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공녀 [영화]

글 입력 2019.11.08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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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적고 싶어서 어쩌면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스포일러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을 만큼 그저 잔잔한 '미소'의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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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위스키, 그리고 한솔이 너만 있으면 돼"

 

 

 

1. 미소와 노마디즘(NOMADISM)



미소는 말 그대로 유랑자였다. 그리고 아주 선명한 가치관과 취향을 가졌다. 그게 '스탠더드'는 아니었지만. 한솔, 위스키, 담배만 있으면 됐다. 처음엔 술도 담배도 남자친구도 전부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내가 영화를 잘못 튼 걸까 싶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에게 자연스럽게 던진 질문은 '미소에게 있어서 한솔, 위스키, 담배 같은 존재가 나에게도 있을까'였다. 나도 집을 포기할 만큼 나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 존재할까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생명이던 물질이던 비물질이던.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일까 매일 고민한다. 하고 싶은 것이 없고 되고 싶은 것이 없는 지금의 나에게도 한때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전부였던 날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짧은 다리로 친구와 웃으면서 걸어간 곳은 항상 노래방이었다.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그냥 그 순간에는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이 너무 좋았다. 천 개의 노래를 mp3에 담아서 모두 들을 만큼 노래가 좋았다.

 

아쉽게도 노래는 더 이상 이전과 동등한 의미가 아니지만. 그렇게 또 생각했다. 내가 집을 포기할 만큼 사랑하고 의미를 두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오래갈까. 나의 노래에 대한 마음이 미소가 위스키, 담배를 생각하는 마음만치 안 되었을 수도 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나의 하루에서 차지하는 영역은 날로 줄어들었다. 이제는 취미라는 말로 소개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현실적으로 생각해'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모두가 다른 현실을 사는데 왜 같은 삶을 살기 위해 이리도 애쓰나. 남자친구는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멀리 떠났고 미소는 혼자 남았다. 사랑하는 것을 한 가지 잃었음에도 그녀는 계속 사랑했다. 그리고 백발에 가까운 머리로 변했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 병은 아니지만 일종의 질병의 치유까지 포기할 정도로 담배, 위스키를 사랑했다. 우리는 '현실적인 삶'을 살면서 사라질 수도 있는 무언가를 이토록 짙게 사랑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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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2. 집 그리고 취향


 

미소가 찾아갔던 이들의 집은 모두 슬픔이 가득했다. 흔히 휴식처, 안식처로 비유되는 집과는 다르게 그 공간은 슬픔을 쏟아내는 공간이었다. 난 한때 지구상의 온 공간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고 마음 편한 공간이 노래방이었다. 잔잔한 노래를 부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마음이 편해졌다. 집은 죽어도 들어가기 싫고 그냥 노래가 나의 안식처였다.

 

하지만 지금은 본가의 내 방이 가장 편한 공간이다. 정말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 없는 것이 없는 이 서울이라는 곳에서 나의 물질적이고 경험적인 수요는 안정적이지만 정신적인 수요는 사실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수 년을 살았어도 서울은 여전히 나에게는 낯선 공간이고 낯선 이들의 집합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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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 염치가 없어.

나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미소야.

나는 네가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술, 담배라는 것도

솔직히 진짜 한심하고 그것 때문에

집도 하나 못 구해가지고.

우리 집에 와서 지내면서

그런 것까지 다 이해해주길 바라는 네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 안 드니?"

 


문영은 더 큰 회사를 원했고 이를 위해 살았다. 현정은 남편과 시부모를 위해 살았다. 대용은 결혼을 하고 아내를 위해 집을 샀다. 정미는 돈 많은 남편에게 시집갔고 그의 눈치를 본다.(아마도 돈을 위해서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록이는 부모를 위해 결혼을 하려고 한다. 그래 어쩌면 한 편으로는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나의 욕구와 취향을 위해 사는 건 미소뿐이었다. 만약 그들이 위한 것이 그들의 취향이었다고 해도 그 사실은 미소와 취향이 달랐을 뿐이라는 것이지 미소가 손가락질 받을 정당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정미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고 그 둘의 사이에 선 내 생각과 마음에 정미가 던진 말이 더 마음을 후벼 판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노래방을 집처럼 생각했듯 미소에게도 몸을 누이는 그 '집'이라는 곳이 편치 않았을 거다. 그 '집' 자체가 취향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 다른 취향을 가졌기에 모두 다른 우선순위를 가졌다. 집을 포기하는 미소가 처음에는 무모하고 멍청해 보였다. 내가 저런 상황이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어쩌면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영화의 엔딩까지 그냥 서글프기도 했고 그럼에도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는 것이 진짜 오늘을 사는 것 같기도 했고. 문득 나의 오늘에 그리고 내일에 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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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3. 사람과 물건 그리고


 

방을 빼기로 결심한 미소는 물건을 정리한다. 의미가 없는 것들을 정리한 후 미소는 캐리어 하나에 큰 짐 하나를 들고 다닌다.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후에 장례식장에서 미소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마지막 장면에 인물들이 하는 말들을 어떤 의도로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엔 그저 위선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것들로 좋아하지 않는 것들로 하루를 채우며 나날을 보내는 이들이 하는 말들은 훈훈함이 아닌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생각만 들게 하더라. 미소가 많은 이들에게 보였던 행동들은 인류애 그 자체였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어쩌면 미소가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과 사진 뒤의 메시지처럼 다시 찾지 않을 것들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굳이 가질 필요가 없으면 갖지 않아도 되니까. 미소처럼. 백발이 된 미소의 뒷모습은 아름다웠고 영화가 끝나고 나는 미소의 행복을 빌었다.

 

 

 

4. 배우들


 

배우로서의 이솜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딕션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서 놀랐다. 몇몇 배우들이 대사를 칠 때에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있어서 한글 자막을 잠깐 켰을 때도 있었는데 그에 비해 이솜의 발음이 너무 정확했다. 그리고 마스크가 정말 너무 매력적이었음.

 

안재홍은 참 이런저런 작품을 보고 생각이 드는 게 무던한 연기를 잘하는 것 같다. 감정 표출이 강한 그런 연기가 아니라 조곤조곤 무미건조하게 말하듯 감정선을 풀어내는 게 참 좋다. 그렇기에 이 영화와도 정말 잘 어울렸다. 조수향은 이 영화를 통해 처음 보는 배우였는데 매력 있고 연기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이런저런 일들로 한동안 영화나 책을 볼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어제 새벽을 불태운 덕에 잠깐 여유를 얻었다. 독립영화를 찾아보다가 원래는 <파수꾼>을 보려고 하다가 또 눈이 돌아가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항상 그런 것 같다. 봐야지 하고 메모장에 적어둔 영화를 보려고 들어갔다가 발견한 다른 영화를 보게 된다. 그렇게 영화가 다 끝난 후 느끼는 건 신기하게도 즉흥적으로 재생 버튼을 누른 그 영화는 바로 이 순간 내가 가진 고민들을 이야기하고 있더라.

 

감이라는 게 있긴 있나 보다. 또 생각이 많아질 밤을 앞두고 오늘 참 잔잔히 좋은 영화를 봤다.

 

 



[정두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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