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하는 사랑의 면면

영화 <결혼 이야기>를 보고
글 입력 2020.02.2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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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각해보면 “사랑한다”는 말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참 모호한 표현이라는 결론에 닿게 된다.


그런 귀결이라면 모호함의 이유에 대해 잠시 얘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미세한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뛰는 듯한 기분이 된다. 참고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경험을 하는 건 덤이다. 또, 어떤 때에는 무척이나 고리타분하게 들려서 루즈하기 짝이 없기도 하다. 무미건조하고 딱딱해서 가끔은 아플 때가 있다. 그 말이 가지는 농밀하면서도 응축된 애정들은 오래도록 그 온기를 유지하기도 하고, 단숨에 차갑게 굳어버리기도 한다. 사랑의 그러한 성질 변화는 절대 선형적으로 이뤄진다고 단정할 수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랑의 온도는 속마음의 미묘한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이라, 우리는 그 녹녹함을 지키기 위해 감각을 섬세히 곤두세울 필요가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양적으로도 그 크기를 변별할 수 없게 만드는 교묘한 말이기도 하다. (이 역시 미세한 차이가 있겠지만) 당신에 대한,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의 크기를 끝내 표현하려고 할 때 우리는 사랑을 말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 말은 꽤나 달큼한 편이어서 그에 대한 의심 없이 우리는 순식간에 한껏 품을 열게 되는데, 때로는 그 모호함이 서로의 옷깃을 황급히 여미게 하기도 한다. 그게 너무 커서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남아있는 게 거의 없어서 측정할 수 없는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일은 이렇게도 시시콜콜하면서도 중대한 시비들을 견뎌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랑의 양면적인 물성은 아무래도 그 복잡성에 기인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 물성의 기반은 이성적으로는 쉬이 설명될 수 없는 감정들의 공존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단편적이고 명료한 감정이 아니고, 동시에 함께 하기 힘든 마음들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끗 차이로 끝을 맞이하기도 하고, 그 색을 더욱 짙게 하기도 한다. 사랑의 그런 모순에 대한 영화가 바로 노아 바움백의 영화 <결혼 이야기>다.




2.


 

영화의 제목은 <결혼 이야기>(Marriage Story)지만, 사실상 “이혼 이야기”라 여기는 것이 직관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로 등장하는 플래시백을 제외하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그들의 이혼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사소하고도 큰 갈등들을 초연하게 담아낸다. 그렇기에 영화를 차지하는 물리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혼 이야기"라는 제목이 일견 타당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혼 역시 결혼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영화 제목의 선정이 전체적인 주제에 부합하는 선택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혼을 마냥 파국의 결과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정리해가는 일이라 여길 수 있다면, "결혼 이야기"라는 제목이 훨씬 따뜻한 시선에서 주인공들을 지켜보는 것만 같은 기분을 들게 하기도 한다.


각자의 이해 속에 와해되는 모습을 담은 영화들은 대개 각각의 캐릭터에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배경을 설정하는 길을 택하곤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유독 찰리 역의 아담 드라이버에게 마음이 가게 된다.


물론 이혼의 귀책사유에 있어서는 니콜이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녀는 찰리의 극단 운영을 위해 뉴욕에서 생활의 둥지를 틀었고, 찰리의 원활한 작품 활동을 위해 많은 것들을 희생했다. 찰리는 그녀가 개진하는 의견들을 무시해왔고, 어떤 책임들을 피해 다녔고, 심지어는 극단 사람과의 외도를 이루기도 했다. 그럼에도 찰리의 모습에 눈이 가는 건, 이혼절차를 밟으며 그가 마주하게 되는 아주 많은 곤란들 때문일 것이다.


극 중에서 찰리는 이혼을 통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송을 위해 변호사를 고용하는 일부터 극단 운영과 이혼 소송을 위해 뉴욕과 LA를 오가는 일까지 어느 하나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이 없다. 아들 헨리와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그마저도 허무하게 흘려보내는 모습들은 하물며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 모습들이 찰리가 과거 여러 실수들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더욱 측은히 보이게 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혼의 과정이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녀와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찰리는 니콜이 언제나 결혼생활에 만족한다고 확신하며 안심했을 것이고, 그녀를 둘러싼 일상적인 불편들을 찰리는 오래도록, 어쩌면 영영 몰랐을 것이다.

 



3.


 

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폐쇄성을 엿볼 수도 있다. 사랑은 제삼자의 개입이 허용되지 않는, 오직 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랑의 그러한 면모는 여러 장면에서 새어 나오지만, 니콜과 찰리 양측이 법정에서 대립하는 장면에서 유독 선연히 드러나곤 한다. 양측의 변호사들은 서로에 대한 법적인 우위를 선취하기 위해 무척이나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들까지도 꼬투리를 잡아 늘어진다. 그 이야기들을 과장하고 부풀려 서로에게 흠집을 내려는 변호사들의 언쟁 속에서 니콜과 찰리는 더더욱 작아지고 끝내 고개를 숙이고야 만다. 그 언쟁은 결국 찰리에게 전문 감정인을 배정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찰리의 집에서 만난 둘은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을 꺼내며 다투게 된다. 서로에 대해 내밀한 것들을 공유한, 가장 친애하는 동반자가 단숨에 원수로 돌아서는 서늘한 순간이다. 그 격렬한 싸움과 마침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 그 씬은 두 배우가 그간 쌓아왔던 연기의 공력을 전부 쏟아부었다고 느낄 정도다. 한 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엄청나서 언젠가 두 배우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매번 언급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전문 감정인의 가정 방문 씬 역시 사랑에 대한 타인의 관여가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뤄지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법원에서 배정한 전문 감정인은 찰리가 헨리와 보내는 시간 속에서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지 평가하기 위해 찰리의 집에 찾아온다. 역시나 찰리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헨리는 잠깐이라도 그의 말을 따라주지 않고, 어색한 공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꺼낸 장난들은 피를 흘리게 한다. 그렇게 도망가다시피 집을 나선 전문 감정인은 찰리와 헨리가 그간의 시간 속에서 형성한 혹은 형성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전부 알 수 있었을까. 그 미세하고 촘촘한 시간들에 침투하여 그를 바라보는 경험은 분명 한정된 이들에게서만 가능할 것이다.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함께 했던, 그 유대 속의 존재들만의 소유일 것이다.

 



4.



영화의 전체적인 얼개와는 별개로, 나는 영화 중간중간 스며있는 유머의 요소들 역시 자연스럽게 그려져 더욱 마음을 뺏긴 것 같다. 니콜의 언니와 그의 어머니가 찰리에게 서류를 넘겨주기 전에 보이는 횡설수설한 움직임이라든지, 찰리와 버트가 열세에 몰릴 때 버트의 느긋함으로 인해 생기는 불협화음이라든지, 찰리가 피를 흘리며 주방에 누워있던 중 헨리가 나오자마자 피곤하다며 반대로 돌아눕는 모습 같은 것들.


이런 유머러스한 요소들은 작위적인 방식으로 연출되어 웃음을 유발한다기보다는, 통제된 상황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하나의 에피소드로 꾸며짐으로써 적지 않은 여운을 남긴다. 관객으로서 충분히 공감될 만한 행동들을 취하면서 웃기면서도 슬픈 마음을 남기게 된다. 관객으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한다.

 



5.


 

그들은 마침내 길고 지루한 싸움을 지나 이혼을 맞이하게 된다. 둘이 원하던 평화적이고 조용한 방법들은 결국 사수해내지 못했지만, 서로를 아끼는 마음들은 남아있다. 찰리가 헨리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더 뺏었다며 승리했다는 노라의 말에 환멸을 느끼는 니콜.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했던, 서로에 대한 장점을 적은 종이를 다시 읽으며 슬픔에 잠기는 일. 헨리를 데려가는 찰리의 풀린 신발끈을 니콜이 묶어주고, 잘 가라며 인사하는 일.


끝내 남게 된, 서로를 위하는 마음들이 새로운 맥박을 가진 사랑으로 피어난 게 아닐까. 사랑이라는 이름 뒷면에 숨겨진 시기, 질투, 그로 인한 다툼들을 인정하고, 그를 초월한 사랑의 새로운 박동으로 말이다. 사랑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박동을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호흡으로 자신만의 꾸준한 심박으로 움터 그 자신의 생명을 근근이 이어나가는지도 모르겠다.

 


[박범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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