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흐르는 구름 속 지난날의 미련.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 2014) [영화]

살아가지듯 살아가는 것.
글 입력 2020.03.06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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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묻는 사람들에게 종종 듣는 말이 있다.


“한창 좋을 때다 야.”


내게 이 말은 찰나의 안심을 허락해 주지만 그들이 말하는 ‘때’ 이후의 긴 불안을 예고한다. 이 정도가 한창 좋을 때라면 나의 중년과 노년은 어떻게 된다는 건데?

 

한편 ‘때’를 지난 이들에게 저 말은 현재를 불완전하게 한다. 어느 시절보다 뜨겁고 꽉 찬 인생을 살고 있거나, 그럴 수 있더라도 말이다.
 
오늘 리뷰할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 2014)는 이 ‘때’에 대한 무한한 열망이 인생의 시야를 얼마나 옭아매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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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 2014)는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연출한 영화이다. 마리아 엔더스(줄리엣 비노쉬)는 20년 전 자신이 출연했던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리메이크 작에 출연한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능력 있는 40대 ‘헬레나’가 마력의 연하 ‘시그리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버림받는 내용의 연극이다.

 

마리아가 20년 전 맡았던 역은 ‘시그리드’, 다시 제안받은 역은 ‘헬레나’다. 고민 끝에 마리아는 ‘헬레나’역을 수락하고 매니저인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함께 작품 준비에 돌입한다. 하지만 작품 준비 기간 내내 둘의 의견은 끊임없이 충돌한다. 대본 해석, 영화 감상평, 심지어는 길 찾기에 있어서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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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러닝타임은 약 120분으로 짧지 않다. 이 시간 동안 영화는 획기적인 사건이나 움직임보다는 대화로 진행된다. 배우들은 흠 없이 완벽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덕분에 긴 대화들도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온다. 인물들 간 대화가 중요한 만큼 대부분의 장면들은 미디엄 쇼트로 구축된다.

 
일정한 쇼트와 대조적으로 주인공 마리아는 일관적인 주장을 하지 못한다. 특히 대본 해석에 있어서 그렇다. 영화 초반 ‘말로야 스네이크’의 리메이크를 맡은 프로듀서 클라우스(라르스 아이딩어)와의 대화에서 마리아는 출연을 거절한다. 그녀 자신이 곧 ‘시그리드’이기 때문에 ‘헬레나’를 연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직후 동료 남배우와의 대화에서도 ‘시그리드’의 도덕성에 대해 표면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며 ‘시그리드’를 옹호했다. 하지만 출연을 승낙한 뒤 대사 연습 중에는 ‘시그리드’의 대사가 우스꽝스럽다며 그를 잔인하다고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마리아는 ‘헬레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헬레나’와 ‘시그리드’의 관계 자체가 비현실적이며 그것을 연기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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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마리아의 변덕스러운 주장에는 궁극적인 공통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젊음에 대한 미련이다. ‘헬레나’도, 자신도, 더 이상 젊지 않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한창때’를 지났다는 것. 데이트를 위해 떠나는 발렌틴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는 마리아, 데이트에서 돌아온 발렌틴을 몰래 확인하는 마리아. 그의 마음에 고인 미련을 특히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이처럼 마리아는 대배우임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청년인 발렌틴에게 동경심을 느낀다. 그 젊음이 발렌틴의 어지러운 새벽처럼 순탄치는 못할지라도 말이다.
 
젊음에 대한 미련으로 가려진 마리아의 때 묻은 시야는 객관성을 조금씩 상실해간다. 반항적인 이면을 가진 자신과 닮은 ‘헬레나’를 계속해서 거부한다. 또한, 젊음과 함께 상실되어버린 자신감을 보다 높은 자존감으로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그저 못난 고집으로 내비쳐질 뿐이다. 마리아의 고집은 발렌틴과의 마지막 순간 극에 달한다. 발렌틴은 마리아의 주도로 길을 잃게 되자 현실에 순응하고 다른 방법을 따른다. 이런 그와 대비되게도 마리아는 발렌틴이 바른 길을 가도 심술을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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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반부 연극의 상대역인 조앤(클로이 모레츠)과의 대화 이후 마리아의 시야는 비로소 확장된다.


“아뇨, 중요한 것은

그 후에 일어날 일이라고요.”


‘헬레나’에게 ‘시그리드’가 갖는 미련을 조금 더 표현해달라는 마리아의 부탁에 조앤이 한 말이다. 이 말에 형식적으로 대답하려던 마리아는 순간 깨닫는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연극 또한 그 흐름에 맞춰 ‘헬레나’를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헬레나’는 자신이 확신했던 것처럼 죽은 것이 아니라 발렌틴이 말했듯 사라진 것이다. 각자의 상상 속에서 ‘헬레나’는 어떤 존재로도 살아있을 수 있다.

 

청춘의 빛을 잃은 생애는 저평가된다. 완숙의 빛이 무시된 채.

하지만 완숙의 빛을 입은 어른은 한층 더 눈부시다.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던 마지막 순간의 마리아같이.



[박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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