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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나이를 묻는 사람들에게 종종 듣는 말이 있다.
“한창 좋을 때다 야.”
내게 이 말은 찰나의 안심을 허락해 주지만 그들이 말하는 ‘때’ 이후의 긴 불안을 예고한다. 이 정도가 한창 좋을 때라면 나의 중년과 노년은 어떻게 된다는 건데?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 2014)는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연출한 영화이다. 마리아 엔더스(줄리엣 비노쉬)는 20년 전 자신이 출연했던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리메이크 작에 출연한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능력 있는 40대 ‘헬레나’가 마력의 연하 ‘시그리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버림받는 내용의 연극이다.
마리아가 20년 전 맡았던 역은 ‘시그리드’, 다시 제안받은 역은 ‘헬레나’다. 고민 끝에 마리아는 ‘헬레나’역을 수락하고 매니저인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함께 작품 준비에 돌입한다. 하지만 작품 준비 기간 내내 둘의 의견은 끊임없이 충돌한다. 대본 해석, 영화 감상평, 심지어는 길 찾기에 있어서까지도.
영화의 러닝타임은 약 120분으로 짧지 않다. 이 시간 동안 영화는 획기적인 사건이나 움직임보다는 대화로 진행된다. 배우들은 흠 없이 완벽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덕분에 긴 대화들도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온다. 인물들 간 대화가 중요한 만큼 대부분의 장면들은 미디엄 쇼트로 구축된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마리아의 변덕스러운 주장에는 궁극적인 공통의 이유가 있다.
영화 후반부 연극의 상대역인 조앤(클로이 모레츠)과의 대화 이후 마리아의 시야는 비로소 확장된다.
“아뇨, 중요한 것은
그 후에 일어날 일이라고요.”
‘헬레나’에게 ‘시그리드’가 갖는 미련을 조금 더 표현해달라는 마리아의 부탁에 조앤이 한 말이다. 이 말에 형식적으로 대답하려던 마리아는 순간 깨닫는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연극 또한 그 흐름에 맞춰 ‘헬레나’를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헬레나’는 자신이 확신했던 것처럼 죽은 것이 아니라 발렌틴이 말했듯 사라진 것이다. 각자의 상상 속에서 ‘헬레나’는 어떤 존재로도 살아있을 수 있다.
청춘의 빛을 잃은 생애는 저평가된다. 완숙의 빛이 무시된 채.
하지만 완숙의 빛을 입은 어른은 한층 더 눈부시다.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던 마지막 순간의 마리아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