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생긴 일] 말하는대로, R=VD, 그 모든 말의 의미

글 입력 2019.12.21 11:0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나는 이상할 정도로 대학교에 대한 환상이나 기대가 별로 없었다. 구체적으로 환상을 가져 봤자 점수에 맞춰 대학을 갈 수밖에 없으므로, 꿈꿀 시간에 성적이나 올리자고 결심했던 때문인지, 고등학교 때의 나는 내가 공부하는 기계가 되기만을 바랐다.


자기소개서를 쓰면서도, 플래너에 목표하는 대학교의 사진과 과 점퍼, 학교 로고 스티커를 붙여 놓으면서도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물론 ‘자소설’이라는 단어도 있듯 누구도 자기소개서 속 나와 실제 자아가 일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흔한 ‘캠퍼스 투어’ 한 번 가지 않고, 가려는 대학교의 축제도, 심지어는 정확한 위치조차도 잘 모른 채, 나는 성적표의 숫자로만 꿈을 꾸었다.


그런데도 대학교에 가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어느 학교에 가든 상관없이 혼자서 여행을 하고,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파견되는 것이었다. 모든 행복을 수능 이후로, 면접 이후로 미뤘던 나는 여행을 행복의 정점이라고 여겼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일본의 자매학교에 5일간 파견되었던 것과 수학여행을 다녀온 것이 해외여행의 전부였는데도, 그 기억이 매우 좋아서였는지 대학교에서 무엇을 할 지보다도 여행을 가는 것을 더 기대했다.



KakaoTalk_20191220_195952362_03.jpg

퀘벡 여행 중 크리스마스 상점에서

 


이런 여행에 대한 로망은 대학생들에게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다.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가는 것은 연애와 함께 대학 생활 중 꼭 해봐야 하는 것으로 꼽히며, 여행에 관한 TV 프로그램도 몇 년 새 훌쩍 늘었고,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 여행도 ‘내일로’ 등 대학생들만을 위한 혜택이 많다. 그래서 혼자서 첫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는 오히려 나의 꿈 때문이라기보다는, 주변에서 다들 여행을 가니까 방학마다 여행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들 교환학생을 가라고 하니까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11월의 어느 날, 룸메이트의 생일이라 룸메이트 남자친구의 차를 같이 타고 레스토랑으로 가던 중, 문득 내가 미국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리고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오랫동안 이런 순간을 위해 행복을 미뤄왔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영어로 대화하고 수업을 들으면서도, 심지어는 시카고로 여행을 가서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갑자기 떠올라서 좀 우습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한 후로, 내가 오랫동안 꿈꾸던 것들이 생각보다 많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하나씩 찾기 시작했다.



91C88QWL16L.jpg

 


우선은 이렇게 학교에 관한 에세이를 쓰는 것도 놀랍게도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다.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한 <윔피 키드(The Diary of a Wimpy Kid)>가 그 꿈의 출발점이었다. 이제나저제나 학교에서 인기 있는 학생이 되기를 바라는 ‘그레그 헤플리’라는 아이가 주인공으로, 미국의 가정이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은 소설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산 시리즈는 2010년에 출판된 5권이었는데, 현재는 14권까지 출판되었다. 어렸을 적에 이 시리즈를 무척 좋아해서 부모님께서 지나가는 말로 ‘너도 나중에 작가가 되어서 학교에 관한 글을 써보라’고 하셨던 것이 기억이 난다. 처음 에세이 주제를 정할 때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정말 학교를 주제로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KakaoTalk_20191220_195952362_04.jpg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성인이 되면 하고 싶었던 것 중 또 하나가 있다. 바로 고양이를 키우며 자취를 하는 것이었다. 이 꿈은 여기 와서 룸메이트의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반쯤은 이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마 혼자 자취를 하는 한, 한국에서 반려동물을 키우지는 못할 것 같다. 밥을 먹든 물을 마시든 오로지 사람에게만 의존해야 하는 고양이를 보면서,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책임질 수 있을 때 선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소소한 꿈도 있었다. 미국에 오기 전 외국인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몇 가지 샀는데, 그것들을 다 전해줄 수 있을 만큼 친구를 사귀는 것이었다. 교환학생 파견 직전까지도 교내 한국어 교육원에 한국어를 배우러 온 일본인 학생들과 한국어로 대화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정도로, 나는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에게 관심이 많다. 그래서 막연히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다기보다도 ‘한국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한국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극도로 소심한 성격 때문에 친구 한 명 못 사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한국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다. 선물을 전해주었을 때 반응도 좋아서 한국에서 골라 온 보람이 있다고 느꼈다.



KakaoTalk_20191220_200744588.jpg

미국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포스터

 


여느 광고처럼, ‘자막 없이 드라마/영화 보기’를 목표로 하기도 했다.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늘 자막 없는 드라마고 영화였기에, 말하기는 몰라도 영어 듣기 실력만큼은 많이 는 것 같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에서 먼저 개봉해서 너무 궁금했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보러 갔을 때, 자막이 없는 영화가 너무 낯설었고, 대사의 절반 이상을 알아듣지 못했다. 여전히 못 알아듣는 말이 많지만, 쉬운 대사를 조금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고, 팝송의 가사가 좀 더 선명하게 들리게 되었다.


물론 기대했던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부의 영향으로 힘든 일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나의 높은 기준이었다. 그동안 써온 ‘Love Myself’라는 주제의 글들이 무색할 정도로, 여기에 와서도 나는 나를 다른 사람들과 계속해서 비교하며 괴로워했다.


왜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지, 더 많은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지 고민했고, 가게에서 만나는 직원들의 ‘How are you?’라는 간단한 질문에도 자연스럽게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How are you? 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자주 쓰이는 표현이었다). 심지어는 한국에서 진로를 향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기까지 하며, 여기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가 도태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간의 생활을 돌아보니 내가 스스로 꿈꾸고 바랬던 것들이 꽤 많이 이루어져 있었다. 대학교에 다니는 내내 내가 목표 없이 방황하고,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사실 무의식적으로 꿈꿔왔던 것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나와 비슷한 시기에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R=VD(Reality = Vivid Dream)’를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지성 작가의 <꿈꾸는 다락방>이라는 책에 나온 문구로, 생생하게 꿈꾸는 것은 곧 현실이 된다는 주문과도 같은 말이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수험생의 플래너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말이다.


유재석과 이적의 ‘말하는 대로’라는 노래에도,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도 나오는 말이다. 간절히 바라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 말은 너무나도 간단해서 설득력이 떨어질 정도다. 나도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저 말의 뜻은 노력 없이도 말하고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선택과 무의식까지도 그 목표에 향해 있을 정도로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 같다.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낸 한 학기는 한 해 동안, 3년간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그리고 대학 생활을 향해 달려온 10대의 내가 잠시 잊고 있었지만,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내고, 또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가는 시간이었다.


Trivia. 그래서 건강은 좀 좋아졌나요?


미국으로 오기 직전인 8월 말에 올린, 통학의 고충을 털어놓은 첫 에세이에서, 자취를 통해 건강이 나아질지 기대해보겠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주변에서 교환학생으로 파견을 갔다 온 사람들의 건강이 나아졌다는 간증(?)도 몇 번 들었기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통제 변인이 같지 않아 이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KakaoTalk_20191220_195952362_01.jpg

'해리포터'를 테마로 꾸민 도서관

 


한국에 있을 때 나름대로 왕복 3시간씩 서서 지하철로 통학을 했고, 주에 3회, 2시간씩 운동까지 했는데도, 이곳에서 일주일에 딱 한 번 6~7시간 연속으로 서서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다리에 무리가 갔다. 첫 한 달은 아르바이트를 한 다음 날 제대로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을 정도로 무릎이 아팠다. 한국과는 달리 매일 해내야 하는 과제까지 있어, 고등학교 때 이후로 가장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지 않고 딴짓도 많이 했다.)를 해야 했던 것도 어깨와 무릎 통증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와 학업 모두 내가 교환학생으로 파견되기 전 가장 큰 목표로 삼았던 것이기에 후회는 없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고, 미세먼지를 덜 마신 것을 위안으로 삼아본다.

 




[김채윤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07839
 
 
 
 

등록번호 : 경기, 아52475   |   E-Mail : artinsight@naver.com
발행인/기사배열책임자 : 박형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형주
Copyright ⓒ 2013-2020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