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성, 그리고 진화하는 미디어의 시선 [문화 전반]

글 입력 2019.10.30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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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초,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이 순식간에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던 일을 기억한다. 논란은 인터넷 상에서 특히 뜨거웠다. 일부 극단적 남성우월주의자들은 ‘아이린이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다’고 주장하며 그녀에게 혐오감을 표시했다. 아이린의 얼굴이 새겨진 굿즈를 훼손한 뒤 인증샷을 남기기도 할 정도였다. 배우 서지혜, 소녀시대 수영 또한 이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일부 네티즌들에게 엄청난 뭇매를 맞았다. 똑같이 이 책을 읽었다고 밝힌 남성 유명인에게는 아무런 논란이 생기지 않았던 반면, 여성 연예인에게만 엄격하다 못해 가혹한 잣대가 적용되는 것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매우 큰 씁쓸함을 느꼈었다.

 

그리고, 그 후 약 1년 반이 지난 지금.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했다. 책에 이어 또 한 번 영화는 숱한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 논란 또한 여전하다. 실관람객이 아닌 이들의 이른바 ‘평점테러’가 이어지고, 영화에 출연한 주연배우들, 관람 후기를 SNS 등에 남긴 연예인들을 향한 비난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개봉 둘째 날 영화를 관람하고 온 후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일련의 양상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작년 ‘아이린 논란’을 두고 언급한 모 문화평론가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남성들이 ‘여성들이 말을 하는 시대’에 대한 위기감과 반감을 갖고 있다. 이는 그에 대한 혐오적 표현이다.” 1년 반이 지난 지금, 이 말이 여전히 ‘매우’ 유효하다는 것에 다시 한 번 씁쓸함을 느끼는 요즘이다.

 

<82년생 김지영>이 보여주듯 여전히 우리 사회 내에서 성역할 인식과 여성 인권에 대한 대립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를 계기로 사회 각 분야에서 성역할 인식을 주제로 한 의미 있는 시도들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난 일 년 간 미디어 영역에서는 성역할과 여성주의에 대한 유의미한 담론들을 보여준 콘텐츠들이 다수 제작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여성과 젠더 감수성에 대한 미디어의 인식 변화를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문화콘텐츠 세 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1. AOA의 <너나 해>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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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털이 떨어질 때 벚꽃도 지겠지. 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I’m the tree.”

 

한달 전, Mnet의 서바이벌 경연 프로그램인 <퀸덤>의 한 무대에서 AOA의 지민이 부른 랩의 한 소절이다. 이 날 AOA가 선보인 무대는 온라인 상에서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이 날 4인조 그룹인 마마무의 ‘너나 해’를 새로운 느낌으로 편곡해 불렀는데, 바꿔 부른 곡 자체도 신선했지만 그보다 더욱 강력한 인상을 남긴 것은 보깅 댄서들과 함께 만든 무대 구성이었다.

 

데뷔 이후 줄곧 섹시 컨셉을 내세운 무대를 선보이며, 때로는 노출과 성 상품화 논란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AOA는 이 무대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멤버 전원이 몸선을 강조하는 짧고 붙는 의상 대신 까만 수트를 갖춰 입고, 간단한 헤어 스타일링을 한 채로 줄곧 카메라를 카리스마 넘치게 응시한다.

 

한편 그동안 그들이 보여온 모습을 대신한 것은 뒤이어 등장한 보깅 댄서들이다. 화려한 스타일링의 긴머리에 하이힐, 핫팬츠를 입고 등장해 관능적인 표정으로 안무를 선보이는 남성 댄서들과 AOA가 어우러져 무대를 완성해가는 모습은 어딘가 모를 쾌감과 해방감마저 들게 한다.

 

아마 어쩌면 앞서 언급했던 지민의 랩 한 소절은, 그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결코 가볍지 않은 ‘다짐’같은 문장일 지도 모르겠다. 그간 무대 위에서 연신 미소를 지으며 ‘나의 왕자님’을 찾던 AOA는 비로소 주체적이고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었다. 이 무대를 계기로, 우리는 과연 아이돌 그룹들의 보다 많은 ‘젠더리스’ 컨셉 무대를 볼 수 있게 될까? 부디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부디 그래야 한다.

 

 

 

2.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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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 방영된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이하 ‘검블유’)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드라마의 대본을 펼쳐 놓고 여성 등장인물과 남성 등장인물의 대사를 서로 바꿔본다면, 원래 대본보다 더 익숙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질 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드라마는 그동안 다수의 한국 드라마에서 보여준 여성 등장인물들과 남성 등장인물들의 전형적 특징, 설정값, 대사, 행동 등을 의도적으로 맞바꿔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검블유’의 주축이 되는 세 명의 여성 주인공들은 그저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전문직 여성 캐릭터를 표상한다고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복합적인 면모들을 가지고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그들은 착하지 않다. 원하는 것, 억울한 것을 참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건, 스스로가 원해서 선택한 도덕적 원칙이다. 그들의 대립은 어떤 물리적 원인 때문이 아닌, 각자가 가지고 있던 그 원칙에 기인하여 일어난다. 지금껏 수많은 드라마 상에서 둘 이상의 여성 등장인물들이 돈이나 권력 같은 세속적인 가치, 혹은 한 명의 남자 주인공을 두고 대립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로맨스적인 측면을 떼어 놓고 보면 ‘검블유’가 가진 흥미로움은 더욱 배가 된다. 특히 세 여성 인물 중 한명인 ‘배타미(임수정)’와 상대 남주인공 ‘박모건(장기용)’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시청자로 하여금 묘한 신선함을 계속 불러일으킨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태껏 한국 드라마가 보여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대사, 행동을 서로 완전히 뒤집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서도 남주인공을 지켜주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는 여주인공, 여주인공에게 설거지엔 재능이 없으니 회사에서만 재능을 마음껏 펼치라고 말하는 남주인공. 어떤가. 성별만 서로 바꿔 놓았을 뿐인데 거기서 오는 신선함이 꽤 낯설지 않은가? 이 이야기가 더 이상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는 날이 어서 빨리 오길 바라며, 나는 제 2, 제 3의 ‘검블유’를 오늘도 홀로 ‘존버’ 해본다.

 

 

 

3. 넷플릭스 오리지널 스탠드업 코미디 <박나래의 농염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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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딩 코미디가 예전만큼 큰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나래는 ‘여성 코미디언 최초’의 1인 스탠딩 코미디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이 콘텐츠가 성역할 인식에 있어서 유의미한 변화를 가지는 이유는 비단 ‘여성 코미디언 최초’라는 타이틀 때문만은 아니다. 박나래는 이 공연에서 ‘대놓고’ 19금 얘기들을 쏟아냈다. 그것도 자신의 경험담을 소재 삼아, 어느 한구석 재지 않고, 빼지도 않고 유쾌한 선에서 실컷 풀어 놓는다. 박나래는 그렇게 1시간 동안 ‘말’을 무기 삼아 홀로 무대를 날아다닌다.

 

혹자에 따라서는 시청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나래 이래도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만큼 이 콘텐츠는 정말 야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거기다 여성 연예인이 자신의 성적 경험담을 가감없이 코미디의 소재로 사용한다? 이는 분명 전에 없었던 파격이며, 어떤 면에서는 우리 사회의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무의식적 금기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전체적으로 이 콘텐츠가 엄청난 ‘빅재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후반부에 가서는 아직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원하게 끌고 가기에는 한 끗 부족한 그녀의 역량이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시도는 한참 후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쇼는 전체적인 완성도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박나래가 줄곧 온몸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이래도 되나’ 싶은 것이 실은 진짜 이상한 거라고. 마음껏 유쾌해도 된다고.

 

부디 이 쇼를 시작으로 여성 코미디언이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그리고 지금껏 민감하게 여겨졌던 주제들도 툭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무대가 몇 배, 몇 십 배 더 많아 지기를 소망해본다. 이 세상의 수많은 ‘걸크러쉬’ 들이 탁 트인 공간에 모여 19금 얘기로 마음껏 웃음을 터뜨릴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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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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