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은희가 내게 알려주고 간 것 - 벌새 [영화]

글 입력 2019.10.0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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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를 좋아했다. 친구들이 회색신사들에게 뺏긴 시간을 찾아주기 위해 현명한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와 모험을 떠나는 작은 소녀의 이야기는 읽자마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소설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요소로 작용했던 하나는, 내가 ‘모모’에 쉽게 이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한창 또래들 사이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 마법천X문, 메이플 스X리와 같은 만화가 유행하고 있었지만, 그 속의 주인공들에게 내가 이입하긴 어려웠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신들은 남편의 바람을 감시하거나 누가 더 아름다운지를 놓고 다투기 일쑤였고 그렇지 않은 여신들도 내가 이입하기에는 너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천X문이나 메이플 스X리 같은 모험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대부분 소년이었고 소녀는 그런 소년을 보조하거나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신 모모는 평범하면서도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인물이었다. 물론 마음속에 큰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신들처럼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거나, 뛰어나게 예쁘지는 않은 소녀였다. 그 때문에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모모가 되어 모험을 떠날 수 있었다. 상상 속에서라도 내가 모험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매우 나에게 중요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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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최근,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를 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성장 영화를 봐 왔지만, 이처럼 나와 ‘가깝다’라고 느껴진 영화는 처음이었다. 물론, 은희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 나와 같은 시절을 보낸 이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은희는 94년에 중학교 2학년이었고, 나는 95년도에 태어났으므로 은희와 중학교 2학년의 나 사이에는 약 20년 정도의 시간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의 간격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은희가 겪었던 일은 내가 겪었던 일들과 비슷했다. 강압적인 선생님에게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말도 안 듣는다’라는 등의 모욕적인 말을 듣는 건 일상다반사였으며,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가자’ 따위의 구호를 외쳐야 한다거나, 반에서 ‘날라리’ 일명 ‘노는 애’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내가 중학교 2학년을 지내고 있을 때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 외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그랬다. 가정 내에서 남성 구성원의 폭력에 노출되는 것, 이런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존재가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이 아니라 친구라는 것, 좋아하는 친구에게 내가 직접 만든 테이프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공유하는 것 (물론,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는 CD에 노래를 녹음했다) 등. 이런 장면들은 어느새 성인이 되어 내가 잠시 잊어버리고 지냈던 과거의 나를 소환해냈다. 덕분에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과거의 나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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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답답한 감각이었다. 그때의 나는 항상 답답해했다. 마치 딱딱한 껍질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는 그때의 답답함이 단지 호르몬 때문이거나, 항상 필요 이상으로 우리를 교실에 잡아두었던 학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벌새’를 보며 내 답답함은 또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많은 이들에게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리숙한 학생으로, 그러니까 관리하고 제안해야 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은희 역시 그렇다. 은희를 대하는 어른들은 은희를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라기보다는 골치 아프고, 말 안 듣는 미성숙한 존재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은희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은희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건 사이에서 문제 있는 아이, 예민한 아이로 단순하게 일축된다.


하지만 은희는, 또 모든 청소년은 다양한 일들을 처음 겪어보는 것일 뿐, 마냥 미성숙하거나 이상한 존재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때문에 은희는 자기의 마음의 맥락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들린다. 빈집에서 지나간 유행가를 틀고 발을 쿵쿵 구르거나, ‘나 예민한 거 아니라고!’라고 소리치는 은희의 모습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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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분리된다는 것‘에 대한 불안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청소년들은 주변인들이 성인으로 취급해 주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동과 같은 돌봄의 대상은 아니다. 그 때문에 처음 겪는 많은 일을 혼자 겪어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랬고, 은희도 그렇다. 연인과의 다툼과 헤어짐, 친구와의 싸움, 주변인의 죽음까지. 물론 이 모든 사건을 겪는 동안 곁에 있어 주는 친구가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이 사건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건 은희 혼자만의 몫이다. 탄탄하게 발 디딜 수 있는 새로운 지반이 만들어지지 않는 상태지만, 원래 딛고 있던 (유아적인) 세계를 떠나야 한다. 은희가 엄마를 애타게 부르지만 은희의 목소리가 엄마에게 가 닿지 않았던 순간은 이와 같은 분리에 대한 불안을 나타내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답답하고 불안한 현실 속에서 은희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찾음으로써 상황을 타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은희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영지 선생님에게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유리를 좋아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쉽게 내치지 못하며 결국 만나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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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해야만 안정되는 현실을 사실 불안정한 현실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마음이 바뀔 수도,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많은 사건들 후에 은희는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았을까.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깨달았기를, 깨닫지 못했으면 어서 빨리 깨닫기를 바라게 된다. 사실 이는 나 스스로 바라는 바람이기도 하다. 아직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인정하는 것, 또한 나 스스로 나를 사랑함으로써 답답하고 불안한 현실을 이겨낼 힘을 키우는 건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풀지 못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내 중고등학교 때의 경험과 매우 맞닿아있는 영화 벌새를 보며 과거의 나를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지금의 나 역시 다시 한번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처럼 은희에게 동질감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벌새는 개봉 전부터 전 세계의 영화제에서 25개 상을 받아 주목받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10만 관객을 넘겼다. 입이 딱 벌어지는 스케일을 전개해 제작비가 100억대는 쉽게 넘어가는 영화들이 즐비한 요즘, 이와 같은 결과는 매우 상징적이다. 그만큼 많은 ‘은희’들이 이와 같은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니까. 물론 화려하고 혼이 쏙 빠지는 영화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절대 사소해보이지 않는 은희들의 이야기 말이다.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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