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는 짐작할 수도 없는 먼 과거부터 그러했으며, 100세 시대가 된 지금에도 이어져 온다. 마치 인간의 본능인 것처럼, 마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회피하게 되었다. 그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 꺼려졌기에 탄생한 비유적 표현들도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면서 죽음을 논하는 것은 피할 수 있지만, 그 끝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피할 수는 없다. 산다는 것은 결국 죽어간다는 것, 살아온 시간이 축적되는 것은 죽음과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을 때 죽음을 논해야 한다. 이 논의는 마냥 두려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삶에 대한 논의이다.
누구나 시한부 인생임을 깨닫고 죽음을 통해 어떻게 남은 생을 더 잘 쓰며 살아갈지 생각해야 하기에, 뉴필로소퍼 9호는 ‘삶을 죽음에게 묻다’라는 제목으로 죽음을 적극적으로 논한다.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을지 너무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평화롭게 살 수 없다."
- 세네카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에 대해 논하려면 끝도 없이 깊어지고, 온갖 어려운 철학자의 이름이 거론된다. 관련된 책을 읽어보자니 너무 어렵기만 해 보인다. 이런 무거운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뉴필로소퍼 9호는 죽음 철학의 입문서 같은 잡지이다.
너무 깊게 파고든다기보다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담긴 글을 싣고 있으며, 법의학자와 사진작가와의 인터뷰 등 여러 각도에서 죽음에 대해 접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음을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함을 전제로 시작하는 뉴필로소퍼의 글들은 특이한 장례문화와 유명한 이들의 묘비명, 유언과 같은 소소한 재미를 주는 챕터를 포함한다. 짧지만 너무 가볍지 않은, 그렇다고 과하게 무겁지 않은 것들로 가득 채워진 잡지이다.
세부적으로는 마치 불멸의 존재인 것처럼 나아가는 우리를 잠시 멈춰 세우는 문장들로 가득하다. 각 글의 저자들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 죽음과 삶의 경계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지, 과연 영생이 좋은 것인지.
하지만 이런 질문들을 대면하며 우울해하고, 그 너머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삶을 죽음에게 묻다’라는 제목처럼, 결국 지금 살아가는 삶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잡지에 실린 다양한 죽음에 대한 글과 질문들을 거쳐 나가다 보면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바뀔 것이라 믿는다.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잘 쓰기 위한 시간제한임을 말이다.
게다가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죽음은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오지 않고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겁낼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살아있는 생의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운 이들, 죽음을 두려워해 본 이들에게 뉴필로소퍼 9호는 함께 손을 잡고 삶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필독서라 자신한다. 혹은 죽음이 궁금한 이들에게는 여러 저자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질문을 던지는 토론의 장이 될 것이다.
"죽음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에."
- <아우랑제브> 4막 1장
1676년, 존 드라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