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있다'와 '없다'의 중간의 현재진행형 - "지금 여기, 마임"

글 입력 2019.08.31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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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를 쓰기 전까지, 필자는 마임 공연에서 느낀 감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졌었다. 마임 공연은 서사를 과장된 몸짓과 표정으로 표현한다. 각 표현은 과장되었지만, 소품과 대사보다는 더 간접적으로 표현하기에 관객들에게 더 많은 주의를 요구한다. 마임의 서사는 복잡하지 않았고, 그리 길지도 않았다.


필자가 감상한 마임 공연은 서사 전달 자체가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서사가 중요하지 않다기보다는, 서사라는 주제 아래에서 몸을 움직이는 그 '과정 자체'가 마임의 정수처럼 느껴졌다. 와 닿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공연을 감상하는 것이 수채화를 그리는 기분이라면, 마임을 감상하는 것은 손으로 찰흙으로 작품을 만드는 기분이었다.


감상문을 적을 때, 일반적인 공연은 붓과 같은 뚜렷한 도구(대사, 더 직접적으로는 내레이션)를 사용한다. 이와 비교해, 마임의 감상문을 적는 지금은 상대적으로 퇴행적인 표현 방식을 통해 본능적인 무언가를 자극하는 것 같다. 다섯 명이 등장하는 마임 공연에서는 그 누구도 직접적인 대사를 하지 않는다.


당시 특별 출현했던 우진규 아티스트의 <있다! 없다!>에 대사가 등장하긴 하지만, 상호작용적인 일반적인 대사와 달리 논리적인 맥락 없이 분절되고 내질러질 뿐이다. 마임에는 원시인이 감성을 느끼고 표현하던 수단만이 존재할 뿐이다.


마임의 아름다움은, 그 이름처럼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필자는 마임 공연의 감상문이 기본적으로 영문법의 '현재 완료'형에 기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감상한 마임은 '그때, 그 장소'에 있다. 미세한 얼굴과 표정 움직임에 주의력을 기울여야 하는 그때, 그렇게 해서야 느낄 수 있는 움직임 자체의 감동에 있다. 그때 그곳에서 몸이 움직였다. 마임 공연은 끝났지만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우리의 삶이 결코 멈추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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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마임>은 마임이라는 표현 방식이 현재 완료로 존재하는 것처럼, 각 마임 아티스트의 공연들은 모두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고재경의 <여정>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노랗게 빛나는 삶의 희망과 행복에 대해서 표현했다. 노란 꽃을 향해서 웃고, 우산을 씌워주고 삶을 다시 재단 장한 몸짓은 마음이 저릿할 정도로 우리와 닮아 있다. 우리 삶에서는 꼭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무언가를 위해 달려가는 존재기 때문이다.


필자는 왜인지 모르게 이 마임에서 계속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다. 심지어 이 짧디 짧은 마임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감상한 나에게 건네진 대답과도 같았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고와 디디는 길고 고통으로 가득 차있는 삶에서 무료함과 절망을 느끼지만, <여정>의 주인공은 고통에 찬 삶을 무언가에 대한 사랑과 웃음으로 채운다.


꽃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그에게 인생은 길지 않으며, 심지어 무료하고 슬프지 않다. 마임이라는 표현 방식이 그런 것처럼, 삶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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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맥락에서 유흥영 아티스트의 <2019 꿈에~>도 필자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유흥영 아티스트가 표현하는 주인공도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내달린다. 그는 대한민국 40~50대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 끊임없이 가족을 위해 일한다. 표현방식은 우스꽝스러웠지만 필자는 연극 내내 결코 웃을 수 없었다.


가족에게 헌신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충만하고 감동적이지만, 휴지를 끊임없이 꺼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한낱 한 인간의 몸으로 모든 것을 소비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휴지를 꺼낸 주인공은 이리저리 휴지를 흔든다. 극장에서 전달받은 브로셔에서는 일종의 살풀이처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희생'이라는 주제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숱하게 반복되어왔지만, 이번 마임에서는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 인간으로 모든 것을 소비하듯이 쏟아붓는 아버지의 모습은 <여정>의 주인공과는 다르게 비극적으로 다가왔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움직임 중에서, 가장 마음 찢어지게 다가왔다.


최정산 아티스트의 <마당을 쓸다가>, <지구별 여행>은 마임을 통해 좀 더 극적인 감동을 준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마당을 쓸다가>는 한때 아버지가 이야기 해준 원숭이 잡는 법을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는 입구가 좁은 항아리에 먹을 것을 넣어두면 원숭이가 잡힌다고 했다. 먹이를 쥐고 올라오는 손의 부피 때문에 손을 뺄 수 없어 잡힌다는 것이다.


주인공도 마당을 쓸면서 동전을 줍고, 그러다가 땅을 파고 들어가 일확천금하는 꿈을 꾼다. 결국 주인공은 그 꿈을 이루는데 실패한다. 이 모든 과정이 마임으로 표현되고, 다시 주인공은 마당을 쓸면서 퇴장한다. 주인공이 이 모든 과정을 마임으로 표현한 것이 이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이다. 돈이 있다고 몸짓을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없다. 우리의 꿈이 본질적으로는 공허한 것처럼 말이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최정산 아티스트의 이야기일까, <지구별 여행>은 이와 다르게 불시착한 외계인은 마침내 사랑을 깨닫게 되고 우주선을 고쳐 고향으로 돌아간다. 최정산 아티스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결국 사랑이었던 것 같다. 이와 맞닿은 주제를 표현한 것이 류성국 아티스트의 <사진>이다. 조명을 페이드인, 페이드 아웃을 함으로써 사진의 추억에 들어가고 나오는 모습은 마임의 표현방식을 좀 더 확장시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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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출연으로 감상하게 된 유진규 아티스트의 <있다! 없다!>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시기에 감상하게 되었다. 얼마 전 필자가 16년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다. 강아지는 며칠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싸늘한 주검이 되어서 필자에게 안겨 장례식장으로 운송되었다. 그래도 강아지의 마지막 순간이 가장 사랑하던 어머니의 품에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고, 장례를 치르기 전에 강아지의 시체를 안고 갈 수 있는 것이 감사했다.


유진규 아티스트는 현실에 존재하는 죽음에 대해 퍽 단순한 이야기를 내린다. 있다가 없는 것이 죽음이고, 언제 올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성냥불을 켰다 끄면서 누군가 죽었을 때 그 누구도 웃고 욕하고 울지 않기를 기원한다. 필자는 그것이 장례식에서 초를 켜고 끄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결국 있다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강아지의 관에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필자도 모르게 '그곳에서는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재밌고 뛰놀면서 살아'라고 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제 동생은 절과 성당, 강아지가 죽은 병원까지 가서 기도를 하고 다녔다고 했다. 우리 집에는 아직도 강아지가 사용했던 도구들을 치우지 않았다. 아직 떠나지 않은 강아지 영혼이라도 있어서 그것을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필자는 아직도 종종 집에서 강아지가 뛰어다니는 소리를 듣고, 스스로도 모르게 집에 가서 강아지를 먼저 찾는다. 우진규 아티스트의 말대로 이제 강아지는 있다가 없어졌는데, 필자를 포함해 강아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강아지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천국의 어딘가, 하다못해 환생해서 세상의 어딘가에서 계속 있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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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진규 아티스트의 말이 맞다. 현실의 모든 생명은 있다가 없어진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고, 웃고, 욕하는 남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마임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가 있다가 없을지 모르지만, 지금 여기에 무언가는 존재한다. 실제적으로 존재하며, 움직임을 통해 있는 것처럼 표현할 수 있다. 기억한다면, 표현할 수 있다면, 현실에서는 몰라도 예술과 추상적인 모든 것들은 현재 진행형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도 있다. 마임이 그런 것처럼, 강아지도 그렇다.


그래서 이번 공연은 필자에게 좀 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우리의 삶은 있다가 없어지지만, 현재 진행형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그 순간 숨을 뱉고 움직이는 모습들은 현실에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


우리의 존재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 그렇다. 우리는 꽃을 향해 걸어감으로써 끔찍하게 길고 무료해서 더욱 끔찍한 삶을 이겨낼 수 있고, 사랑과 기억을 통해 지금을 만끽할 수 있다. 마임 아티스트의 동작들은 그래서 아직까지도 내 기억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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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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