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손담비의 얼굴에 향미의 서사가 담길 무렵 :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TV]

글 입력 2019.12.3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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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2019년의 마지막 주, 그리고 2010년대를 하루 남겨둔 날, 올 한 해 만난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2019년이 가기 전에 이 캐릭터에 관한 글을 꼭 남기자고. 카테고리는 [2019, 올해의 캐릭터]쯤 되려나? 이 캐릭터를 필자의 ‘인생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을런진 모르겠다. 하지만 오래 기억해두고 싶은 캐릭터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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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오프닝과 엔딩엔 이 캐릭터가 있었다. 경제적 고난과 사회의 편견, 혐오 속에서도 “나를 믿던” 우리의 주인공 동백(공효진), 그 옆에 서서 우직하게 동백을 응원하던 ‘촌므파탈’ 용식(강하늘)도 빼놓을 수 없는 올해의 캐릭터지만, 임상춘 작가는 이 캐릭터로 드라마의 포문을 열고 이 캐릭터에 대한 기억을 엔딩에 수놓는다. 바로 배우 손담비가 연기하는 최향미 얘기다.


사실 향미는 작품의 수수께끼 중 하나였다. “로맨스 4, 휴먼 4, 스릴러 2 전술”로 소개된 이 드라마에서, 초반의 향미는 로맨스에 비중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휴먼이라기엔 모호하고 스릴러 쪽인가 하고 갸웃거릴 만한 행보를 보였다. 첫 등장부터 규태의 시바스리갈을 몰래 훔쳐 먹고 손님의 라이터를 냅다 주머니에 넣었다. 근데 또 “애는 착햐”다는 소릴 듣는다. 언뜻 눈치 없이 마이웨이로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타인을 파악하는 데엔 누구보다 바삭하다. 규태가 “존경”에 환장한다는 걸 눈치챈 것도 향미. 종렬이 필구의 친부라는 걸 기민하게 캐치한 것도 향미. 그 정보를 이용해 그들의 돈을 뜯어내려던 것도 향미. 향미였다.


향미는 나날이 판을 벌여 나갔다. “착한 남자들 눈엔 안 보인”다는 향미는 규태와 종렬의 비밀을 쥐고, 동백, 용식, 필구, 종렬, 제시카, 규태, 자영이 엮인 판을 뒤흔들었다. '정상가족'을 이루고 있던 자영-규태, 제시카-종렬 부부가 협박의 주요 타깃이 되었다. 사진을 찍어 증거를 만들었고, 돈을 내놓지 않으면 비밀을 폭로하겠다 협박했다. 이같은 향미의 움직임은 시청자의 시선에도 균열을 내었다. 평생을 “왕따”처럼 살아온 동백의 삶을 응원하는 게 이 드라마가 깔고 있는 기본 정서이자 태도인데, 향미는 당최 어떻게 봐야 할지 오리무중이었던 거다. 향미는 동백의 행복을 바라는 듯 보이면서도, 돈을 위해서라면 동백과 주변의 관계를 제멋대로 이용하려 들었다. 시청자가 정을 붙일라 하면 갸웃거릴 만한 모습으로 빗나갔다. 용식에게 “어려운” 사람이 동백이었다면, 시청자에게 가장 어려운 인물은 아마 향미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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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남을 읽는 데엔 이만한 도사가 없지만 정작 향미는 읽히지 않았다. 염색한 지 한참 된 긴 머리나 다 벗겨진 네일, 동백이가 준 돈도 다 까먹어 가게에서 눈을 붙이는 처지. 그리고 자신을 늘 “열외” 취급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꾸 비뚤어지고 싶다”는 향미는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무슨 일을 해왔는지, 이상향처럼 말하는 코펜하겐엔 어떤 곡절이 있는지 모든 건 비밀에 부쳐졌다. 방영 중반까지, 배우 손담비의 큰 이목구비는 맹하고 오묘한 표정을 만들어냈고 어딘가 서늘하고 일관된 하이톤의 어조는 어디로 튈지 몰라 위험하게 들렸다. 시청자가 추측한 연쇄살인범 ‘까불이’의 용의 선상과 사건의 피해자인 ‘게르마늄 팔찌를 찬 여자’ 후보 명단에 향미 이름이 같이 올랐던 건 그래서였다.


그러던 향미의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작품이 딱 절반의 그림을 완성했을 때였다. 동백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며 드라마의 세계를 안정적으로 닦아 놓은 작가는 그때부터 향미의 얼굴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다분히 의도적인 전환이었다. 어쩌면 시청자들에게도 "열외"였을 향미의 얼굴에 "열외"로서의 곡절을 담으면서, 향미는 단순한 조연 혹은 까불이 피해자로 남지 않았다. 향미의 개인사가 풀리는 건 통합 10화 엔딩부터. 10화에선 향미의 원래 이름과 함께 까불이 사건 피해자가 향미였다는 걸 밝히고, 11화에선 향미의 과거사와 까멜리아에서 일하게 된 사연을 풀어냈다. 12화는 향미가 죽기 전 24시간을 따라가며, 향미의 마지막 하루로 전체 회차를 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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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향미의 얼굴에서 미스터리를 걷어내자 보이는 건 ‘약자의 얼굴’이었다. <동백꽃 필 무렵>이 집중해온 동백의 서사와 마찬가지로, 향미도 경제적 고난, 사회의 편견과 혐오 아래에서 살아왔음이 밝혀졌다. 향미는 “물망초(‘맥양집’)네 딸”로 자라 동급생들과 학부모들에게 공공연히 손가락질받았다. 절도가 일어나면 고아인 동백과 함께 가장 먼저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이후엔 동생과 아픈 할머니를 경제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소녀가장이 되었다. 엄마의 직업을 그대로 따르게 된 이 하층여성 앞에 사회의 편견과 배제는 더욱 견고해졌다. 같이 밥을 먹지 않는 사람, 제 몸을 기물 취급하는 사람, 향미의 인생을 한심하게 여기는 사람들. 그들에게 향미는 그저 밑바닥 진창의 인생이었고 아무도 향미의 처지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향미의 말대로 "열외"의 인생, "열외"의 삶이었다.

 

생존 방식에 있어 향미의 삶은 동백만큼이나 복잡성을 띠고 있었다. 배제가 작동하는 ‘정상’이란 이름의 금줄 바깥, 그곳에서 동백은 “그냥 열심히 사는 것밖에 없다”며 악착같이 두루치기를 팔아 하루하루를 견인해나갔다. 반면 향미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것들을 통해 생존했다. ‘직업 여성’이라는 딱지는 동백에겐 '오해'였지만, 향미에겐 '현실'이었다. 더군다나 향미는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면, 자신과 동백의 약자성까지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상’ 안에 있는 사람들(규태, 종렬, 제시카 등)에게 접근해 저와 규태가 바람피웠다는 증거를 만들었고, 동백과 필구의 존재를 두고 협박했다. 주류와 비주류, 상층과 하층이라는 계급구조가 그것으로부터 가장 멀리 밀려난 향미의 돈줄이 된 셈이다. 향미의 방식은 하층 여성에게 곤궁과 배제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확인시킴과 동시에, 그런 와중에도 떳떳하면서 치열했던 동백의 생존 방식이 실은 쉽지 않았던 것임을 반사시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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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잡한 서사를 담아내는 손담비의 얼굴은 단 2회 만에 향미의 처지를 납득하게 한다. 향미가 주류에 던진 미끼는 매서운 대응으로 돌아왔고, 그렇게까지 해서 위로 밀어 올리려던 동생은 향미를 저버렸다. 그때 향미 얼굴에 스치는 허망함은 순식간에 모든 미스터리를 걷어낸다. “다 알면서도 삥뜯겨줬”다며 눈물짓는 장면은, 지금껏 제 이익에 따라 움직이던 이 인물의 이타적인 방향성이 단번에 노출되는 순간이다. 헌신해 마지 않은 동생에게도 지워진 향미. ‘평범한 삶’ ‘사랑받는 삶’을 살고 싶어 하던 향미의 바람이 모든 행동의 면죄부가 되어주진 않지만, 적어도 우린 발견할 수 있다. 하층계급 여성의 고단한 삶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 그리고 숨 막히는 외로움, 미스터리가 가리고 있던 얼굴 아래엔 이것들이 요동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단연 압권은 그 긴 하루의 끝에서, 동백과 마주하는 장면이다. 제 삶도 힘든데 남의 1인분 식사를 챙기려는 동백 앞에서 향미는 끝내 눈물을 보인다. 감정을 읽을 수 없던 커다란 눈, 상처 입고 굳어가던 얼굴은 그제야 가장 솔직한 슬픔을 담는다. 걱정 어린 눈으로 향미를 바라보는 공효진의 진실된 연기를 받아내며, 손담비의 향미는 그렇게 물망초의 꽃말을 말하며 모든 패를 다 까버린다. 그 얼굴은 어린 날의 향미도 숨겼던 향미란 캐릭터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드러낸다. 똑같이 하층, 주류 바깥에서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오롯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동백이 앞에서. 그러나 자신과는 다른 선택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보고 있으면 “쪽팔리고” “짜증 나는” 그 동백이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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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했던 손담비의 얼굴에 서사가 담기기 시작하면, 우린 우리가 쉽게 단정했던, 또 어쩌면 동백이 대신 게르마늄 팔찌를 차길 바랐던 향미의 얼굴을 구체화시킬 수 있게 된다. 미스터리의 주요 요소였던 게르마늄 팔찌는 두 여성을 ‘기억’이란 말로 잇는 휴머니즘의 중추로 변모한다. “나를 잊지 말아요.” 향미는 말했고, 동백은 향미가 ”너무 함부로, 너무 외롭게 떠났다”며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 동백은 향미가 끝까지 품고 있었던 본명 ‘최고운’을 딸의 이름으로 지으며, 마지막까지 향미를 기억한다.


끝까지 <동백꽃 필 무렵>의 향미는 단순 '피해자'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캐릭터화되고 대우 받았다. 작가는 마지막화까지 향미의 이름을 놓지 않았다. 향미가 까불이 사건의 피해자라는 걸 공공연히 밝히고 난 뒤에도 향미라는 개인을 증축해내려는 애씀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첫 배달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새 향미'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하던 모습, 다음 생엔 동백의 딸로 태어나고 싶다던 모습, 스쿠터 타는 동백 뒤를 쫓아와 "언니 자빠질까 봐" 같이 달렸다던 모습. '향미의 죽음'이라는 사건 뒤에도 그의 삶을 기억하고 추모할 만한 장면들이 있었다. 맞다. 마지막 화까지 다 보고 나니 비로소 알겠다. <동백꽃 필 무렵>은 이 "열외"의 삶을 드라마의 시작부터 끝까지 놓지 않고 있더라. 알고 보면 이 드라마는 향미를 "열외" 취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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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조차도 무의식중에 향미를 "열외"라고 생각했어서일까? 그때 느낀 미안함이 오랜 여운과 먹먹함으로 이어졌던 걸까? 한 해 동안 굵직한 사연을 가진 많은 캐릭터를 만났지만, 올해 끝 무렵 떠오르는 건 “너 하나는 그냥 나 좀 기억해주라. 그래야 나도 세상에 살다 간 것 같지”라고 말하던 향미의 얼굴이다. 수수께끼 같은 조연, 드라마 안팎에서 “열외”였던 존재. 결국은 오래 기억된 한 명의 인간. 향미란 캐릭터를 가만히 생각하고 있자면, 뒤이어 다른 이름들이 함께 떠오른다. 차별과 혐오, 배제와 무관심으로 스러져갔던 많은 이름들. 우리 사회가 "열외"로 제쳐둔 이름들, 또 이야기 속에서 쉽게 지워지고 잊혀진 이름들. 향미의 얼굴에 서사가 담길 무렵은, 바로 그 무수한 이름들을 기억해야 할 무렵이 되었다.


아울러 캐릭터와 시청자 간의 거리를 능히 늘이고 좁히던 배우 손담비의 연기도 필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동백꽃 필 무렵>의 방영 전, 손담비는 이 작품을 통해 “담비 아니면 안 된다” “담비만 할 수 있는 캐릭터다” “잘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뿌듯할 것 같다고 밝혔다(앳스타일과의 인터뷰). 향미 캐릭터를 “담비만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유일무이하게 완성한 손담비. 최향미가 남긴 한 가지 무렵이 더 있다면, 앞으로 손담비의 얼굴에 수많은 서사가 담기길 기다리는 무렵이다.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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