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대론의 공허함 - 장강명 "알바생 자르기" [도서]

글 입력 2019.07.2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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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생 자르기>가 수록된 장강명의 <산 자들>


 

자기 나름의 세대론을 전개하는 작가라는 차원에서 그의 작품을 이해했다. <표백>은 청년 세대가 거대한 규모의 ‘백색’ 세계에 색깔을 칠하려 시도하지만 견고한 흰색에 의해 무산된다고 말한다. 청년 세대의 혁명과 투쟁은 모두 ‘표백’된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표백 세대’다.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 사회에서 적응할 수 없음을 감각한 청년이 외국에서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댓글 부대>는 청년들이 현실의 무력감과 박탈감을 온라인 공간에서 어떻게 배설하는지 언급한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악용되고 있는지 묘사한다.

 

장르 소설 이외에 그는 청년 문제를 환기한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표백>,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가 결국 다루고자 하는 건 지금의 사회현실을 청년 세대가 어떻게 대면하고 있는지 일 테다. 이 중에 청년문제를 직접적으로 집약한 작품은 <표백>이다.


작금의 청년 세대가 상상할 수 있는 성취는 세속적 차원엔 머물러 있다. 과거의 청년세대가 민주화를 쟁취하고, 유신정권을 타도하는 구조적 변화의 주체였다면, 지금의 청년세대가 상상할 수 있는 성취의 최대는 대기업에 취업하고, 창업하여 성공하고, 또다시 다른 학교에 얼마나 우수한 성적으로 진입하느냐 정도다. 그는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다. 청년이 다시 정치적 주체가 돼야 함을 역설한다.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비슷한 진단을 내린 기성세대는 꽤 있었다. 전 정책실장이었던 장하성은 <왜 분노해야 하는가>를 저술했다. 수치와 통계, 각각의 지표로 지금의 현실이 위태롭다고 말한다. 이만큼 어렵고 힘든 것, 인지한다, 그러나 청년 세대가 이만큼 어렵고 힘든 데엔 구조적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년 세대는 각성해야 한다. 분노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선거 때마다 소환되는 ‘20대 개새끼론’도 마찬가지다. 20대는 모든 연령대에서 투표율이 제일 낮다. 청년 세대가 사회현실에 관심이 없고,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가 부족해서 투표하지 않는다는 맥락이다. 거기서 청년은 계몽의 대상 정도로 간주된다.


이 담론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하나의 맥락은 왜 각성하지 않느냐다. 어려운 거 알겠다만,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분노하고 계몽해야 한다는 셈이다. 설득력 있는 주장이지만 동의할 수 없다. 그것들엔 청년 세대가 왜 무력하고 세속적 성취에 연연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두 개 한다. 주 5일은 아르바이트를 한다. 학비, 생활비, 월세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5일씩, 두 개 정도는 해야 굶지 않겠다는 계산에 따라서 그렇게 한다. 나는 이 불안정성에서 벗어나고 싶다.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 이 궤도를 어떻게 수정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내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성취는 노동한 만큼 정당한 지급을 이행하고 노동 시간 동안 내 안전을 담보해주는 곳에 정착하는 거다. 거기서 뿌리를 내려 나 하나쯤은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그것이 꿈이다.


이는 나만의 꿈이 아니다. 세계에서 수면시간이 가장 짧고, 노동시간은 가장 긴 나라.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12.1%, 2백27만 명,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의 45.5%, 8백52만 명.(강준만,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인물과사상, 2016) 노동시장은 비정규직 위주로 재편되고 내 노동력에 온당한 값을 매기는 곳은 점점 줄어든다. 직접적 착취가 없는 곳, 악습을 조직문화라며 은폐하지 않는 곳, ‘나’라는 인간을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지탱해 줄만 한 곳.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몇백대 일에 육박하는 건 그래서다. 청년 모두가 비슷한 꿈을 갖고 있다. 생존하는 것. 자신을 책임지는 인간이 되는 것.


우리의 꿈은 시스템 개혁에의 의지보다 더 낮은 위계에 있는지. 거기 위계를 매길 수 있는지. 왜 각성하지 않느냐, 변화하지 않느냐는 진단은 생존 앞에서 무색해지는 문장이다. 우리는 우선 살아야겠다. 어느 것도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 형편이다. 구조를 바꾸고 시스템을 변화해야 한다는 자각도 생존이 담보돼야 할 수 있다.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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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상을 수상한 <알바생 자르기>


장강명의 <알바생 자르기>는 줄곧 기성세대 은영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가 기성세대의 시선에서 청년 세대를 표백 세대라 규정하고 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피력했던 전례를 볼 때 은영을 작가 본인이라 치부해도 무방하다 생각했다.

 

은영은 혜미를 소녀 가장이라며 동정한다. 근무태도와 잦은 지각을 그녀의 처지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혜미의 처우를 가름할 자격이 생기자 이해하는 것을 그만둔다. 사장의 말처럼 첫인상이 중요한 회사에서 그녀의 근무태도는 자를 명분이 충분하다. 은영의 남편은 어떤 인간에겐 동기부여와 질책해주는 윗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은영은 그리하여 스스로가 혜미에게 훈계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며 혜미를 나무란다.


은영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건 혜미가 파업 규탄 대회에 참석하지 않으려 변명하는 순간이다. 대기업의 파업 규탄대회에 거래처 중소기업이 직원을 보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하물며 아르바이트 비정규직 혜미가 참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열과 권력은 그렇게 작동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위계에서 우위는 대기업이다. 중소기업 내부에서 가장 낮은 위계에 있는 이는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사원 혜미다. 혜미가 거기 참석해야 하는 이유는 조직의 최하위 서열이어서다.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하는 혜미를 은영은 조직 막내로서의 본분이 돼 있지 않다며 폄하할 뿐이다. 기성세대는 종종 이유를 묻는 우리에게 위계에 굴종하는 것이 처세의 본질이라 설명한다.

 

장강명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은영의 남편은 혜미를 "그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요령과 경륜을 가진" 이로 규정하며 교활한 인간쯤으로 취급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약자라며 스스로를 피해자의 신분으로 둔갑한다.


은영은 소설 내내 혜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거다. 기성세대 은영의 시점에서 규정한 청년 혜미는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그런 주제에 자기 잇속 챙기기에 혈안이 돼 있는 이기적 인물이다. 은영이 작가의 사고를 대변하는 게 맞다면,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청년이 점점 괴물이 돼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불편했다. 주류에 정착하여 관조하는 처지인 은영은 혜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지 못했다. 은영을 포함한 우리 세대의 표정을 살피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표정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생활하는지, 취업 준비를 하는지,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지 정확히 봤다면, 그 표정을 보고 왜 저런 표정을 지었는지 헤아렸다면, ‘청년 세대가 괴물이 돼 간다’는 진단은 결코 나올 수 없다.

 

<알바생 자르기>의 마지막 문단은 혜미의 시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은영의 말처럼 ‘이게 다 계획됐던 거’라면, 혜미는 원하는 바를 획득한 셈이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무력하다. 궤도에서 이탈하기는 요원해 보이고 불완전함의 종말을 가늠할 수 없는 것 또한 똑같다. 그녀는 아마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할 거다. 다리는 계속 아플 거다. 자기 시간을 경력이란 그럴듯한 언어로 치환하기 위해 목숨 걸 테다.


혜미의 이야기를 마지막에 배치한 건 의도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어떤 취급을 받는지. 기성세대는 그들을 진정 이해하는지. 그리고 하고자 하는 말을 더 정확히 하기 위해. <알바생 자르기>는 청년 세대를 진단하지 않는다. 도저히 청년 세대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는 기성세대에 대한 문제 제기다. 그렇게 보면 <알바생 자르기>는 자기 성찰의 결과다. 과거 X세대로 호명됐던 청년들은 이제 기성세대가 됐고 그들이 생존을 걱정하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들은 생존보다 자기 이익을 위해 싸웠다. 자급자족의 여지는 마련됐던 세대. 자기 경험을 반추하여 현상을 이해하는 게 인간이라면 기성세대가 지금의 청년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때와 지금, 위기의 결이 다르다. 우석훈과 박권일이 88만원 세대라는 정의를 펼친 건 청년 실업 10만 시대였던 10년 전이다. 지금은 청년 100만이 실업 상태다. 생존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은 더 장기화 된다.

 

장강명은 "지금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는 데는, 20년 전 젊은이들의 고민이 부족했던 탓이 크지 않은가. 각 세대가 앞세대로부터 무엇을 물려받고 다음 세대에 무엇을 물려주었는지를 따져보면, 우리의 성적표가 가장 초라하지 않을까"(장강명, <X세대의 빚>, 한국일보, 17.03.30)라고 말한다. 지금의 구조적 결함을 온전히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전가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우리 세대의 변화를 지적하기 전에 우리의 처지를 헤아려주면 좋겠다. 적어도 장강명은 그걸 해낸 듯하다.





[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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