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타인이라는 우주 – 피프티 피플 [도서]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글 입력 2019.08.14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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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얼마나 여유가 없고 현실에 매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으면 저녁 여섯 시에 지하철을 타보면 안다. 어쩌다 한 번 만원지하철을 타면 내내 서있다 겨우 앉은 내 앞에서 노인이 눈치를 줘도 그냥 ‘에잇, 다음엔 퇴근시간 피해서 타야지.’하고 나빠진 기분을 쉽게 털어낼 수 있다. 그러나 사는 게 버겁고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에는 누군가 내 어깨만 부딪히고 지나가도 눈이 뒤집히고 입에서 험한 말이 자동으로 재생된다.


주변 모든 사람들의 삶이 납작하고 뾰족하게만 보이는 때에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고 말랑말랑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역시 사람과의 대화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감정을 건네 받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나 말고도 수많은 삶이 존재하고 저마다 그토록 제각각임에도 그 인생에 나와 비슷한 감정이 스쳐가고 비슷한 희망이 싹트기도 한다는 사실은 묘한 위로를 준다.




50개의 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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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은 한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50명의 사람들의 삶을 각자의 시점으로 풀어내 하나의 소설로 엮은 장편소설이다. (정확하게는 51명의 사람이 등장한다.) 무려 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이 소설은 다양한 화두를 오가며 생각할 거리를 던지고, 소설 속의 세계를 끊임 없이 넓혀간다.


조각 수가 많은 퍼즐을 맞추다가 <피프티 피플>을 구상하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치 퍼즐을 앞에 두고 맞추는 듯한 기분이 든다. 모든 조각이 서로 이어져 있어 한 조각을 들면 다른 조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퍼즐처럼 이 소설 역시 한 이야기를 들으면 머리에 자연스럽게 이전에 읽은 누군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름이 단번에 떠오르지 않으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 한참을 뒤적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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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하는 동안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50명의 얼굴이 아는 사람의 얼굴처럼 선명해졌습니다. 얼굴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세상이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잡아매는 것은 무심히 스치는 사람들을 잇는 느슨하고 투명한 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시작해 각자만의 방향으로 평행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교차하기도 하고 겹쳐지기도 하면서 이어진다. 작은 실이 엮이고 포개져 천이 되고, 작은 조각이 맞물려 하나의 그림이 되듯 이야기가 쌓일수록 공간이 구체적인 모양을 갖고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더 뚜렷해진다.

누군가의 이야기에서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어느 챕터에서는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은 흥미롭고 반가운 경험이다. 51명의 등장인물들에게 모두 구체적인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소설 속 세상과 인물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너무도 다양한 삶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이 다양함을 담기 위해 작가가 듣고 읽고 기억했을 수많은 실존인물들의 이야기가 눈 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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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게 간발의 차이였다. 그 ‘간발 차’의 감각이 윤나를 괴롭혔다. 자칫 했으면 이 팔들이, 살아 있는 팔들이 썩고 있을 뻔했다. 죽음은 너무 가깝다. 언제나 너무 가깝다.


- p. 103



책 속에는 가습기 살균제, 데이트폭력 범죄 등 소설이 출간된 2016년 당시의 이슈를 환기하는 여러 사건이 등장한다. 이런 소재들은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의미하게 읽히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윤나’가 말했듯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그러나 도처에 죽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가 오늘 그 곳을 피했으니 그거면 족하다는 식으로 이 ‘간발 차’의 감각을 잊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그 도둑 같은 불운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데, 간발의 차이로 살아남은 나는 운 나쁜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모른다는 이유로 간편하게 외면하고 쉽게 평화를 되찾는다.

소설은 등장인물들이 모여 있는 영화관에 불이 나고 모든 사람이 무사히 건물을 빠져나오는 사건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어느 동네의 화재 사건. 내가 이들을 모른다면 인터넷 뉴스로 몇 분 간 읽고 이내 잊어버렸을 허다한 이야기다. 뉴스만 틀면 쏟아져 나오는 숱한 사고들은 어쨌든 나의 일이 아니므로 사건의 심각성과 관계 없이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소설 속 각자의 삶을 꾸려가는 평범하고 특별한 51명의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삶의 조각을 잠시 들여다 본 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에게 닥친 불운을 그저 ‘남 일’로 치부하기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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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이라도 당신을 닮았기를, 당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옆자리의 퍼즐처럼 가까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남 일’이 아닌 이야기들, 나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퍼즐 조각들이 무뎌지고 있던 ‘간발 차’의 감각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후반부를 읽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애틋해 화재현장에서 모두가 무사하기를 기도하고 뒤로 물러서는 ‘이호’와 ‘계범’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고 싶었던 내 마음이 결국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결말을 쓴 작가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이름을 기억하고 표정을 떠올리는 일은 숫자로만 전달되는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력을 기르는 일이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야기로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보여준 정세랑 작가의 소설은 그 태도만으로도 어쩐지 나에게 위로가 된다.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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