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국문학 골라읽기, 장강명 '산 자들' [도서]

글 입력 2019.12.3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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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세계문학을 더 좋아하다 보니 한국문학과는 약간 동떨어진 느낌이 있었다. 박완서와 이청준에서 멈춘 내 한국문학 탐독이 못내 아쉬웠고, 외국 지명과 번역문에 질리기도 했다. 새해 목표로 한국소설 많이 읽기나 도전할까 고민하며 서점에 갔더니 문학 코너에 내가 모르는 작가들이 한가득이었다. 김세희, 장류진, 박상영, 김초엽... 다 처음 보는 작가들이라 누굴 골라야 할지 망설여졌다. 다행히 눈에 익은 작가의 신작이 보여 반갑게 집어 들었다. 장강명의 연작 소설집 '산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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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먹고사는 문제의 고단함과 쓸쓸함을 지적이고 균형 잡힌 시선으로 포착하는 10편의 연작소설'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등을 예전에 읽었기 때문에 장강명이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 연작소설집은 취업, 구조조정, 자영업, 재건축 등 현재 이슈와 관련한 소설들을 다뤘다. 소설 같다고 하기엔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장강명의 소설이 (특히 사회 문제를 주제로 할 경우) 논픽션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사건이 전개되는 외부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 때문이다. 가령 소설 '대기발령'은 연아가 대기발령을 받게 된 이유, 절차, 주변 사람들의 반응 등을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꼼꼼하게 담는다. 감정이 절제된 치밀한 설명 덕분에 기사를 읽는 것처럼 몰입할 수 있다.

 

주인공은 고등학생('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부터 중장년층 ('공장 밖에서', '사람 사는 집')까지 연령대와 성별, 위치가 다양하다. 단편으로만 보았다면 짧게 보고 넘어갔을 주제가 한 책에 모이면서 깊이와 무게를 갖는다. 10명의 주인공이 '한국에서 먹고산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담담한 목소리를 들으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한층 더 투명하고, 낮은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산 자들>의 세계에는 용기가 없다. 용기는 사람이 먹고사는 데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쉬운 해결책인 '개인이 용기 있게 역경을 헤쳐나간다'는 현실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용기를 잃을 수밖에 없는 세상, 내가 잘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주인공들이 취하는 결말은 제각각이다. '공장 밖에서'나 '사람 사는 집'처럼 음울하고 절망적인 결말도 있지만 '음악의 가격'처럼 낙관으로 끝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물음표로 끝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게 옳은 일일까? 불합리를 느끼면서도 막상 맞설 권리가 있는지는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 동시에 이 세계는 피해와 가해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고, 연대 의식이 거의 보이지 않아 삭막하고 잔인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그저 아무것도 과장하지 않을 뿐이고, 그건 정확한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걸 알면서도.

 

*

 

<산 자들>에서 사람들은 바로 옆의 사람들과 경쟁한다. 죽고 죽이는 싸움은 수직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이뤄진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 그렇게 해서 얻는 건 명예도 권력도 아니고 돈이다.

 

이 책의 약점은 대안적 선택에 대한 서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경쟁하거나, 탈락하거나 뿐인 이 세계관에서 제3의 선택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선악은 없지만 기묘하게 이분법적인 이 세계에서 존엄을 유지하려는 몸짓은 무력하게만 보인다.


물론 현실은 각박하지만,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데는 돈 말고도 다정한 말과 연민 어린 공감이 필요하다. 소설의 미학은 더러운 연못에도 한 줄기 빛을 비춰주는 데 있다. 비록 그게 기만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장강명의 <산 자들>이 단순히 주변의 사회 문제를 단순화했다고 비판하기엔 어폐가 있다. 소설 한 편 한 편에 작가의 문제의식이 알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를 곧바로 손가락질 하는 대신 이 책은 우리 모두에게 물음표를 던진다. 이게 옳다고 생각해? 나는 바로 옆에 있어. 내가 겪는 일은 모두 당연한 것일까?

 

밤 열한 시에 도착하는 택배를 받을 때,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쉽게 노래를 들을 때, 깨끗하고 정돈된 거리를 원할 때, 우리는 (원치 않을 수도 있는) 권리를 행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은, 옳고 그름이나 피해와 가해의 범위를 넘어서 이뤄져야 한다. 중요한 건 당신이 무얼 원하느냐이다.


우리가 서로의 사정을 알고 난 다음에도 사회가 이 모습 그대로이길 바랄 수 있을까? 나는 두려움이 서로 적대할 이유가 아니라 서로 지켜줄 이유가 되었으면 좋겠다. <산 자들>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 내면의 선량함과 정의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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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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