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화, 여성이 사라진 자리

글 입력 2020.02.2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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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본다는 것


똑같은 나날 속에서 대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가까운 가족, 친구, 혹은 연예인에게 다른 조명을 비춘다는 것은 어떤 노력을 요구하는가. '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저자인 존 버거는 책의 서두에서 이미지에 대해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p.12).'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보는 것이 일종의 선택이듯 이미지가 창조되는 과정에서도 생산자의 의도가 담긴다는 것이다.
 
위 책은 크게 '이미지의 복제, 누드화, 유화, 광고', 이 네 가지 주제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누드화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흥미롭다. 수 세기에 걸쳐 그려진 누드화 속 여성의 이미지는 이상적인 관객인 남성을 대상으로 생산되었다는 것(p.76)과 벌거벗음(naked)과 누드(nude)는 다르다는 것이다. 흔히 누드와 여성은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되곤 하는데 여성 누드와 예술의 결합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하나의 당연한 논리가 되었고 수 세기에 걸쳐 집요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누드화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적 시선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누드를 다른 방식으로 볼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주장한다.
 


들여다본 누드화


누드화의 공통적인 형식과 내용에는 어떤 장치들이 사용되었는가. 이상화된 여성의 몸과 자세, 그리고 성적 욕망을 용인하는 도구들이 어우러진 누드화 속 여성은 여성 그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남성 관객의 욕망으로 치장된 존재가 된다. 존 버거는 한스 멜링의 <허영>에서처럼 누드화 속 여성이 거울을 비추는 행위는 자신이 보여지는 대상임을 허용하는 사물이며 관객으로 하여금 대상을 용이하게 쳐다볼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p.61). 이 외에도 사라진 음모나 비현실적으로 긴 허리 등 신비화된 여성의 몸이 묘사되며 성적인 신체 부위를 강조하며 몸을 꺾는 듯한 여성의 자세 역시 남성 관람객을 염두에 둔 형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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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멤링 <허영>


 
형식을 바탕으로 전달되는 내용 역시 특정 주체들을 위한 서사 방식이 된다. 자주 사용되는 서사는 ‘수잔나와 장로들’로, 두 노인이 여성을 관음하는 듯한 이 이야기는 틴토레토, 램브란트, 루벤스 등 많은 대가들이 선택한 주제이다. 그러나 실제 사건의 본질은 귀족 부인인 수잔나를 장로들이 강간하는 것이다. 위 화가들의 화폭 속에서 수잔나는 무덤덤하게 거울을 바라보거나 수동적인 몸짓을 보인다.

반대로 동일한 주제를 그린 남성화가들과 명백한 차이가 드러나는 작품이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수잔나와 장로들’이다. 젠틸레스키의 그림 속에서 수잔나는 장로를 인식하고 팔을 내저으며 강한 거부감을 표현한다. 즉, 사건의 맥락과 더불어 주인공인 수잔나가 겪은 고통과 상처에 주목한 표현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후원자, 제작자, 관객 모두 남성이 중심이 된 예술 제도 내에서 누드화 속 여성의 목소리는 사라지며 주인공 남성을 위한 타자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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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포 틴토레토 <수잔나와 장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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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수잔나와 장로들>
 
 

누드 속 여성의 재등장

 

저자는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래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p.64).'라고 말한다. 누드화 속 여성은 타자이며 주인공은 그림 앞에 있는 관객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누드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많은 광고들의 경우 유화의 구도를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만큼 누드화 속 여성의 눈빛, 자세, 등 여성이 타자화 된 서사가 재생산됨을 의미한다. 현재의 광고와 이미지들은 이를 소비하는 관객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 하여금 광고 속에서 나오는 특정 자세, 표정, 외모를 체화하고 원하게끔 한다. 이미지의 복제와 차용이 이전보다 더 용이해진 현재 시점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지운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면 이는 기존 권력구조의 지속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누드화에 내재된 이러한 폭력성과 젠더 구조는 생산자부터 관객까지 남성이 중심이 되었던 사회적 구조와 ‘거장’, 즉, Master의 아우라를 용인해 온 담론에서 기인한다. Master의 여성형이 정부를 뜻하는 ‘Mistress’라는 점은 거장의 지위를 남성과 연결시키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의 목소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낼 수 있는 여성화가의 존재를 가리는 위 단어와 더불어 주류 누드화에 대해 예민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들은 여성을 대상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구도에 직접적으로, 아주 효과적으로 기여해왔다는 점에서 다른 조명으로 비춰져야 한다. 이러한 작품을 비판의 장으로 불러오고 미술계뿐만 아니라 영화, 사진, 광고 등 모든 매체와 수단에서 새로운 담론으로 채워질 때 누드화 속 사라진 주체로서의 여성이 다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강수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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