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가 본 고흐, 고흐가 본 세상 - 고흐, 영원의 문에서

글 입력 2019.12.3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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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것을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가난과 외로움 속에 살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운명의 친구 폴 고갱을 만난다. 그 마저도 자신을 떠나자 깊은 슬픔에 빠지지만 신이 준 선물,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몰두한다.
 
불멸의 걸작이 탄생한 프랑스 아를에서부터 오베르 쉬르 우아즈까지.... 빈센트 반 고흐의 눈부신 마지막 나날을 담은 기록.

 

 

종종 제일 좋아하는 화가로 자신 있게 고흐를 꼽곤 했지만, 그에 대한 지식은 빈약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배우였다. 고흐와 고갱보다 고흐를 연기하는 윌렘 대포와 고갱을 연기하는 오스카 아이삭이 더 보고 싶었다.

 

제아무리 고흐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와 나는 가까워질 수 없다. 아무리 세상이 발전했다고 해도 그와 나의 시간의 간격은 결코 좁힐 수 없다. 나는 평생 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생을 마감했으니까, 나는 그가 생을 마감한 이후에도 한참 뒤에야 태어났으니까.

 

내가 고흐에 대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1890년 이후 그의 삶도 그의 그림도 모두 멈췄다. 나란 인간은 계속해서 달라지는데 고흐는 항상 제자리에 멈춰있다. 멈춘 사람이 움직이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건 흔적뿐이다. 나는 그 흔적을 붙잡고 겨우겨우 추측할 뿐이다. 많이 외로웠겠지, 많이 기뻤겠지, 많이 힘들었겠지, 라며.

 

내게 고흐의 죽음은 역사적 기록의 한 줄이었다. 그 죽음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도 슬픔 대신 익숙함이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살면서 처음으로 고흐가 죽었다는 게 슬펐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끝나 버린 그 생애가 처음으로 안타까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가셰 박사와 테오의 비통한 심정이 내 것이 된 기분이었다. 그건 내가 스크린에서 마주한 게 기존에 알고 있던 고흐도 아닌, 뛰어난 연기력의 윌렘 대포도 아닌 여린 친구 빈센트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인생은 극적이다. 가족과의 불화도, 테오와의 우애도, 고갱과의 인연도. 그 극적인 인생은 스스로 귀를 자른 일화로 정점을 찍는다. 영화도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기에 똑같이 그 흐름을 따라갔다.

 

세상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몹시 차가웠다. 안정적인 직장을 얻지 못하고 동생에게 신세 지며 그림에만 집착하는 그는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평판을 기대하기 힘든 모습이다. 거기에 스스로 귀를 자르기까지 하자 사람들은 그를 냉대하는 것을 넘어 혐오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내 눈에 비친 영화 속 빈센트 반 고흐는 위대한 화가도, 미치광이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다. 녹록지 않은 현실에 절망하고, 좋아하는 그림에 열광하고, 외로움에 괴로워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고흐의 얼굴을 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자화상 덕분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그림체로 표현된 얼굴일 뿐, 실물을 담은 사진이나 영상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윌렘 대포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난생처음으로 빈센트 반 고흐의 실물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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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핸드헬드(카메라를 손에 들고 촬영하는 방식)나 시점 쇼트(연기자의 시점으로 포착한 장면)로 고흐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많은 영화에서 수차례 시점 쇼트를 봐왔지만, 이 영화에서 그게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시점 쇼트 덕분에 나는 고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고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무서웠다. 지누 부인과 처음 마주했을 때, 귀를 자른 후 경찰과 마주했을 때의 시점 쇼트는 의도적으로 아래에서 올려 보는 듯한 각도로 이루어져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사실 고흐를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내가 아를의 시민이었어도 계속되는 고흐의 기행에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빈센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냉혹한지 알기에 그 마음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가장 인상적인 건 고갱이 떠나겠다고 말했을 때 고흐가 그를 붙잡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 역시 대부분 고흐의 시점 쇼트로 이루어졌다. 고갱의 얼굴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클로즈업되어 나타났다. 내가 마음이 동한 부분은 고갱이 고흐에게 등을 돌린 시점부터였다. 그때부터 카메라의 하단이 흐려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곧 고흐의 눈물을 나타낸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장면 이후에도 똑같은 기법이 자주 펼쳐졌다. 카메라 하단에 차오른 고흐의 눈물을 보며 여태 나는 고흐를 객체로만 봐왔지, 주체로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았다.

 

영화에는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세계적인 화가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니 당연할 것이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여겨 그 장면들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영화의 극 후반부 아를에서 온갖 고난을 겪은 그가 오베르에서 가셰 박사를 그리는 장면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보는 것을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고. 그가 본 세상은 혼란스럽고 차갑기만 한 게 아니라 아름답기도 했다. 바로 그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꿋꿋이 그림을 그렸던 이유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고흐를 객체가 아닌 주체로, 사람들의 눈이 아닌 고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붓질 하나하나에 담긴 필사적인 안간힘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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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영원의 문에서>를 보기 전, 성실하게 예습하는 학생처럼 <러빙 빈센트>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고흐가 죽고 나서 1년 뒤, 아르망 룰랭이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고흐의 편지를 전해주려 길을 떠나면서 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파헤친다는 내용이었다. 고흐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면 앞으로 예정된 영화 감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기대와 함께 프리뷰를 작성하면서 커진 고흐에 관한 관심을 충족하기 위함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실존 인물이고, 그의 죽음도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모든 게 자명한 현실의 진실을 파헤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관람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내가 모르는 부분이 계속해서 나왔다. 처음엔 그 부분들에 대해 ‘이 영화가 전기 영화는 아니니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영화에 등장한 모든 인물과 묘사되는 모든 사건이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산산이 조각났다.

 

나는 내가 고흐를 안다고 생각했다. 그의 유명한 그림, 그림만큼이나 유명한 일화들만 겨우 아는 주제에 그게 고흐의 전부라고 확신했다. 내 머릿속 고흐의 마지막은 밀밭에서 자신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마지막에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다. 물론 그 영화에 나오는 모든 게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모르는 고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여지 정도는 마련해야 했다.

 

이제 나는 그의 인생에 빈 페이지를 내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 페이지엔 아무도 모르는 그만의 이야기가 적혀 있을 것이다. 냉대하거나 혐오하거나 추앙하거나 동정했던 타인의 시선이 아닌 그의 시선에서 적혀졌을 그 이야기에 행복이 있을지, 불행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건 오직 반 고흐, 그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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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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