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투명인간을 봐야하는 이유 [사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지워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글 입력 2019.08.1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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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세 개인 사람과 두 개인 사람이 있다. 둘 중에 이상한 사람은 어느 쪽일까.


미국에 교환학생을 갔을 때 일이다. 중국인, 한국인 교환학생은 원하는 전공을 선택해 듣는 수업을 제외하고도 영어 회화의 능숙 수준에 따라 작법 수업과 기초 문법 수업 등을 들어야 했다. 그중 작법 수업에서 분류법을 공부한 일이 있다. 분류법은 말 그대로 어떠한 공통점을 가지냐에 따라 크고 작게 분류를 할 수 있는 방식이다. 선생님의 설명이 끝나자 조를 짜 국가를 분류법으로 정리한 뒤, 조마다 어떤 분류법으로 정리했는지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조는 사용하는 언어로 분류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나온 언어는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이었고, 인터넷으로 검색 후 나온 언어가 힌디어, 아랍어 등이었다. 조의 친구들이 인터넷 검색하기 전에는 중동이나 아프리카, 인도 쪽 언어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어디서나 자주 접하고 볼 수 있는 선진국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툭 튀어나오는데, 비교적 알기 어렵거나 보기 힘든 국가의 언어는 검색해야만 알 수 있는 게 흥미로웠다.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인도인과 체코인 친구를 사귀게 되어 하루 동안 같이 여행을 다녔다. 서로의 국가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대화는 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도인 친구가 인도에서는 찰지지 않은 쌀을 먹고, 자신은 그 쌀이 더 좋다고 말했다. 체코인 친구도 동의했다. 의아해할 때쯤 친구가 말했다. 이건 그냥 취향 차이이지만, 자신은 찰진 쌀이 맛이 없다고. 나는 당연히 찰진 쌀이 좋은 쌀이며 퍼석하고 후 불면 날아가는 쌀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나 보다. 쌀마다 여러 가지 특징이 있고, 어떤 쌀을 더 좋아하는지는 취향이라는 말이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나의 무지를, 편견을 부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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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쌀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그저 좋아하는 쌀과 싫어하는 쌀만 있을 뿐이다. 학교에서 배운 통일벼는 맛이 없었다는 한 문장도 편견을 심어주긴 했으나, 한국에서 찰지지 않은 쌀은 보기 힘들고 익숙하지 않아서 우연히 먹게 되더라도 좋지 않은 쌀이라고 생각한 영향이 컸다. 쌀로 대화한 내용은 내가 아직 편견에 사로잡혀있다고 생각하게 했고, 왜 그런지 고민하게 했다. 나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내 주변에 자주 없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거나 쉽게 잊는다.


삶의 대부분이 그렇지 않나. 자주 보일수록 호감이 가고, 자주 보이지 않으면 무심해진다. 연예인이 티비나 인터넷 등의 매체에 자주 나오려고 하는 이유도 같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자주 보이지 않는 것을 차별한다. 그런데, 차별당하는 게 ‘자주 보이지 않는’ 그들의 잘못일까. 인도어나 힌디어, 아랍어를 쓰는 사람이 수업을 듣는 중국, 한국인 학생을 피해 다닌 적은 없다. 어쩌면 자주 보이지 않는 것보다 ‘자주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교환학생의 초기에 한국인 남성이 외국인과 룸메이트가 되고 싶다는 말했다. 그러면 더 빠르게 영어를 익힐 수 있을 거라고. 그러자 다른 사람이 외국인 룸메이트가 게이면 어쩌냐는 ‘농담’을 던졌고, 외국인 룸메이트를 희망하던 남성은 바로 그 말을 취소했다. 한국에서 성적 소수자가 얼마나 잘 지워지는지 알 수 있었다.


한국인은 ‘게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국인 룸메이트가 게이면 어쩌냐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고, 한국에서 성적 소수자의 존재가 지워지기 때문에 게이는 나와 다른 존재, 거리끼게 되며 내게 해를 끼칠 존재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 종종 ‘성 소수자가 있든 말든 상관없지만 내 주변에는 없으면 좋겠어.’ 혹은 ‘내 주변에는 성 소수자가 없어.’라는 말 역시 성 소수자를 지워버리는 발언이다. 주변에 번듯이 존재하는 성 소수자는 그 말에 당신 주변에 없는 존재가 되어, 본인을 드러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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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버스를 타고 먼 거리를 가는데, 한 곳에서 한참이나 쉬었던 일이 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봤더니 차체와 발판을 아래로 내리고, 장애인의 휠체어를 버스 위로 올리느라고 시간이 길어지는 거였다. 누구도 장애인에게 관심이 없었고, 지체되는 상황에도 불쾌함을 표하지 않았다.


유럽 거리 대부분은 장애인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계단이 많은 성이나 박물관에 따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몸이 불편한 사람도 갈 수 있었다. 미술관에서 시각 장애인을 위해 만질 수 있게 설치된 조각이 있던 것도 기억난다. 미술관의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시각 장애인이 조각을 만질 수 있도록 돕던 모습이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졌다. 한국에는 없었다. 한국에는 거리 어디를 가도 장애인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도 보기 힘든 것 같다.


한국은 지하철, 버스, 음식점, 일반 거리까지 장애인이 움직이기에 불편한 곳이 많다. 어떤 도로는 울퉁불퉁해서 휠체어가 가기 힘들고, 어떤 길은 점자블록조차 없어서 시각장애인이 위험에 노출된다. 가끔은 장애인이 왜 집에 있지 않고 나오냐는 욕설을 듣기도 한다. 한국 거리에서 장애인을 보기 힘들 뿐인데, 누군가는 한국에는 장애인이 별로 없는데 외국에는 참 많구나, 라는 말을 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 익숙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할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나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깨닫기 힘들기 때문이다.


건물이 청결하다고 청결을 유지하는 사람이 어디서 쉬는지, 언제 일하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하루 만에 도착하는 택배가 왜 그렇게 빨리 올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다. 건물은 마법으로 청결을 유지하고 택배는 워프를 타고 도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성 소수자는 영화에서나 나오는 것 같고 장애인이 거리에 없는 게 정상적으로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것이 정상이 되어버리면 그들이 나와서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민폐 같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보이지 않게 가리고 익숙하지 않게 막는 건 차별을 하는 우리다. 모든 차별의 시작은 그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나올 수 없게 만들어진 거리이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보이지 않아서 생각하지 않게 되고, 생각하지 않으니 또 보이지 않고, 다시 보이지 않으니 또 생각하지 않게 되고……. 그러나 첫 시작은 분명하다.


보이지 않는 것,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더러 왜 내 눈에 보이지 않느냐, 정체를 계속 드러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책임 회피다.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 거리에서 편하게 마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우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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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다수이자 소수이다. 어디에서는 익숙한 존재, 보이는 존재라도 다른 곳에서는 지워지는 존재, 투명 인간이 될 수 있다. 갑과 을이 완벽하게 분리된 일은 드물다.


눈이 세 개인 사람과 눈이 두 개인 사람 중에 이상한 사람은 어느 쪽일까. 눈이 세 개인 세상에 가면 눈이 두 개인 우리는 이상한 사람, 차별의 대상이 되지만 눈이 두 개인 나라에 눈이 세 개인 사람이 오면 그가 이상한 사람, 차별의 대상이 된다. 눈이 세 개인 사람과 두 개인 사람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눈의 몇 개가 있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순 없을까. 우리 모두 사람이고 생명이니까. 눈의 개수는 중요하지 않다. 우위도 없다. 찰진 쌀과 푸슬한 쌀처럼, 그저 다를 뿐이며 나아가 둘 다 쌀인 것처럼 사실, 완전히 똑같다. 이상한 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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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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