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청동기 시대'가 아니라 '아마 시대'였어야 했다 - 총보다 강한 실

책 <총보다 강한 실>과 여성주의 역사학
글 입력 2020.03.27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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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직물은 무기보다도 중요했다. 직물은 몸을 보호하고, 따듯하게 해주고, 나중에는 지위의 시각적인 상징물이 됐다. 또 직물은 인류의 가장 매력적인 자질 중 하나인 창의력을 발휘하는 통로를 제공했다. (중략) 맨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순간부터 직물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야망과 솜씨를 담아내고 있었다.

 

p. 58



실은 야망을 담고 있다. 애환도 담고 있으며 눈물 혹은 분노, 사치, 유흥, 슬픔, 기쁨 등 사실상 인생에 모든 순간을 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은 태어난 직후 천으로 덮히며 죽을 때 역시 천으로 덮힌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하는 유일한 건 아마도 천 뿐이다. 태어날 때부터 나체족이 아닌 이상에야 인류와 함께한 직물, 섬유지만 이에 대한 취급은 부당할만큼 좋지 않다.

 

청동기 시대에 가장 많이 쓰였던 재료는 청동이 아니다. 철기 시대 역시 철이 아니다. 도자기와 직물이 주인공이다. 시대적 특징이 분명하고 주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직물은 중요한 물건을 싸고 있는 장애물 정도로 취급 당하며 역사의 귀퉁이에도 쓰이지 못한 채 재로 사라졌다.

 

여인 모두가 '아마'라는 식물로 실을 잣고 직물을 만드는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그 시대를 청동기 시대라 부른다. 아마 후대에 21세기를 부를 땐 '폴리에스테르기'가 아닌 '핵미사일기'라고 부를 테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게 더 남성적이다. 실을 잣는 건 역사적으로 여자들의 일이었고 옷을 만드는 것 역시 여자들의 '업'이었으니까. 여자들의 업적은 '업'이 된 채 그렇게 지워진다.


*

 

모두 과거의 일이 아니냐, 라고 말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기계화가 이루어진 직물 생산 시스템 속에서도 직물과 여성의 연결고리는 분명 존재한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직물 산업에 고용된 노동자만 400만 명가량 되는데 그중 80퍼센트가 여성이다. 그들은 공장의 남자 관리자들에게 보복을 당하거나 정치적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비율이 극히 낮다.(2015년 기준으로 15만 명 정도). 2014년 방글라데시의 의류 수출은 나라 전체 수출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p. 35



나라 전체 수출의 80퍼센트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 여성들은 보복이 두려워 자신의 권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 문장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저 수없이 지나가는 문장들 중 하나로 여기며 훑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지금 이 글 속에서조차 이 문장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유는 하나다. 너무도 많이, 자주, 이러한 일이 반복되어 왔기에 그다지 눈에 띄는 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와 사회 속에서 우린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는 걸 수없이 봐왔다. 레이스가 사치품으로 여겨지며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레이스를 달던 시대에도, 비단이 엄청난 값에 수출될 때도, 레이온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을 때도 그걸 만들던 여성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레이온 공장에서 노예노동을 이용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고집 세고 반항적이며 경험이 부족하고 영양실조와 과로에 시달리는 미성년 노동자들은 사고에 극도로 취약했다. 아네스도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할머니가 됐고 항상 건강이 좋지 못했는데도, 일에 대한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한 채 날마다 길게는 12시간 동안 혼자 기계를 작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또 그녀와 동료 노동자들은 관리자들에게 수시로 육체적 학대를 당했다.

 

(전략) 강제 노동자들은 하루에 딱 2번만 화장실을 갈 수 있었고 급수대는 아예 사용할 수 없었다. 사실상 그들은 관리자의 허락을 받아야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전략) 얼마 후에는 관리자들이 방적실에서 일을 시킬 수 이쓴 사람들은 여자들뿐이었다. 아녜스처럼 강제 노역을 하는 여자들.

 

p. 288-289



여기서 등장하는 아녜스는 전쟁에 필요한 섬유를 만들기 위해 섬유 공장에 강제 노역으로 끌려온 여자다. 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래도 기계실 노동자들이 가장 애처롭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유인이었고 유급 노동자였으나 항상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들을 애처롭게 여기며 가슴 아파했던 아녜스는 이내 알게 된다. 그들은 나갈 '자유'가 있었으나 자신들에겐 그게 허락되지 않았음을. 결국 가장 애처로웠던 건 아녜스였다.

 

이젠 전쟁도 지나갔고 편안히 이 책을 읽고 있을 독자들은 섬유와 여성 착취의 연관성을 염두할 필요가 없을까? 유튜브를 켜서 테니스 경기를 틀어보자. 왜 여자 선수들은 그렇게 나풀거리고 불편해 보이는 짧은 치마를 입고 테니스를 칠까? 비치발리볼 선수들은 왜 비키니를 입고 할까? 운동을 할 때 최대한 작게 입어야 한다면 남자 선수들도 아마 너도나도 따라했을 것이다. 그런데 남자 선수들은 모두 반바지를 입고 있다. 그것도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다.



여자 선수들의 올림픽 공식 복장은 "측면 폭이 최대 6센티미터"인 비키니 수영복이었다. 선수와 관객 모두 이런 규정을 만든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선수들의 실력 발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유였다. 한 선수는 2008년 <선데이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종목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섹시한 스포츠를 원하거든요."

 

p. 350



여전히 사회는 여성들을 착취한다.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못한 방글라데시 섬유 공장 여성 노동자들, 자꾸만 올라가는 수영복을 끌어 내리며 경기를 진행하는 여성 비치발리볼 선수들이 버젓이 존재한다. 책 <총보다 강한 실>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인류와 함께 발전하고 때로는 역사를 뒤흔든 원인을 세밀한 시선으로 관찰한다. 그 시선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되새겨본다. '핵전쟁기'가 아닌 '폴리에스테르기' 혹은 '진jean기'가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김명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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