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실존의 화살을 맞은 인간에게 바치는 찬송 -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뮤지컬]

글 입력 2020.02.23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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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과 다른 맛


 

뮤지컬을 감상한 후에 민음사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었다. 일주일 채 안 되는 리뷰 작성 기간 동안 세 권에 달하는 원작을 다시 읽은 이유는,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와 내가 읽은 원작의 인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필자는 볼륨이 큰 원작이 있는 작품을 공연예술화 시키는 경우를 잘 즐기지 않는다. 현실의 시공간과 텍스트에 담길 수 있는 양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방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을수록, 공연예술의 무대의 주제는 도박이 되기 쉽다. 필자는 가끔 너무 많은 주제를 다루려다 제목 없이 흰 벽에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모던 아트 작품이 된 공연들을 만난다. 관람자들은 난해한 언어와 복잡한 서사 속에서 미아가 되고 만다. 공연예술은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공연예술의 관람자가 복잡한 서사에서 길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작품의 전달이 아쉬운 것이다.

 

당연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공연예술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의 마지막 역작으로 불리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역시 복잡한 인간 문제를 다루는 <죄와 벌>보다 더 확장되고 발전된 주제를 내세운다. 무신론과 유신론, 고뇌하는 인간의 자유와 구원 가능성을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첨예한 시선에서 고민하는 이 작품의 주제가 주는 위압감은 텍스트로도 전하기 어렵다. 당연하게도 짧은 공연시간으로는 더욱 그렇다.

 

이 지점에서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영리하게 설계했다고 볼 수 있다.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표도르 카라마조프, 그들의 아버지가 죽은 시점으로 과감하게 건너뛴다. 필자가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에서 찾은 주제는 크게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립' , '인간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질문',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양가감정'이다. 놀라운 일이다. 이토록 제한된 장면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원작에서 다루고 있는 굵직한 주제는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원작의 질문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지만, 미묘하게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극을 전개한다. 원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알로샤의 시선에서 표현한다면,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질문까지 도달한다.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대신, 네 아들의 혼란스러운 심리 표현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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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멋진 변주곡



'원작의 복제품'으로써 이 작품을 바란다면, 알로샤의 시선이 가진 힘이 상대적으로 덜 두드러지고 이에 따라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달했던 결론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실망하게 될 수 있겠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에 등장하는 알로샤 역시 어두운 시대를 비추는 순수한 등불이지만, 이반의 질문에 '믿음'이라는 모호한 대답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역시 까라마조프 가를 휩쓰는 실존의 화살에 꽂혀 고통스러워하는 인물 중 하나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나약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그의 메시지도 관객에게 큰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창작자의 힘으로 다시 태어난 작품이 원작의 복제품이 될 필요는 없다. 필자는 오히려 네 아들의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둔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표현 방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친부살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가족 드라마는 오락적 기능을 적절히 수행했다. 여기에 이반을 중심으로 관객들에게 던져지는 인간 구원의 문제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와 어우러져 원작의 텍스트에 뒤지지 않는 웅장함을 보여주었다. 물론 원작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시공간의 한계로 각 아들들의 배경을 자세히 살필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긴 했다 (특히 드미트리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틀이 가져올 수 있는 틀을 나름의 표현으로 극복하고, 적절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원작보다 더 강렬하게 극화된 까라마조프 가는 충분히 훌륭하다.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자면, 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무신론자 이반이다. 이반은 현대인을 꼭 닮았다. 그 역시 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품진 않지만, 신이 내세우는 자유와 윤리에 질문을 던진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신비도, 방침도 아닌 자유의지를 선물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유의지를 바라지 않았다. 나약한 인간은 신에게 기적과 신비, 권위를 바랐다. 대심문관은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현신한 메시아임을 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대신해 기적과 신비, 권위를 선물하고자 한다. 대심문관은 갓난아이 같은 인간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처형한다.

 

지성과 자유를 가진 인간은 상상과 현실에서 무수히 죄를 저지른다. 냉소하는 인간, 이반은 그를 닮은 악마를 만난다.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자유의지를 주창하고 그것을 내면화한 인간, 스메르쟈코프는 살인자가 된다. 이 지점에서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현대인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자유를 가진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지성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뮤지컬의 연출처럼, 연기 자욱한 이 질문 앞에서 답을 하는 것보다 고개를 조아리고 고꾸라지는 것이 더 현실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선물했다. 인간은 본능과 달리 단 한 번의 선행을 할 수 있는 존재고, 구원은 -알로샤가 표도르에게 행했듯이- 이마에 입을 맞추듯 찾아올 것이다.

 


 

그 외



이제 주구장창 기술해온 서사의 문제를 잠깐 벗어나서, 그 외 부분을 이야기해보자. 뮤지컬은 기본적으로 세 아들의 심리 변화를 추적하기 때문에 공간 변화가 불필요하다. 이에 따라 작품의 사건은 한 공간에서만 이루어진다. 하지만 지루할 틈 없이 배우들이 최대 성량으로 노래를 부르고, 표현도 극화되어있다.

 

개인적으로 전체적인 연출이 다소 과장되었다고 느껴졌다. 뮤지컬은 내내 높은 텐션을 유지한다. 처음에는 배우들의 연기력과 성량을 즐길 수 있어 좋았지만, 한 공간이라는 제약과 형이상학적 주제, 심리 표현을 중심으로 한 전개로 높낮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필자는 즐겁게 감상한 축이었지만, 주제에 큰 관심이 없는 관객이라면 지루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원작의 하이라이트를 영리하게 잘라낸 수작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기회가 된다면 꼭 감상하시길.

 

 

*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 The Brothers Karamazov -

 

 

일자 : 2020.02.07 ~ 2020.05.03

 

시간

평일 오후 8시

토 오후 3시, 7시

일 2시, 6시

월 쉼

 

장소 : 대학로 자유극장

 

티켓가격

전석 60,000원

 

주최/기획

과수원뮤지컬컴퍼니

 

관람연령

만 13세 이상

 

공연시간

100분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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