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만남과 만남을 진실되게 하는 찻집, 시인과 농부 [문화 공간]

만남과 만남을 진실되게 하는 곳
글 입력 2019.09.07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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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처음 알게 된 건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당시 나는 영화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영화관에는 또래의 아르바이트생들이 많지만 일하는 시간대가 맞지 않으면 이름만 알게 되거나 얼굴만 아는 정도가 부지기수였다.

Y에 대해서는 S에게 많이 전해 들었다. S는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며 우리 셋은 모두 같은 영화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S가 Y와 일하고 난 뒤 나와 만나는 날이면, 꼭 Y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와 Y가 많이 닮았다고 했다.

S는 Y에게도 나에 대해 이야기했고, Y가 나를 궁금해했다. 타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나도 Y가 궁금했다. 나는 당시 행궁동에 우후죽순 생기는 수많은 NEW CAFE! 들의 새로운 분위기에 매혹되어 생기는 곳곳마다 책 하나를 들고 몇 시간이고 앉아 있곤 했다.

그날도 책이나 펼쳐놓고 있던 중에 S에게 전화가 와서 Y와 있는데, 올 생각 있냐는 제안을 받고 평소 같았으면 낯이란 낯은 다 가리는 내 성격에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어쩐지 그냥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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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팔달문 근처의 찻집 시인과 농부


다정한 S가 친히 찍어준 주소를 따라 도착하니 골목 사이에 시인과 농부가 있었다. 어? 일주일 전에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 나온 그 찻집이었다. 틀림없었다. 분위기가 독특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운명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는 이곳에 들어와서 문을 닫자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고요했다. 창문 하나 없는 이곳은 그 때문인지 시간이 멈춘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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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와 처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지만 어쩐지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의 속을 나눈 듯 묘한 동질감까지 갖고 있었다. Y는 쇼트커트에 핏기가 돌지 않는 것 같은 하얀 피부, 그에 대비되어 더욱 까만 눈썹과 커다란 눈을 덮는 긴 속눈썹은 나와 닮았다기보다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S가 닮았다고 한뜻을 점차 알게 되었다. Y와는 마음의 결이 닮아 있었다.

나는 Y와 처음 만난 자리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쌓여있는 책들 중 시집 하나를 골라 주르륵하고 펼쳐 나온 시를 Y의 시라고 말해주고는 시까지 냉큼 읽어주는 부끄러운 행동을 저질렀다. Y는 시가 좋다며 사진을 찍어갔다. 어떻게 첫 만남부터 나는 Y에게 손발이 오그라들 법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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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겨울을 사는 법>


시인과 농부는 그런 곳이다. 만남과 만남을 진실되게 하는 곳. 시간과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진심을 말하게 하는 곳.



1. 메뉴


찻집인 관계로 다양한 종류의 차들을 많이 판다. 오미자, 쑥차, 모과, 수정과, 생강차, 대추차 등 모두 숙성시키고, 손수 끓이는 차이다. 가격은 7~9천원 대를 오간다. 그중 가장 많이 마신 건 감주이다. 식혜를 감주라고 부른다는 것을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감주는 도자 그릇에 한 대접 나온다. 살얼음이 동동 떠있는 달달한 감주는 어떤 차를 시키던 같이 내 주시는 찐 감자와 먹으면 제맛이다. 이곳의 찐 감자는 여태껏 먹던 포슬포슬한 감자와는 또 다른 맛인데, 쫀득한 식감에 소금 없이 먹어도 짭짤한 맛이다. 언제나 푸짐하게 내주시는 차와 찐 감자는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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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얼음과 밥풀이 동동 떠 있는 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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쫀득한 식감의 찐 감자



2. 취향 가득한 공간


공간 곳곳 주인장의 29년간의 지난 취향이 묻어 있다. 최근 들어 유행하는 레트로 느낌을 낸 공간이 아니라 이곳은 솔직한 세월들이 쌓여있다. 벽면에는 영화, 연극, 전시, 공연 포스터가 잔뜩 붙어있다. 아마 이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물했을 것 같은 그림들도 있다.

꽉 차있는 책꽂이가 모자란 듯 책꽂이 앞에, 위에 옆에 책들이 쌓여 있다. 오직 한자만으로 된 옛날 책들도 있고, 철학, 음악, 미술, 소설, 비문학, 시 등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책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시집은 갈 때마다 꼭 하나씩 읽어 본다. 그 덕에 좋은 시 하나씩을 마음에 담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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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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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넘치게 쌓여있는 책들


고즈넉한 절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오래전 익산의 외할머니네 집 특유의 편안하고 고요한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주인과 주인의 취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득 채운 공간은 가득 차있지만 하나도 정신없지 않다. 오히려 그것들이 내 마음의 사악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몰아내고 내 안을 가득 채운다.

1년 전, 처음 이곳에서 만나게 된 Y와는 1년 동안 여러 곳에서 추억을 쌓았다. 그리고 우리 둘을 이어 준 곳을 1년 만에 방문했다. 가게 앞엔 여전히 계절에 맞는 꽃들이 잔뜩 피어있었다. 감주와 모과 차를 시켰다. 숙성되어 있다가 4년 6개월 만에 꺼내진 모과라고 했다.

Y는 최근 오래 동굴 속에 들어가 있었다. 동굴 속에서 Y를, 어느 항아리 속에서 모과를 꺼내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은 시간과 공기의 흐름을 받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주인장의 취향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것 같다. 나는 고요가 보장되어 있는 이곳에서 친구를 꺼내고 나를 꺼내고 모과를 꺼내고 그렇게 이곳은 오래오래 도피처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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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에 놓인 생생한 꽃과
모과차, 감주, 찐 감자


식탁 위의 꽃은 항상 생생하다. 꽃이 생생하다는 것은 잊지 않고 물을 준다는 것. 모든 차들이 수제라는 것은 매일 차를 끓이고, 과일과 잎을 고른다는 것. 감자의 쫀득함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신경 쓴다는 것. 많은 것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신경 쓸 게 많아지는 것이기도 하다.

들여놓기 전에 항상 그것을 생각하고 그럼에도 자꾸자꾸 들여놓는 것을 잃지 않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들여놓은 후에는 신경쓰는 내가 됐으면 좋겠다. 많은 것들을 오래오래 깊이 좋아하고 나의 공간을 그런 것들로 채우고, 또 취향과 마음의 결이 비슷한 사람들이 나와 내 공간을 찾았으면 좋겠다. 나도 찐 감자와 직접 만든 차 비스름하게 정성 들여 내어 놓을 수 있는 나만의 요리 기술을 연마해야겠다.


* 시인과 농부라는 이름은 시인과 농부의 진실한 마음으로 찻집을 하고 싶어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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