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숲으로 모인 여자들 [공연예술]

어디로 향할지 모르던 우린 숲으로 모여 서로를 보았고
글 입력 2019.12.0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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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자신의 안에서 들려오는 내밀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힘들다. 여성으로 태어난 이상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수동적, 순종적, 희생적 ‘여성성’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요구들은 우리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다. 여성이 온전한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소개하고자 한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뮤직 토크쇼 <숲으로 모인 여자들>을. <숲으로 모인 여자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학과에서 여성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느껴 시작한 프로젝트이다. 프로젝트의 취지에 동의한 수많은 여성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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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난 11월 26일, 한국종합예술학교의 한 건물 지하에 숲이 만들어졌다. 여성들은 소음으로 가득한 도시를 헤매다 숲으로 모였다. 숲이라는 공간은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해칠 수 없고,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무해한 공간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차가운 세상인 ‘도시’에 대응하는 공간이다.

 

작년 한국양성평등교육 진흥원에서 예능, 오락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한 결과 국내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주 진행자 가운데 여성은 16%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시사토크 방송을 조사한 결과, 34개 중 여성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단 4개에 불과하다. 프로그램의 주 진행자가 대부분 남성이다보니 여성 출연진은 타자화되거나 대상화되어 쉽게 소비되곤 한다.

 

레베카 솔닛은 이에 대해 "여성 혐오로 개그 하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찔러놓고 찔린 사람이 불평하면 유머감각이 없다고 놀린다. 잔인한 말이 웃긴 말이라고 고집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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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불편한' 프로그램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출연진이 모두 여성 아티스트인 프로그램의 등장은 언제나 반갑다. <숲으로 모인 여자들>의 출연진은 진행 성진영, 뮤지션 도마, 작가 이슬아, 뮤지션 서자영, 이렇게 네 명의 여성 아티스트이다. 이들 모두 기존의 경직된 여성 아티스트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이들이 아닌, 자신만의 색깔로 주체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아티스트이기에 더욱더 의미가 있다.

 

약자에 위치해 있는 사람은 항상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2등 시민으로써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이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연장에 입장하자 마자 이곳의 이름을 ‘숲’이라고 지은 이유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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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갑한 도시를 벗어나 자연으로 들어오면 숨통이 트인다고들 말한다. 나무색의 커튼과 풀벌레 소리, 낮게 들려오는 기타 소리와,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눈빛들이- 이곳에서는 긴장을 풀어도 된다고, 크게 숨을 쉬어도 괜찮다고 말해오는 듯했다.

 

*

 

<숲으로 모인 여자들>은 공연과 함께 미리 받은 사연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1부는 뮤지션 도마와 함께 혼자만의 공간을 ‘섬’이라고 지칭하며 고독과 개인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섬은 각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고립된 공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 내가 오롯이 나일 수 있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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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는 섬에 들어앉아서 단단한 하나의 땅으로 자리 잡아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 섬에서의 시간은 어쩌면 외로울지 모르지만 결국 그 시간들은 사면에서 들어오는 파도를 맞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일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저서 <정신의 삶-사유>에서 고독과 고립은 구분되는 개념이라고 설명하며 고독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고독과 고립은 모두 ‘홀로 있음’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뜻을 같이하지만, 고립과 달리 고독은 ‘내가 나 자신과 교제하는 실존적인 상태’이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 묵살되었던 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고독의 상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의 모습이 아닌,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알기 위해 섬에서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우리는 고독을 통해 사유하고, 사유를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도마는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각자의 섬으로써 부유하는 우리가 고독을 통해 자신을 마주하고, 그렇게 마주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면 우리는 숲을 이룰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

 

2부에서는 이슬아 작가와 함께 각자의 섬을 넘어서 숲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는 여성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꼈던 좌절의 경험을 공유했다. 좌절은 어디에나 있었다. 명절 날 본가에서, 대중교통에서, 밤거리에서, 그리고 매 순간. 좌절은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여성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떠한 설명이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사이가 가장 편한 사이라고 느낀다. 숲에 모인 여성들은 모두 각자의 좌절에 어떠한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좌절에 설명을 덧붙이 지도 않았다. 그저 각자의 좌절을 들여다보고 위로할 뿐이었다.

 

이슬아 작가는 2부를 시작하기 전 자신의 글을 낭독했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나쁜 일이 자신을 기다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쁜 일이 나쁜 일로 끝나지 않도록 애썼다. 우리가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고 어떤 일에서든 고마운 점을 찾아내는 이들임을 기억했다. 사랑은 불행을 막진 못하지만 회복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중략) 여전히 무서운 게 많아도 나는 점점 혼자 잘 자는 사람이 되는 느낌이다. 그것은 하마 덕분이라는 확신이 든다. 미안하지 않으면 사과하지 않고, 웃기지 않으면 웃지 않는다, 웃길 때 웃음을 참지 않듯이, 가슴이 아플 때 충분히 운다.

 

 

이슬아 작가의 글은 우리가 이렇게 모인 이유가 결국 사랑을 통해 아픔을 치유하고 살아갈 용기를 얻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사랑은 이성애적 사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존재를 귀중히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다. 숲에 모인 여성들은 자기 자신과 다른 여성들이 같은 것을 느끼고 살아감을, 그래서 서로가 귀중함을 알고 이곳으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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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좌절의 경험에서 더 나아가 올해에 따뜻함을 느낀 순간이 있었는지, 그리고 2020년의 목표는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성들은 타자화된 욕망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미래의 자신을 그려나갔다. 섬에서 시작해 숲으로 모인 우리들은 앞으로의 미래를 그릴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었다.

 

숲에서는 여성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도 자유롭게 나눌 수 있었다. 남성 예능인의 가슴은 개그 소재로 사용이 되고, 여성 아이돌의 가슴은 문제적인 것으로 다루어진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규제되고 여성들로 하여금 타자화된 시선을 내면화하게 된다.

 

하지만 숲에서는 생리, 오르가즘, 탈브라 등 여성의 신체와 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여태껏 금기시 되었던 여성의 신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며 시원함을 느꼈다. 인간의 신체와 섹슈얼리티는 개인의 실존과 관계 양상의 근원을 형성한다. 여성의 신체와 성을 부끄러운 것 혹은 문제적인 것으로 여기는 문화가 사라질 수록 여성들은 자신의 실존에 자유를 부여할 수 있으며 타인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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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는 토크 없이 싱어송라이터 서자영의 공연으로만 진행이 되었다. 서자영은 평범한 듯 솔직한 일상적인 가사를 깊은 목소리로 풀어내어 숲에 모인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했다. 그녀의 노래가 지닌 따뜻한 온기는 숲에서의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

 

프로그램의 제작자들은 "여성의 이야기만 다루어도 괜찮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여성의 이야기만 다루어도 안 될 이유는 없다. 아니 오히려 필요하다.

 

미국의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인 류수 배아도 긴즈버그는 "대법권에 이상적인 여성 대법관 수는 9명 전원이다."라고 말하며 "전원이 남성일 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어느 분야에서든 전원이 여성인 경우에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숲으로 모인 여자들>같은 프로그램이 더욱더 많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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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모인 여자들>은 여성의 연대를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공간이다. 좌절을 느끼는 각 개인의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 연대하다면 우리 다음 세대의 여성들이 사는 세상에는 소음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누구도 죽지 않는 공간이 점점 많아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언어를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무해하고 따스했던 숲에서의 경험을 계속해서 간직한다면 다시 섬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숲에서 받은 힘으로 조금 더 용기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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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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