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느 시절에 빚을 지며 살아간다는 것 [여행]

38일의 여행이 내게 남긴 것
글 입력 2019.11.0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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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다



언제부터 인지 모르게 내가 나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감정들은 고이다 못해 썩어버렸고, 나는 그것을 직시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어 그 곁에 앉아버티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세상은 무심하고 잔인하게 스쳐갔다. 좁고 긴 동굴 같았던 입시가 끝나고 나면 길이 보일 줄 알았다. 순진하게도.

 

하지만 동굴을 벗어나고 나니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넓은 평야였다. 꾸역꾸역 2년간 학교를 다니며 온전히 나라는 사람에 집중한 순간이 없었다. 나를 위해주는 법도 모르고, 내가 원하는 것도 몰랐다. 어느 순간 “나는 고장이 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휴학의 목적은 오로지 ‘쉼’이었다. 아예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용기도 없었으며 그럴 만한 명분도 찾지 못했으니, 일시정지 버튼이라도 눌러야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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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으로 떠나다


 

그리고 유럽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어떤 거창한 목적이 있었던 여행은 아니었다. 유럽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함이 반이었고 유럽 배낭여행에 대한 오랜 환상이 나머지 반이었다. 나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데에 두려움이 큰 사람이라 여행이 점점 구체화되면서 설레기도 했지만 불안함이 더 컸다. 휴학까지 하고 멀리 떠나는 거 최대한 ‘뽕’을 뽑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버렸다.

 

여행할 도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미리 공부를 하고, A부터 Z까지 철저한 계획을 세워야 완벽한 여행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당장 여행 경비를 모으기 위한 아르바이트 일정만 소화하기에도 벅찬데, 38일짜리 여행 일정을 짠다는 것은 이미 지쳐있는 나에겐 불가능했다. 결국 교통과 숙소 예약 바우처만 달랑 들고 떠났다. 떠나는 비행기에서 눈앞에 다가온 그 순간에만 집중하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며 불안한 마음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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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잠재워 주던 창 밖 풍경

 

 

아침에 일어나 친구와 어젯밤은 잘 잤냐, 이번 숙소 침대는 좀 괜찮지 않으냐 등의 안부 인사를 나누면 하루가 시작되었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는 이동 중에 공부했고, 그날의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일정을 짰다.

 

어떤 날은 여느 관광객들처럼 유명한 장소들을 번갯불 콩 볶아 먹듯이 돌아다녔다. 또 다른 날은 그 지역의 현지인이라도 된 것처럼 느지막이 일어나 숙소 앞 식당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고 해가 지기 전 다시 숙소로 돌아와 맥주를 먹었다.

 

매일이 특별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잠들기 전에 어떠한 부채감 없이 잠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만했다. 낯선 공간에서 오히려 평안함을 느끼는 내가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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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베니스의 일몰

 

 

항상 고민하고 생각해왔다. 나에 대해, 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타인들에 대해 그리고 내가 기어코 마주하게 될 것들에 대해. 하지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내가 만들어낸 나의 세계 갇혀 있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그것들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저 사방에서 죄여오는 감각을 생생하게 느낄 뿐이었다. 여행은 현실의 삶과 잠시 이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덕분에 나 이외의 것을 차치하고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나의 선택이 실패하는 게, 그 실패가 내 세계를 무너뜨릴 거라는 공포감에 항상 물러서 있었으나, 실패해도 괜찮은 곳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 원하는 것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내 선택이 좋았던 날도 실패했던 날도 모두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 모든 날들이 모여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가슴이 뛰는 일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데이터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어지럽던 마음이 잔잔해져있었다.

 

 

 

일상의 궤도로 돌아오다


 

어떤 시절을 지날 때 이 시절을 오래 그리워할 거라는 예감이 들 때가 있다.이 여행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불쑥불쑥 그런 예감들이 찾아왔다. 여행으로 대단한 삶의 의미를 찾았다거나, 180도 바뀐 나를 만났다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나는 겁이 많고 어리숙하고, 나를 둘러싼 세계는 어지럽고 불안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달리 원하는 것이 생겼으며 그를 향해 움직일 용기가 생겼다. 여기까지 오는 데 참 오래도 걸렸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빛나던 23살의 여름과 가을, 그 시절에 꽤나 많은 빚을 지며 살아갈 거라는 예감이 든다.

 




[이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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