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의 신앙 [도서]

『죽음과 죽어감』, 과정으로서의 삶을 긍정하는 일
글 입력 2019.08.1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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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는 단순했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를 보고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가 궁금해 K에게 물어본 것이 시작이었다. 성경을 읽어보고 싶은데 어떤 판본을 읽어야 할지, 라자로가 나오는 부분은 요한복음인데 그것만 읽어도 상관없는지 묻는 나에게 K는 성경을 함께 읽어보자고 했다.


나는 신에 대해 자주 궁금해했다. 신의 존재에 대해, 신을 믿는 일에 대해 고민하던 시간이 있었다. 어떤 때는 앞뒤 따지지 않고 신을 믿어보고 싶다가도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신에 관한 것들을 잊어버렸다. 믿고 싶었던 때를 생각해보면 세상에 대한 환멸이 가득한 시기였다. 세상이 이렇게 비정상적인데 보이지 않는 것, 초월적인 무언가를 믿지 않고서 살아간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신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데에는 K와 H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함께 이야기 나눌 때, 특히 우리가 슬플 때, 서로의 슬픔 때문에 울음이 터질 때, K와 H는 하나님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게 너무도 자연스럽고 따뜻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마음에 새겨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을 믿는 그들과 함께할 때면 나는 잠시나마 세상과 분리된 듯한 행복을, 충만함을 느꼈고, 신과 함께 하는 삶은 어떨까 자주 상상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바로 믿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계속 질문했고, 궁금해했다. 그래서 파스칼의 『팡세』를 펼쳤고, 움베르토 에코와 마르티니 추기경의 서한집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읽었다. 그 안에서 이렇다 할 답, 아니 어떤 작은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나는 또 한동안 신에 대해 잊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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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올겨울, 책모임을 통해 접한 한 권의 책에서 I 수녀를 만났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감』은 시한부 환자들을 인터뷰한 자료를 바탕으로 죽음에 대해 연구한 책이다. 구체적으로는 환자들의 심리적 변화와 그것이 보여주는 통찰, 요컨대 존엄한 죽음은 어떻게 가능한지, 또 삶이란 우리에게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엘리자베스 박사는 환자들의 심리 변화를 '부정과 고립-분노-우울-협상-수용'의 다섯 단계로 정리했다. 이중 '분노'의 단계를 설명하는 장에서 I 수녀의 사례가 나온다.


I 수녀는 인터뷰를 통해 그가 가진 여러 차원의 신념을 역설한다. 신에 대해, 사랑에 대해, 자신이 살아온 삶과 어떤 선택들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을 쏟아낸다. 그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 후 비로소 종교를 찾았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믿음은 이미 만들어진, 남의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결과였다면, 죽음을 직면한 이후에 진정한 신앙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 I 수녀는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성향을 긍정하게 되었으며,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꼈고, 그가 추구해온 인생의 지향점에 다다른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는 그것이 죽음을 앞둔 지금에 와서 이루어진 것을 원망스러워하지 않는다. 그 과정 자체에, 그것을 알고 느끼게 된 현재에 살아있음을 느낄 뿐이다.


그는 섣부르게 절망하거나,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았다. 적어도 책에 담긴 기록 안에서는 단 한 번도 자포자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도 환자로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이것은 어쩌면 그에게 죽음이 모든 것의 끝, 세상의 종말이 아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끝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믿는 자는 모든 일의 과정에 놓인 현재를 긍정할 수 없다.



"그 아름다운 사진들을보면서 환자들이 하나님까지는 아니더라도 삶과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잖아요. 사실 전 자연에서신의 존재를 느끼거든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가이 세상의 일부임을 깨닫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거죠."  - p.118, 『죽음과 죽어감』



I 수녀는 자연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느낀다고 말했다. 내가 가장 크게 공감한 대목이었다. 자연은 우리가 살아있음을 상기시키고 희망을 불어넣는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좌절한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신이 있다면, 그 신이 인간을 위해 무언가를 행한다면 그것은 자연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를 통해 원하든 원치 않든 자꾸만 희망을 선물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신은 굳이 애써 떠올리고, 찾으려 하지 않아도 우리 곁에 자리한다.


거기까지가 신에 대한 내 사유의 결론이었다. 자연에서 느끼는 신의 존재. 나는 이 추상적인 믿음에 꽤 자주 기대왔다. 그러나 그 신이 특정 종교의 형태를 띨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종교를 갖고, 신과 함께 하는 삶은 나에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마음 한 켠으로는 종교를 갖는 것이 나의 나약함을, 굳건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런 마음을 갖고 성경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고 매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성경을 읽으며 새삼 알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죄는 오로지 성령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다. 성경의 세계관 안에서 인간은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태생적인 결함을 가진 존재였다.


성경에 나타난 인간은 지나치게 편협하고, 한없이 나약한 한 존재, 보아도 믿지 못하고, 도무지 확신을 갖지 못하는 존재였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 의문을 품다가도 이내 공감했다. 계속 흔들리고, 의심하고, 믿음을 져버리는 인간의 나약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나약함 앞에 우리는 모두 평등했다.


성경을 읽고, 밑줄 친 구절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아직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남겨둔 채 일상으로 돌아오면 어딘가 살아갈 힘이 생겨났다. 여전히 신을 믿지 않는 나의 성경 공부는 지친 나에게 활력이 되어 주고, 과정으로서의 지난한 삶을 이어가게 해주는 듯했다.


그저 궁금하고, 한없이 의심스러웠던 신의 존재가 점차 내 삶의 일부가 되어감을 느낀다. 누군가의 삶을 담아낸 책을 통해, 제각기 다른 형태의 믿음을 갖고 시작한 성경 공부를 통해, 그 고민과 나눔의 시간을 통해 어느새 나의 신앙은 시작되었다.



[김주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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