. 자기 자신보다 선배의 표정, 말투, 행동이 더욱 와 닿는 그녀이다.


반면 선배는 소녀에게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길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하지만 그 친절함이 어쩐지 더 슬프게만 느껴진다. 소녀는 선배만을 바라보고 있지만 선배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선배의 얼굴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 카메라를 바라보는 선배의 시선, 이러한 엇갈린 시선은 마음을 더욱 아프게, 또 아려오게 만든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아이러니하게도 앞에 잘 나서지 못하게 된다. 너무 떨리고, 부끄럽기도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혹시라도 내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한다면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더 조심스러워진다.


그렇게 뒤에서 바라보고, 혼자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문자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면 사랑의 종착지는 짝사랑으로 남게 된다. 이렇듯 짝사랑 중에는, 앞에 나서서 표현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밉기도 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너무 좋고 마음이 자꾸 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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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면서도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짝사랑. 자꾸만 눈길이 가고, 자꾸만 주고 싶고, 자꾸만 보고 싶은 그 사람. 상대방은 나를 몰라줘도 '내가 좋아하니까, 그걸로 됐어.'라는 마음가짐. 이렇듯 <폴라로이드 작동법>은 6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도 짝사랑의 감정 상태를 함축적으로 담아내었다.


영화는 작지만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내가 사랑한 사람들을 추억하기에, 현재 나의 마음을 몰라주고 있는 사람을 떠올리기에 6분이라는 시간은 충분하게 다가온다.

 

영화 속 사랑에 빠진 한 소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큰 공감을 이루어 준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처럼 소녀는 마치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누군가를 몰래 짝사랑하고 있다면, 혹은 지난날의 짝사랑 상대가 생각이 난다면 이 영화를 꺼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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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오게 되죠

마주치면 어떡해

조심스럽게 기다리고 있죠

아무것도 바라는 건 없죠

 

멍하니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가요

멀리서 멀리서 나만 봤음 해요

 

Hey you 내 맘 알고 있나요

요즘 나 매일 어린아이

같이 몰래 숨어 바라보죠

You 내 말 듣고 있나요

아직 나 용기나질 않아요

말없이 또 다녀가요

 

이달의 소녀 (현진) - “다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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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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