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의 흐름을 고민하며 위로를 얻다. - ‘안녕, 푸 展’

곰돌이 푸와 함께한 반성문. 스포없음주의.
글 입력 2019.09.10 23:0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e6a68cd9b35104f31d3e053366cc56a6_aVxe4fnlaOCB6hWT3C.jpg
 


스포‘없음’주의

 

1) 본 리뷰는 반성문입니다. 전시회의 컨텐츠와 관련된 구체적인 스포일러가 부족합니다.

2) 일부러 전시회에서 촬영한 사진을 아무것도 첨부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전시회에 갑시다!

3) 전시회를 다녀오셨던 분들이 읽으시기에 적합한 글일 수 있습니다.

4) 컨셉 맞습니다.



 

1. 삶의 흐름


 

산다는 건 무엇일까.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걷고 있었는지 그 근원조차 살피기 힘듦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길을 걸어간다. 때로는 내가 걷는 이 길이 어떤 길인지도 알 수가 없다. 길의 최종적인 종착지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단기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우리 자신이 이루고 싶은 목표를 세울 순 있으나 궁극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과정을 수행하기란 굉장히 어렵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취급될 때도 있다. 뭐 그렇게 철학적(?)으로 파고들어 가냐는 말과 함께.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지만 그 흐름 속에서 뚜렷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흘러감’에 편승하는 상황. 이러한 상황들의 연속이 삶이라는 덩어리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우리는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 중 가운데 몇 가지를 떠올릴 수 있으나, 이들을 물리적으로 분리하진 못한다. 못할뿐더러 불가능하다. 삶에서 특정한 부분을 떼어놓는다면, 지금의 나를 나로 있게 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소설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우는 게 습관이었던 지난 시절의 나를 분리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여전히 손에서 소설이나 에세이를 떼놓지 못하는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사고 체계에 동반하는 철학적 사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혹은 자신이 선호하는 인문학적 가치관이 무엇이냐에 따라 개인이 생각하는 방식도 천차만별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삶은 [연속적인 흐름]이다. 어떤 특정한 순간, 기억만을 분리할 수 없는 총체적인 덩어리이다.



ei_11492.jpg
 


 

2. 유년 시절의 기억이 주는 영향에 관한 소고


 

결국 내 말은, 인간의 삶을 ‘과거 – 현재 – 미래’와 같은 시간의 단편적인 형태로 분리하기 아쉽다는 뜻이다. 삶이 수많은 흘러감으로 이루어진 연속적인 흐름이라면, 우리의 시간개념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에드문트 후썰은 시간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보통 에드문트 ‘후설’이라고 많이들 부른다. 그런데 지난 학기에 현상학을 강의하셨던 우리학교 철학과 모 교수님께서는, 후설이 아니라 후‘썰’이 정확한 발음이라며 거듭 강조하셨다.)

 


파지 (지나간 현재를 여전히 붙잡고 있는 상태)

근원인상 (계속해서 새롭게 생겨나는 현재)

예지 (앞으로 닥칠 현재들을 미리 붙잡는 상태)


 

무슨 전시회 리뷰에 철학 사상을 가져오냐, 고 물어보면 그냥 이번 리뷰 글은 이렇게 써 보고 싶어서 그랬다는 답변밖에 내놓을 수 없다. 그래도 나름대로 중요한 이야기이다. 유년 시절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소 철학적으로 풀어내며 곰돌이 푸를 데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다. 각각의 단어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떠올리는 ‘과거 – 현재 – 미래’를 지칭한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다만 통상적인 개념과 뚜렷하게 다른 점은 ‘현재’라는 시야를 어디까지 확장하는 지에서 비롯된다. 원래의 시간 개념이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시간들을 분절적으로 인식하는 반면 후썰의 시간 개념은 지나간 시간, 지금 이 순간,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현재’라는 관점에서 인식한다는 차이가 있다. 과거는 지나가버린 현재, 현재는 계속해서 또 다른 현재가 만들어지는 현재,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지만 언젠가 다가올 것인 현재. 내가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후썰 역시도 인간의 삶을 연속적인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했다.

 

우리가 여기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용어는 ‘파지’이다. 지금 우리 자신이 직면하는 현재는 아니지만 분명히 우리가 직면했었던, 그런 순간. 새로운 현재를 직면하는 우리들을 있게 해주는 ‘지나간 현재.’ 우리에게 분명히 지나간 현재들에서 존재했지만 우리는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이미 지나간 현재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분리하여, 마치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하듯 그 순간을 재생할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몰아치는 새로운 현재를 숨 가쁘게 맞이해야 한다. 비슷한 순간이 찾아올 순 있어도 그때와 같이 동일한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우리가 그리움이나 향수를 느끼는 이유가 아닐까.



곰돌이푸.jpg
 


그리움과 향수를 유발하는 순간들 중에, 그러니까 지나간 현재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년 시절의 우리들이다. 지금은 열렬하게 좋아하지 않아도, 흘러가버린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좋아했던 모든 것. 그들을 향한 “순수한” 애정으로 가득 찼던 유년기의 순간. 사람들은 유년기를 언급할 때 순수라는 말이 붙은 단어나 형용사를 즐겨 쓴다. 어쩌면 그때처럼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것 같기에, 이를 순수함이라는 공간에 묶어두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대상은 주로 어렸을 적 우리가 좋아했던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 속 인물이다. 무던히 현재를 받아들이다가도 자신의 유년 시절을 꽉 채웠던 캐릭터를 마주치면,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반가움과 그리움에 파묻히곤 한다.

 

곰돌이 푸도 그런 캐릭터 중에 하나다. 오늘날 애니메이션 푸에 등장했던 대사들과 장면들은 책으로 다시 만들어져 출간되거나, 여러 미디어 컨텐츠에 인용되며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푸만큼 순수하고 귀여우면서, 어른들에게 따뜻한 조언을 해 주는 캐릭터도 없다’는 느낌으로.



6.jpg
 


 

3. 전시회에서 마주한, 현재에 대한 확신. 그리고 반성.


 

일전 프리뷰 글에서, 대체 본질은 노란 곰돌이일 뿐인 이 캐릭터가 왜 그렇게도 상업적으로 꾸준히 등장하는지. 삐뚤게 바라본 기억이 있다. 전시회에 가기 직전까지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드로잉을 위한 영감이나 얻으러 가자 싶었던 반항심은 전시장에 입장하고 난 뒤, 전시회를 천천히 둘러보는 과정에서 놀랍게도 가라앉았다. 나는 어렸을 적 이 곰돌이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에 푹 빠졌던 순간도 없었는데 푸가 건네주는 기억의 조각 속으로 순순히 걸어 들어갔다. 입장할 때부터 느낌이 왔듯, 관람 순서는 예상대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구조였다. 총 5관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생각보다 전시장의 규모가 커서 신기했다. 그리고 초기 스케치 위주로 구성되어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독특한 분위기의 영상들과 깜찍한 설치물, 기발한 포토존들이 많이 있었다. 전시의 구성이 참 다채롭다고 생각했다. 대략 두 시간을 전시장에서 보냈다.

 


“크리스토퍼 로빈은 19 곱하기 2가 얼마인가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심드렁하게 숲에서 다리로 내려오고 있었어.” -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제일 좋아하는 소년 


“곰돌이 푸는 래빗네 놀러가는 것을 즐깁니다. 특히 아침 11시쯤 무언가 한 입 가득 물고 싶어서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 푸는 꿀을 너무 많이 먹어버려서 나가는 길에 래빗네 앞문에 몸이 꽉 끼고 말았네요. 해야 할 건 하나뿐, 푸는 살이 빠질 때까지, 한 주 내내 굶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도 푸의 친구들은 그를 격려하고 또 응원해 줍니다. 래빗이 푸의 뒷다리를 수건걸이로 쓰고 있는 동안에도 밖에 서는 로빈이 푸에게 ‘살아남기 책’을 읽어주네요. 어딘가 꽉 낀 장소에서 곤란을 겪고 있을 때 당신을 도와줄 사람이 누구인가요?” - ‘격려’라는 키워드와 함께 소개된 글.


 

나는 인류애가 많은 사람이 아니다. 지난 프리뷰가 모든 프리뷰/리뷰 글을 통틀어 가장 비판적이었던 이유는, 곰돌이 푸의 ‘따뜻한’ 이미지가 싫었기 때문도 크다. 그런 건 현실의 삶과 동떨어져있다고 생각했고, 전시회에 다녀온 지금도 그 생각 자체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시를 관람하면서 반성했던 부분은 오히려 나야말로 곰돌이 푸를 편협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상업적인 가치가 뚜렷한 캐릭터라는 틀 안에 푸를 가두었던 것이다. 그때 그 시절의 순수함을 외치면서 푸를 찾는 사람들이 어딘가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저런 작품의 대사들로부터 위로받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단지 돌아오지 않을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기억에 갇혀 있는 것은 현실 도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렇게 삐뚤어진 사고방식으로 캐릭터를 학대할 수 있었을까.

 

예상했던 것처럼 전시장에 나타난 푸의 이야기들은, 내가 프리뷰를 기고할 때도 수십 번 봤었던 특유의 따뜻한 문구들로 가득했다. 애니메이션 속 인물들의 대사들 뿐 아니라, 내러티브형 대사들도 많았다. 원작자의 가벼운 스케치 그림에 대사들이 덧붙여진 채 전시장 곳곳을 메우고 있었다. 그중에서 유난히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들을 바로 위에 적어두었다.

 

왜 굳이 저 대사들이었을까? 첫 번째 대사는 잉여로움 자체를 표현한 것 같아서 좋았다. 바쁜 일상을 견뎌내다 보면 잠깐의 잉여는 죄책감까지 들게 한다. 곰돌이 푸 특유의 ‘나른함’을 상징하는 대사라고도 생각했다.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휴식이 게으름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는가.

 

나는 곰돌이 푸를 대표하는 순수함과 나른함의 이미지가, 현재의 내가 누려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첫 번째 대사를 보면서 내가 오만함에 빠져있다는 걸 알았다. 잉여롭다는 표현은 주로 무언가를 추가적으로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나, 스스로가 그러한 환경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현실을 도피한다는 개념이 아니었던 거다. 타의든 자의든 간에,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제가 기본적으로 내재된 상황인 거다. 이때 개입하는 부정적인 가치 판단은 순전히 자신의 주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었던가.



69378937_2288268848169828_1597784084733683715_n.jpg
 

  

두 번째 대사는 마이웨이를 삶의 근본 중 하나로 채택한 나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나는 굉장히 좁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만나고 싶은 몇 사람을 제외하곤 약속을 잘 잡지도 않고, 그렇게 잡은 약속마저도 잘 펑크를 낸다. 이건 분명히 고쳐야 할 점이고 나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은연중에 이를 자랑스러워(!) 했다. 스스로를 사람을 만나지 않고 내 일만 해도 벅찬, 그렇게 일을 해서 얻는 보람으로 삶을 살아가는 ‘독립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다. ‘자발적인 아싸’라는 표현을 쓰면 지금껏 나를 정체화 해온 작업이 어떤 것인지 더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물론 지금도 이런 가치관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근본적인 무언가가 바뀌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반성의 여지는 분명히 체감했다. 생각해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상황이 호전되는 경우가 많았다. 시도 때도 없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면,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수준이 아니라면. 타인의 손길을 빌려 조금 더 쉽게 걸어갈 수도 있는 거였다. 이걸 인정하기가 싫어서 일부러 더 마이웨이인 척, 강단 있고 독립적인 사람인 척 스스로의 외면을 통제하곤 했다.

 


2019071953471338.jpg
 

 

곰돌이 푸가 이야기하는 순수함은 이런 층위였을 거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 자신이, 앞으로 다가올 현재들을 받아들일 나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나간 현재로부터 발견하라는 뜻이었을 거다. 내가 마주하는 현실로부터, 유년기의 나 자신이 좋아했던 캐릭터를 소환해서 도피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이것은 서두에서 내가 밝혔듯, 삶을 구성하는 시간을 지나치게 단편적으로 해석한 결과일지 모른다. 그리고 여태껏 내가 그 편협함에 빠져왔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지는 삶에서, 지나간 현재였던 파지들 중 하나를, 찰나 동안일 지라도 강하게 붙잡아 그 순간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 그럼으로써 나의 삶을 연속적으로 구성하는 흐름이 계속해서 흘러가는 중임을 확신하는 것. 이러한 확신을 얻는 동시에,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나의 편협한 시선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것. 푸가 나에게 건네준 따뜻함과 순수함은 이런 이야기였다. 원래의 나라면 지난 학기에 배웠던 내용들은 모두 까먹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 전시회를 다녀와서, 현상학 레포트를 뒤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면서 격세지감을 느꼈다.

 

처음으로 ‘반성문’의 형태로 글을 써 보았다. 나름의 도전이다. 반성문에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올리는 건... 체험활동 보고서를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서, 처음으로 내 사진을 넣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시회를 다녀오신 분들은, 굳이 사진을 첨부하지 않아도 내가 전시장의 어느 시점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아실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아직 전시회를 가지 않은 분들에게도, 어쩌면 나와 비슷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도 이 전시회가 긍정적으로 다가갈 거라는 기대를 품어 본다.




실무진 명함.jpg
 



[이소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아트인사이트 (ART insight)
E-Mail : artinsight@naver.com    |    등록번호 : 경기 자 60044    |    발행인/기사배열책임자 : 박형주
Copyright ⓒ 2013-2019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