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닮은 삶과 '삶'을 담은 영화 :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2019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2019
글 입력 2019.11.09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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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제멋대로지만 그래서 더 멋스러운 골목길 앞에 내렸다. 시계를 들여다보며 걸어가는 발걸음이 유독 가볍다. 내 기억을 훑고 지나가는 길 위의 돌담과 낙엽처럼, 새롭고 풍요로운 기분을 만나게 될 것 같은 설렘에.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골목길 위로 쭉 올라가다 보니 복합문화공간 에무가 나온다. 작고 아기자기한 건물처럼 상영관 내부도 조그마하다. 그래서 더욱 아늑한 공간은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음들을 포근하게 품어준다.

 

영화제가 좋은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독립 영화나 단편 영화 등, 큰 영화관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독립 영화관에서조차 만나기 힘든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나 단편 영화는 창작자가 인터넷 플랫폼에 직접 업로드해 둔 경우가 아니라면, 정말 찾기 힘들다. 구독료를 내고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플랫폼에서도 역시 단편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영화제는 창작자에게도 관객들에게도 시간과 감정들을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시공간이 되어 준다.

 

이제껏 다녀본 영화제에는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이 영화를 관람하러 왔다. 그래서 그런지 작은 공간에서 작은 수의 사람들이 내쉬는 탄식과 감탄사, 그리고 웃음소리는 마치 친한 친구와 함께 영화관에 온듯한 느낌을 준다. 공동의 체험을 함께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동질감 같은 것이 피어난다. 그런 기분들은 스스로가 가만히 지켜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위치에 놓는다. 좀 더 정면으로 영화를 마주 보면서 속에 담아 보고, 서로의 기분을 연결 지어 본다.

 

 

 

브루노 H 카스트로 <아이블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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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난 후 문득 되짚어보면서, 나는 단편영화와 마주한 시간이 거의 없었음을 느낀다. 어쩌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매력적인 것을 알았다면, 다른 단 편들을 만나기 위해 발로 뛰고 마음으로 뛰고, 그들의 언어를 쫓아다니는 일에 아주 적극적이었을 테니까. 이번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에서 총 6편의 작품을 보았다. 올해 경쟁 부문에 출품된 작품은 총 11 개국 5,752편이며, 그중 예심을 통해 국제 경쟁 부문에서만 35개국 53편이 상영됐다. 6편의 작품만 감상한 것이 한탄스러울 정도다. 같은 이야기를 다루더라도 영화의 언어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언어들이 느껴지지 않던가. 이 다양함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 되었을 거다.

 

예술 작품들을 볼 때 다가오는 감정들은 생각보다 직관적이다. 시각과 이성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작품을 느껴본다. 내가 관람한 6편의 작품들 중 시각적 즐거움을 가장 많이 가져다주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작업은 브루노 H 카스트로Bruno H CASTRO 감독의 <아이블리드I Bleed>다.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HIV 환자가 들려주는 내면의 이야기를 촘촘하고 실험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HIV 판정을 받은 뒤, 그가 겪었던 감정과 생각의 변화들을 독특한 이미지로 풀어내는 이 작품은 경험하지 못했던 감각들을 시각 이미지를 통해 공감하도록 유도한다. 흰 바탕이 아닌 글씨가 빼곡히 적힌 책 위에 그려지는 이미지들은 그의 복잡한 마음을 더욱 시각적으로 느껴질 수 있게 하며, 여러 장의 사진으로 찍은 듯한 영상 이미지는 애니메이션 매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에릭 바롤린 <버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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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예측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완전히 확신할 수 없는 이야기의 전개는 즐거움을 준다. 삶을 바라보며 ‘영화 같다’라는 말을 중얼거릴 때, 우리는 삶 속의 새로움을 발견한다. 영화 같다는 표현은 현실이라고 믿었던 삶과 허구라고 믿었던 영화의 거리감이 좁혀질 때 만들어진다. 그 둘이 가까워질 때 현실은 영화 같아지고, 영화는 현실 같아진다. 에릭 바롤린Erik WAROLIN의 <버뮤다Bermuda>는 현실 같은 허구와 허구 같은 현실을 잘 보여준다.

 

 

젊은 웨이트리스 조나는 사장이 시키는 대로 억지로 그날 찾은 유일한 손님에게 말을 건네게 된다. 일상적인 대화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고, 그녀의 인생을 뒤바꾸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는 웨이트리스 조나와 손님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손님은 자신이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설명한다. 아무도 모르게 범죄자를 뒤쫓고, 그를 차에 감금시키는 등의 임무 말이다. 관객의 반응은 대부분 조나와 같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군.’ 조나는 또한 자신의 현실을 허구와 뒤섞어 비밀스러운 임무로 둔갑시킨다. 저도 당신처럼 비밀스럽고 아주 위험하지만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야 한답니다, 현실은 허구의 옷을 입고 유머가 된다. 하지만 조나가 그 말을 마치자마자, 허구는 다시 현실이 된다. 손님이 차에 범죄자를 감금시켰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님이 세워둔 차의 트렁크에서 몸이 밧줄로 묶인 인물이 도망치듯 차 밖으로 달려 나간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허구 같은 현실과 현실 같은 허구들이 뒤섞여 유머와 경악, 해소와 불편함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세상이다.

 

 

 

기 나티브 <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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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정말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영화에서만 일어날 것 같은 새로운 사건이나, 우연으로 이어지는 운명들, 새로운 만남이, 어쩌면 현실에서 더 빈번하게 일어나곤 하니까. 허구였으면 하는 묵직한 현실의 부조리함을 느낄 때도 있고, 잔잔한 영화처럼 그 역경들이 모두 해피엔딩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도 가져본다. 기 나티브Guy NATTIV 감독의 <피부Skin>은 지독한 현실의 면모들을 허구의 이야기로 보여주지만, 이는 현실의 부조리함을 더욱 느끼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한다. 허구를 통해 뒤틀린 현실은 더욱 잘 보이는 법이다.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한 작은 슈퍼마켓에서 흑인 남성이 계산대 통로를 지나는 10살짜리 백인 남자아이에게 미소를 보낸다. 악의라곤 없었던 이 순간으로 인해 두 갱단의 무자비한 전쟁이 시작되고 참혹한 결말을 맞는다.

 

 

인간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신체 조건들은 여전히 인간을 분류하는 척도로 사용된다. 인종주의에 따르면 피부 색이 밝다는 것은 곧 우월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피부 색이 어둡다는 것은 곧 미개한 인간임을 뜻한다. 이처럼 특정 개인을 억압하고 고통받게 하는 사상은 결국 모두를 향해 화살을 겨눈다는 사실을, 감독은 영화를 통해 전하고 있다. 흑인을 향해 침을 뱉던 그는 검은색 잉크로 뒤덮인 몸을 하고 결국 그토록 아끼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아들이 그를 흑인으로 착각했기 때문인데, 그가 아들 앞에서 일삼던 인종주의적 발언과 행동들은 그대로 그의 등 뒤에서 방아쇠를 당긴다.

 

 

 

조프로이 찬두티스 <스와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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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도‘스왓팅’을 다룬 이스마엘 조프로이 찬두티스Ismael Joffroy CHANDOUTIS 감독의 <스와티드Swatted>가 있다. 서사보다는 보여주는 방식에 더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인다. 스왓팅은 일종의 장난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장난’으로 인해 누군가는 평생 고통받고 괴로움이 몸부림친다. 요즘에는 게임을 실시간으로 함께 하는 콘텐츠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주소를 해킹하고, 911에 가짜로 꾸민 위급한 상황을 신고하여, 특공대가 온라인 스트리머 유저들을 긴급 체포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상황은 실시간으로 인터넷으로 공개된다.

 

 

“스왓팅”의 피해자가 되었던 온라인 유저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유행으로 떠오른 이 사이버 괴롭힘은 유저들이 게임에 접속할 때마다 그들의 목숨을 위협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유튜브 동영상 및 비디오 게임의 와이어프레임 이미지를 통해 보여진다.

 

 

영화의 이미지들은 편집으로만 이루어진 듯하다. 인터뷰어의 목소리는 오디오로 들려줄 뿐, 실제 관객이 보게 되는 이미지는 게임을 스트리밍 하는 영상과 스왓팅 당하는 유튜브 영상, 그리고 비디오 게임의 와이어프레임 이미지다. 그래서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실제 스왓팅을 온라인에서 목격하는 방관자가 되기도 하고 게임을 실제로 진행하는 온라인 유저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이미지를 편집하는 방식과 새롭게 재구성하는 방식을 연구하여 신선한 이미지들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왕 치아 춘 <형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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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제는 보여주는 영화의 스펙트럼이 넓은 것 같다. 이미지로 시각적인 즐거움을 가득 안겨주었다면, 마음을 자극하여 미소와 잔잔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일도 잊지 않는다. 왕 치아 춘WANG Chia Chun 감독의 <형제애Brotherhood>에서 대만의 청량한 풍경과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을 느낄 수 있다.

 

 

봄이 다가오던 어느 날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자, 딩과 친구들은 교실 밖으로 나가 올해 몇 번이나 모습을 보였던 회색 독수리의 사진을 찍으려한다. 아이들은 마치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듯 학교 뒤편으로 넘어가 회색 독수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아이들의 청량한 목소리와 여름의 공기는 미소를 머금게 한다. 학교가 곧 사라질 것이라는 담담한 말속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회색 독수리 사진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아이들은 손을 잡고 달린다. 종이 울려 마음이 급해도 담을 넘는 친구를 기다려준다. 담에서 떨어져 피에 적셔진 이가 끝도 없이 입속에서 나온다 할지라도, 그들의 형제애는 그를 미소 짓게 한다. 이가 빠진다는 것은 고통이지만 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올해 이 영화제를 만났다면, 축하한다.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의 초입에서 언제나 당신이 떠올리는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괜찮다. 상쾌한 공기와 함께 느낄 수 있는 신선함이 당신을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는 설렘을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내년에도 당신과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하나의 시공간을 공유할 수 있기를 기다린다.

 

 

[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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