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숨고 싶은 어린 사랑의 기억 - 바다가 들린다(1993) [영화]

글 입력 2020.02.2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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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브리의 아름다운 영상과 만난 청춘의 사랑


 

넷플릭스에 지브리가 뛰어들었다. 지난 2월 1일, 마녀 배달부 키키, 이웃집 토토로 등 총 7편의 작품이 공개된 것을 필두로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은 4월까지 매월 1일 넷플릭스 스트리밍 서비스에 7편씩 제공될 예정이다. 그런데 이번에 공개된 스튜디오 지브리의 일곱 편의 애니메이션 중 유독 혼자 장르가 달라보이는 작품이 있다. 히무로 사에코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모치즈키 토모미 감독의 <바다가 들린다>이다. 우리가 ‘지브리’하면 흔히 떠올리는 2~3등신의 어린 소녀가 아니라, 순정만화에 나올 법한 6등신의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게다가 사물들이 살아움직인다거나, 상상 속의 동물들이 튀어나오는 등의 판타지적 요소가 제거된 청춘 로맨스물이다.


지브리 역사상 전례 없는, 고등학생의 현실적인 우정과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바다가 들린다>는 그 소재에서 뿐만 아니라 감독 역시 미야자키 히야오 대신 외부 인사 모치즈키 토모미를 들인다는 혁신적 선택을 한다. 젊은 애니메이터를 육성시키기 위한 일종의 프로젝트로서, 스튜디오 지브리의 2-30대 신진 애니메이터들이 대거 참여한 <바다가 들린다>는 어쨌거나 ‘지브리’다운 아름다운 영상미를 자랑한다. 고요히 일렁이는 파도 위에 비친 햇살의 오묘한 색감,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어느 밤의 가로등 불빛, 숨죽이며 전화를 받기 위해 내려간 계단 위에서 비쳐드는 방의 불빛 등, 부드러운 그림체와 합해진 <바다가 들린다> 속 ‘지브리 만의 빛’은 많은 유튜브 음악 스트리밍 채널에서 배경화면으로 애용하게 되는 명장면들을 낳았다.


이런 지브리의 아름다움과 결합한 청춘의 사랑이라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상상만 해도 몽글몽글한 느낌이 드는 것이, 무척이나 설렐 것만 같다. 그런데 이 만화, 보통의 순정만화들과는 좀 다르다. 아무도 두근거리는 대사를 던지지도, 벅찬 사랑의 고백을 하지도 않는다. 아니, 일단 서로 좋아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지브리가 그리는 어린 사랑은 어떠한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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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도쿄의 어느 전철역. 대학생이 된 ‘타쿠(모리사키 타쿠)’가 건너편 플랫폼의 한 여성을 바라본다. 몇 년 전에 만났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과거로 돌아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사카에서도 차로 3시간이 걸리는 소도시 고치에 사는 고등학생 타쿠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 ‘마츠노(마츠노 유타카)’가 있다. 어느 날 마츠노네 반에 한 여학생이 도쿄에서 전학을 온다. 이름은 ‘무토 리카코’. 리카코의 학교 소개를 맡은 반장 마츠노는 바로 리카코에게 반하고, 타쿠에게 리카코에 대해 늘어놓는다. 그런데 이 학생, 얼굴만 예쁠 뿐 아니라, 공부도, 체육도 어느 하나 뒤처지는 것이 없다. 단 하나 빠지는 것이 있다면 다소 거만하고 남과 섞이기 싫어하는 까칠한 성격 정도. 그렇지만 타쿠네 반도 아니고, 타쿠와 엮일 일은 없어 보인다.

 

고치의 자그마한 동네에서 전학생 리카코에 대한 소문은 빨리 퍼진다. 타쿠는 어머니로부터 리카코가 전학을 오게 된 안타까운 사정을 듣지만, 별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리카코는 같은 반도 아닐 뿐더러, 친구 마츠노가 좋아하는 아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와이로 수학여행을 간 첫날, 가만히 있던 타쿠에게 리카코가 다가온다.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타쿠는 당황한다. 적은 돈도 아니고, 무려 6만 엔을 빌려달라고 한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갚지도 않고, 그 돈으로 도쿄에 가겠다고 한다. 친구 ‘유미’까지 무작정 데리고서!


 

 

2. 마음을 인정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달콤하고 풋풋한 고등학생의 연애를 기대하고 이 만화를 본다면 초반에는 실망활 확률이 크다. 분명히 두 주인공이 있는데, 이들 사이에 딱히 연애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순정만화의 공식을 따라가자면 분명히 ‘러브라인’이 존재하는데 ‘라인’만 있고 ‘러브’는 없는 듯하다. 이 두 주인공들은 자기들이 서로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우리가 “쟤네 둘 서로 좋아하네!”라고 곧바로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할 수 있다면, 두 인물의 서툰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거나 낄낄거릴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본래대로라면 전지적 위치에 있어야 할 우리조차 긴가민가하다. 자기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 타쿠의 시선에서 만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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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쿠는 아르바이트 도중 마츠노의 전화를 받고 학교로 달려갔다. 마츠노가 리카코를 소개해준다. 그래, 마츠노의 말대로 예쁘다고 생각한다. 타쿠가 알아챈 자기 자신의 마음의 크기는 딱 거기까지다. 그런데 이 장면에 담긴 리카코를 바라보는 타쿠의 시선에 다른 것들은 없다. 무어라 이야기하는 마츠노도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것 뿐이다. 마츠노는 진심으로 리카코가 마음에 든 것 같고, 타쿠는 “어처구니 없게도” 화가 난다. 왜인지 모른다. 그냥 어처구니 없을 뿐이다. 친구가 나보다 새로 전학 온 여자애를 좋아해서 질투가 난 걸까. 그 화의 근원을 타쿠 스스로도 모른다.


어머니가 타쿠에게 리카코의 사정을 이야기 한다. 무심한 듯 듣는다. 저녁을 먹고 나른히 잠이 든 그날 저녁, 마츠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리카코가 혼자 산다고 한다. 게다가 아프댄다. ‘마츠노는 왜 그런 여자애를 좋아할까’라고 생각한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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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려운 과정이다.좋아한다는 마음은 상당히 많은 배경지식과 자기객관화를 요구한다. 평소답지 않은 나의 마음을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하고, 그 전에 보고 들은 것을 총동원해서 그런 모든 증상들이 사랑의 전조임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판단력이 필요한 일이다. ‘내가 지금 이 사람을 너무 많이 생각하는데’라는 인식이 ‘혹시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가?’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은 생각보다 의식적으로 이뤄져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타쿠의 경우, 누군가를 좋아할 감정적 바탕과 배경지식이 마련되기 이전에 ‘제일 친한 친구 마츠노가 리카코를 좋아한다’는, 리카코를 좋아하면 안되는 이성적 조건이 먼저 생겨버렸다. 온전히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타쿠에게는 버거운 일인데, 마음이 인식하기도 전에 제어되어버리고 말았다. 리카코에 대한 마음을 스스로 알아채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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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나 연애를 하라고 외쳐대는, 연애 담론이 판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답답한 일일 수 있겠으나, 혹시나 사랑을 시작할 준비는 커녕 생각조차 해본 적 없던 (그런 적이 있다면) 순수했었던 시절을 떠올려보자. 드문 경우로 첫 만남부터 심장이 주체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뛰어대면서, 너무도 명백히 ‘너 지금 얘를 특별하게 보고 있어!’라고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 주위에 있던 어떤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파도가 모래에 스며들듯 조용히 마음에 밀어닥치기도 한다.


마음은 그것을 인식하고 이름 붙이는 것보다 한 걸음씩 일찍 찾아온다. 그리고 우린 이따금 제때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흘려보낸 뒤, 나중에야 후회한다. 그것은 높은 확률로, 자신이 언제든 그리고 누구에게든 사랑에 빠질 수 있는 한낱 여린 인간이라는 걸 모르는 어린 시절일 수록 많다. 타쿠보다는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 경험이 많은 우리들은, <바다가 들린다>의 중간쯤에서 알게 된다. ‘타쿠 이 자식, 리카코를 좋아하는구나!’ 이제 쑥맥 타쿠가 답답해지기 시작하고, 막 안타깝고 그렇다. 그런데 우리가 타쿠를 책망한다고 해서 어쩔 건가. 타쿠는 일단 자기 마음을 모르는데, 뭘 어떻게 다가간다는 말인가. 다가가는 것도 어떤 목적지가 전제돼야 하는데, 타쿠는 그 목적지조차 설정 못하고 있다.


 

 

3. 성격 파탄자 리카코? 내가 널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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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치고 조금은 밋밋한 느낌의 초반부 말고도, <바다가 들린다> 속 사랑에는 특징적인 지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타쿠의 짝사랑 상대 리카코가 다소 당황스러운 행적을 보인다는 것이다.

 

한번도 이야기 나눈 적 없는 타쿠에게 다짜고짜 거금을 빌려달라고 하고, 갚지도 않다가 그 돈으로 도쿄에 다녀오겠다고 한다. 게다가 돈을 빌리는 입장에 있으면서 혼자 빵 터지더니, 타쿠의 사투리가 웃기다며 놀린다. 이미 양심이라고는 밥말어먹은 듯하다. 이후로도 리카코의 기이한 행동은 계속된다. 갑작스러운 도쿄행 제안에 곤란해 하는 리카코의 친구 유미를 위해 타쿠가 던진 “내가 대신 갈까”라는 말을, 리카코는 “그래 줄래?”라며 덥석 문다. 이 둘은 서로 친한 사이는 커녕 채무 관계와 마츠노라는 공통 지인을 제외하곤 어떤 접점도 없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도쿄에서 리카코는 기대와 다른 아버지의 모습에 슬퍼하며 타쿠의 숙소로 찾아가 자신의 가정사를 다 털어놓으며 타쿠의 품에 안겨 운다. 원래 방 주인을 쫓아내고 침대를 차지한 뒤 하이볼을 달라고 한다. 기껏 도쿄까지 따라와 줬더니 욕조에서 자는 신세가 된 타쿠의 시련은 끝나지 않는다. 갑자기 전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주며 깔깔대지 않나, 고치로 돌아와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쿨한 척을 하지 않나. 좀 뭐라고 했더니 뺨까지 때린다. 이 애 정말 뭘까. 리카코는 정말 그저 타쿠가 좋아하는 매력적인 인성 파탄자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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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린다>는 이런 겉잡을 수 없는 리카코의 행동들을 대놓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그리지 않는다. 종종 남성 화자의 시선에서 그려진 로맨스에서는, 성격이 썩 좋아보이지 않는 여성 캐릭터의 존재가 마치 ‘까칠하고 도도한 여성’의 ‘튕김’ 혹은 ‘안달나게 만드는 매력’으로만 투사되는 등의 성적 대상화가 일어나곤 한다. 종잡을 수 없는 여성 캐릭터의 성격이 그것의 ‘(여)성적 매력’을 더해주는 노골적인 계기로서 이용이 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데, <바다가 들린다>에서 리카코가 드러나는 방식은 ‘성적 매력’이 아닌 ‘관계’의 문제에 의한 것이다. <바다가 들린다>에서 리카코의 알 수 없는 행동들은 마치 그것이 리카코의 성격적 속성이며 여성적 매력을 더하는 장치인 듯 묘사되지 않고, 타쿠의 시점에서 리카코와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과정에 있어 겪는 난항들로서 기능한다. 순수한 마음들이다.


나에 대한 누군가의 행위가 있을 때, 보통 우리는 상대와 나의 관계 속에서 그 행위의 동기와 맥락을 짐작하고, 그런 이해가 바탕이 되어 행위는 ‘상식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런데 리카코의 행위들은 도저히 맥락도 없어 보이고 동기도 추측할 수 없다. 우리가 타쿠의 제한적인 시선에서 리카코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타쿠는 자기 마음도 들여다보지 못하는 풋내기다. 우리는 타쿠의 시선을 넘어, 리카코의 표면적 행위 뒤에 있는 퍼즐을 끼워맞춰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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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코는 타쿠 못지 않게 미숙하고 서툴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한테는 할 수 없는 부탁이 처음 본 타쿠에게는 가능하다는 점에서 리카코가 처음부터 타쿠에게 느끼는 친밀도는 크다. 감정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상태에서 분명한 것은 타쿠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싶다는 사실 뿐이다. 타쿠에게 좀 더 신경쓰이는 사람이고 싶다. 자기 쪽에서 일방적으로 열어버린 마음 때문에 사회적 자아가 용인하는 것 이상의 정보를 쏟아낸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줘서 경각심을 느끼게 하고 싶다. 그런데 이렇게나 활짝 마음을 열었는데 타쿠는 정작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리카코의 서러움이 폭발한다.


사랑이라는 이름만 붙이면 명확해지는 감정을, 리카코 자신도 모르고 타쿠는 더더욱 알 길이 없기 때문에 리카코의 행동은 매우 충동적인 형태로 나오게 되고, 맥락 없는 것으로 비춰진다. 리카코에게 있어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자각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은 ‘마음에 들고 싶은’ 순간적인 욕망들이다. 타쿠보다는 적극적으로 표출되는 감정의 형태다. 차라리 리카코가 자신에게 그런 욕망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리고 그런 욕망들이 사랑의 전조라는 것을 알아챈다면, 행동들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랑이란 게 알면서도 통제가 안되는 것 아닌가. 우리 모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이따금씩 시선을 갈구하는 ‘관종’이었거나, 관계의 암묵적 거리를 제멋대로 위반하는 ‘또라이’같은 짓을 한 뒤 이불을 걷어차본 적이 한번쯤은 있지 않은가. 우리는 리카코를 이해해 줄 필요가 있다.

 

 

 

4. 우리는 조금씩 둔하거나, 또라이 같았다.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뚜렷해지기도 한다.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이런저런 감정들을 배우고 난 우리는 그제서야 좀 더 풍요로워진 감정의 배경지식에 기대어 이전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 때 나는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하고. 그리고 그렇게 이름 붙인 감정은 오랫동안 나의 속에 남아있게 되고, 아직 종결되지 않은 어떤 감정들은 겉잡을 수 없이 커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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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타쿠에게는 그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영화의 첫 장면이자 마지막 장면, 도쿄의 그 전철역에서.


“역시 난 그녀를 늘 좋아했었다고 / 그렇게 느낀 순간이었다”.

 

좀 더 성숙한 사랑이 가능해진 타쿠와 리카코의 이후의 일들이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리는 역량껏 상상해보면 된다.

 


[장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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