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사는 사람들] 아트 딜러와 아티스트, 평생 친구가 되기까지

#13 피에르 마티스와 알베르토 자코메티
글 입력 2019.12.03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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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화가의 아들


 

‘야수파’이자 20세기 프랑스 모던 아트의 거장으로 잘 알려진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자신의 이름만으로 너무 빛나기 때문에 미술사에서 그의 가족이 거론되는 일이 많지 않다. 하지만 갤러리스트, 아트 딜러로서 앙리 마티스라는 이름에 가려지기 아까운 인물이 있다. 바로 그의 둘째 아들 피에르 마티스(Pierre Matisse, 1900-1989)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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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Matisse by Balthus (Balthasar Klossowski), 1938. ⓒMET

 

 

1900년 유명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난 피에르 마티스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권유로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또 그림을 배워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관심사는 창작 그 자체보다는 다른 예술가들과, 또 그들의 작품과의 교감으로 향했다. 결국 그는 자신만의 갤러리를 가진 아트 딜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1924년 겨울 프랑스를 떠나 뉴욕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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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o Giacometti by Jacques-André Boiffard.

 

 

한편 1901년, 스위스 남부의 보르고노보라는 지역에서도 화가의 아들이 태어났다. 스위스에서 꽤 유명했던 후기 인상파 화가였던 조반니 자코메티(Giovanni Giacometti)의 아들인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였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적 재능을 드러냈다. 부유한 화가였던 조반니 자코메티는 그런 아들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그에게 선생님을 추천해주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미술 교육을 후원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1922년 아버지의 권유로 프랑스 파리에 와,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예술가로 성장했다.

  

 

 

첫 만남


  

피에르 마티스는 뉴욕에 온 초기에 발렌타인 두덴싱(Valentine Dudensing)의 갤러리에서 함께 일하며 뉴욕의 미술시장을 탐색하는 시간을 거쳤다. 그가 유명한 예술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아트 딜러라는 커리어에 아주 유리한 출발 선상이 되었다. 아버지 앙리 마티스를 통해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앙드레 드랭과 같이 뜨내기 아트 딜러가 쉽게 만날 수 없는 거장 미술가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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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명성은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되기도 했다. 어디를 가나 그를 정식 아트 딜러로 인정해주기보다는 ‘앙리 마티스의 아들’로 대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던 시기 미국에 경제 대공황 시기가 겹쳐 그가 제대로 된 화상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곧 뉴욕에 자신의 갤러리인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를 차리며, 아버지 세대의 작가들이 아닌 동시대의 유럽 작가들을 미국에 소개하는 데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한편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파리에 정착할 무렵 당시 유행하던 후기 입체파와 초현실주의 화파에 영향을 받았다.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조각품을 만들어낸 자코메티는 초현실주의 그룹의 유일한 빈 자리였던 조각가의 자리를 차지하며 꽤 일찍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그의 관심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보다는 실제 인간 모델로 자꾸만 향하게 된다. 초현실주의 그룹의 전시에 간간히 작품을 출품하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계속에서 인물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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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36년에는 당시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유럽 작가들의 작품을 미국으로 가져가던 피에르 마티스와 처음 만나게 된다. 당시 마티스가 적극적으로 홍보한 작가들은 호안 미로(Joan Miró), 발튀스(Balthus)와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이었는데, 그가 자코메티를 알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티스는 그해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여인> 작품을 구입하고, 그의 작품을 독점적으로 미국에서 판매할 권리를 얻어낸다. 그러나 매우 신중한 성격이었던 마티스는 완전한 초현실주의 조각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물 조각상을 완숙하게 만들어내지도 못했던 자코메티의 작품을 더 구입하는 것을 한동안 주저했다.

 

 

 

새로운 세계로


 

세계대전 전후로 자코메티는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의 핵심과 공간감, 무게감까지도 완벽하게 담아내는 것에 몰두했다. 자신이 원하는 형상을 만들어내려 강박적으로 형상을 떼어내고 붙이기를 반복했던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가느다란 뼈대만 남은 채 ‘성냥갑에 들어갈 정도로’ 매우 작았다고 한다. 전쟁 기간 동안 자코메티를 만나지 못했던 마티스는 1946년 초 오랜만에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하는데, 그때 역시 자코메티에게 ‘작품을 좀 더 크게 만들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자코메티는 마티스에게서 그러한 충고를 듣기 전부터 이미 자신의 작품이 가진 한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너무 작았다. 그래서 그는 실물 사이즈로 작업의 크기를 키우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작품의 키가 커지는 것과 몸의 부피가 늘어나는 것은 비례하지 않았다. 인물상의 높이가 커질수록 몸은 점점 가늘어지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발은 굉장히 커졌다. 이 불완전한 비율의 인물상들은 오히려 자코메티의 특징적이고 독특한 작업 스타일이 되었다. 1년 후 다시 자코메티의 작업실을 방문한 마티스는 이전과 전혀 달라진 작품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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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는 그에게 미국에서 전시를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프랑스의 화단에서 외면 받고 있었던 자코메티는 더욱이 미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고, 특히나 청동으로 주조한 작품은 한 번도 전시한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자코메티의 성공 가능성을 알아본 마티스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끝에, 이듬해에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에서 자코메티의 초기작부터 대표작까지를 아우르며, 청동으로 주조한 작품이 포함된 전시가 열리게 되었다. 게다가 자코메티와 철학적인 교류와 우정을 나누었던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전시의 서문을 써주면서 그 전시회는 컬렉터와 큐레이터들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자코메티는 찰흙으로 모양을 빚어 작품의 원형을 만들고, 그것을 석고로 본떠 이를 반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거푸집을 만들고, 거기에 청동을 부어 청동 조각상을 만들었다.

 

  

 

비즈니스 파트너를 넘어, 인생 친구로


 

자코메티가 마티스를 만난 건 그의 작업 인생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특히나 마티스가 프랑스 태생의 뉴욕에서 활동하는 화상이라는 사실이 결과적으로 굉장히 행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지는 유럽에서 뉴욕으로 옮겨왔고, 자코메티가 뉴욕 시장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그가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부터 1966년 사망하기 전까지 자코메티는 베니스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적인 전시에 참여하고, 런던의 테이트나 덴마크의 루이지애나와 같은 유수의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20대 때 정착한 파리 몽파르나스의 7평 남짓한 지저분한 작업실에서 평생 벗어나지 않았을 정도로 검소하고, 또 조금은 고지식했던 사람이었다.

 

피에르 마티스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관계도 평생에 걸쳐 이어졌다. 마티스는 수시로 파리를 드나들며 자코메티를 만났고, 그가 뉴욕에 있을 때는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수십 통의 편지를 통해 비즈니스 관계를 넘어 예술적 영감과 조언을 주고받았다. 때로는 열두 장에 이르는 편지에서 자코메티는 자신의 예술적 고민과 일상의 문제들에 대해 마티스에게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마티스는 편안하고 참을성 있는 성격으로 자코메티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때로는 특유의 신중하고 냉철한 판단으로 그에게 조언을 하거나 그의 작품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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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가 마티스에게 보낸 편지

 

 

마티스가 없었더라면 자코메티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예술가의 천부적인 재능과 기질이 결국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겠지만, 그가 적절한 때에 마티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가 살아생전 인정을 받으며 왕성한 작업 활동을 해내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또 자코메티가 없었더라면 마티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마티스 역시 수많은 마스터피스를 뉴욕 시장에 소개하여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컬렉션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정도로 수완 좋은 아트 딜러였지만 자코메티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의 컬렉션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할 수 없다.

 

마티스는 1966년 자코메티가 생을 떠나는 마지막 날 함께 했다. 그 역시 20여 년이 지난 후 1989년 생을 마감했는데, 그 1년 전인 1988년까지도 뉴욕의 경매에 자코메티 작품이 나왔을 때 전화로 입찰을 하고 작품을 구입했다고 한다. 자코메티의 오랜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컬렉터였던 마티스의 관심과 애정이 자코메티의 죽음 이후에도 이어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삶에 빼놓을 수 없는 평생의 친구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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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자코메티와 피에르 마티스

 

 

참고자료

The New York Times - "Pierre Matisse, 89, Art Dealer and Promoter, Dies" By John Russell

책 "The American Matisse: The Dealer, His Artists, His Collection : the Pierre and Maria-Gaetana Matisse Collection",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N.Y.), Sabine Rewald, Magdalena Dabrowski.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9

책 <자코메티: 도전적인 조각상>. 베로니크 와이싱어. 시공사, 2010.

책 <자코메티: 영혼을 빚어낸 손길>. 제임스 로드. 을유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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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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