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폭력의 근절은 회복으로부터 - 킬롤로지 [연극]

글 입력 2019.09.22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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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악순환이다. 더는 시작도, 끝도 없다. 개개인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쉽지만, 가해자에게 벌을 내린다고 해서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없앨 수는 없다. 폭력의 형태는 다양하며, 그 정도와 원인도 가지각색이다.

뉴스도 여론도 사건이 발생하면 그 "이유"를 찾고 그에 분노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지금까지의 폭력 사건들을 떠올려 봤을 때, 그 이유가 납득이 가거나 유독 특별했던 사건이 있었나? 대부분의 이유는 거기서 거기였다. "그냥"부터 시작해서 "어린 시절의 상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반복적으로 원인으로 밝혀졌다.

늘 비슷한 원인으로 폭력이 발생한다면 대체 폭력을 예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 원인만 해결하면 그만인 것을. 왜 매번 우리는 같은 이유를 보며 충격을 받고, 두려움에 떨고, 심지어 일반화시켜 또 다른 피해자를 낳게 두는 걸까?


[연극열전] 킬롤로지 티저 포스터.jpg
 


자극적이지 않은 것들은 자주 무시당한다. 사건의 해결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장 눈앞에 결과가 펼쳐지는 해결방안이 아니면 자꾸만 실행을 미루게 된다. 가해자에게 벌을 내리고 규정을 강화하는 일, 꼭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근본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킬롤로지>의 폭력 사건을 엿보았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분명히 있었고, 소위 말해 악역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킬롤로지의 폭력 사건만을 엿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들의 배경을 알았다. 이해한다고 용서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는 늘 단순하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이상적인 폭력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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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공연사진


<킬롤로지> 속 폴은 누가 봐도 악한 인물이다. 그가 사회에 내놓은 게임, 그를 찾아온 알란에게 가한 폭력, 그의 아버지를 향하던 분노, 그리고 입양한 아들에게 준 상처까지 전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악행들이었다. 그의 사연을 듣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그가 악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분노에 이유가 없지는 않다. 풍족하게 산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 물질적인 것보다 필요한 것은 진실한 사랑과 인정이다. 폴은 아버지에게 늘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가 나쁜 의도로 그를 외롭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폴을 따스하게 안아주지 못했다. 폴의 마음에 애정을 향한 갈증이 생긴 것이다.

그는 해소되지 못한 갈증을 분노로 표출했다. 인정받기 위해 발악을 하고 타인에게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내 눈에 비친 그는 아픈 사람이었다. 그의 회복되지 못한 상처는 그를 병들게 했고, 그로 인해 타인을 향한 배려와 애정마저 잃게 되었다.

제때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면 상처는 더 큰 구멍을 내고 끝내는 완전히 병들게 만든다.



킬롤로지 공연사진6.jpg
2018 공연사진


데이비에게 아버지의 부재가 남긴 상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건의 피해자로만 알고 연극을 보러 갔지만, 그 역시 또 다른 사건의 가해자였다. 그의 해소되지 못한 결핍은 그를 병들게 했고, 어쩌면 그가 속에 분노를 갖지 않았다면 그는 피해자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데이비가 결국 살해됐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무조건 옹호할 수는 없었다. 그도 누군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준 사람이었다.


*

결론적인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고 해도 가해자만을 탓하기엔 수많은 상처와 배경이 존재한다. 악역이 있다고 악역을 욕할 수 있는 건 영화나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 사회에서는 나쁜 사람만을 욕할 수 없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 상황은 작가가 통제할 수 있지만, 현실은 실험 마냥 조건 통제를 할 수 없다. <킬롤로지>는 이런 통제를 전혀 하지 않은 현실적인 연극이었다. 잘한 사람은 없었다. 이상 속에서만 모든 것이 아름다운, 지극히 현실적인 연극이었다.

그래서 어렵다. 현실은 어디부터 바꿔나가야 할지 모르니까. 정말 이상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고 달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상이기 때문에 쉽게 뱉을 수 있는 말인 것을 알고 있다.

근본이라는 것은 이상적이라서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너무나 이상적이라서 알면서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들. 그렇다고 손 놓고 둘 수만은 없는 그런 것. 뭐라도 해봐야겠지만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것들.

그렇다면 폭력에 예방이란 것은 불가능한 걸까?




폭력의 사슬



폭력은 상당히 수직적인 형태이다. 위에서 아래로 가해진다. 두려운 존재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자신이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폭력 앞에 망설임이 없어진다.


사회적인 지위만이 아니라, 상황에서도 폭력의 수직적 양상은 드러난다. 이 순간 내가 우위에 있다고 느끼면 폭력은 행해질 수 있다. 계속해 반복적으로 대물림되는 폭력의 사슬은 과감하게 끊어내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데이비도 폴도 누구도 끊어내지 못했다. 자신이 가하는 혹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무력하거나, 과감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 사슬은 알란에게 넘어갔다.

알란은 자신이 폴보다 우위에 있던 그 상황 폭력을 멈췄다. 그의 양심과 마음은 그를 막았다. 사슬을 끊어낸 것이다. 그러나 알란이 폭력을 멈춘 순간, 권력은 폴에게 넘어갔다. 그의 위치는 상승했고, 결국 알란에게 폭력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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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공연사진


만약에 이 사슬이 진작에 끊어질 수 있었다면, 이렇게 모든 것이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란이 그려낸 데이비의 모습처럼, 정말 데이비는 멋진 청년이 되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했을지 모른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그 역시 그럴 가능성이 있는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누구도 끊어내지 못한 폭력의 사슬은 그의 미래를 막았고, 되풀이되었고, 끝내 비극을 만들었다. 게임 "킬롤로지"가 만들어내는 반복도, 폴이 자신의 아들에게 했던 폭력도 전부 진작에 끊어내지 못한 폭력의 사슬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회복의 필요성


이상적인 폭력의 근절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막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는 모두 미성숙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주곤 한다. 조금 더 들여다보고 달래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 아름답게 변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폭력의 사슬이라도 끊어내야 한다. 더는 내려오지 않게, 더는 반복되지 않게, 폭력의 하강은 반드시 멈춰야 한다.

타인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그 분노를 갚아준다고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알고 있으면서도 화가 나기 때문에 주체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반드시 알아야 한다. 회복과 처벌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상처받은 마음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 회복해야 한다. 그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위험한 일이다. 폭력의 근원도, 폭력의 사슬도 결국 "회복"의 결여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많은 학교들이 학교폭력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을 넘어 피해자를 회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운영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회복적 생활 교육"이 그 과정 중 하나이다. 진정한 폭력의 예방과 해결은 피해자의 완전한 치유를 거쳐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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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공연사진


만약 데이비의 상처를 알란이 진작에 안아줬다면, 폴의 아픈 마음을 폴의 아버지가 달래줬다면, 알란의 아들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더 나은 방법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많은 것들을 끊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사건 자체를 놓고 보면 잘잘못만 따지면 그만, 잘못한 사람 벌주고 끝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킬롤로지>에서 볼 수 있듯, 사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처 안 받고 사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받은 상처를 전부 회복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속에서 곪아가는 상처들이 언제 어떻게 자신을, 타인을 아프게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회복하는 법을 배우면 좋겠다. 모두에게 회복할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늦지 않게,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더는 폭력이 반복되지 않게, 아픔을 치유할 길이 열리면 좋겠다. 그게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킬롤로지>의 사건과 비슷한 형태의 폭력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크고 작게 일어나고 있다. 알란이 정신 병동에서 들었던 말처럼, 슬픔을 벗어나기 위해 분노와 비난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정말 필요한 것은,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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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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