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키우는 괴물

영화 <케빈에 대하여>
글 입력 2019.06.22 23:4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케빈 1.jpg
 
케빈2.jpg


"좋아, 이런 거야. 일어나서 당신은 TV를 보고 차에 올라 타 라디오를 들으며 출근을 하거나 학교로 갈 테지. 6시 뉴스에선 못 들을 거야. 왜냐고? 사건이 터지지 않았으니까. 집에 가서 또 TV를 보거나 밖에 나가서 영화를 보든가 할 거야. TV에 나오는 인간들도 한 절반 정도는 TV 속에서 TV를 보고 있는 거야. 범생이처럼 나왔으면 사람들이 채널을 돌렸을 것 같지 않아?"



우리는 불편함을 잊거나 외면하기 위해 종종 가면을 쓴다. 진심을 감추고 예의를 갖추어 서로가 용인하는 선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우리는, 위와 같은 케빈의 대사처럼, TV나 라디오, 영화 속에서, 우리의 거짓된 표정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들을 접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내부를 건드리는 끔찍한 사건들이 마치 우리의 바깥에만 존재한다는 듯,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말이다.



movie_imageW91M9WIL.jpg
 
 

역시 그렇게 살게 된 에바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그의 아들 케빈이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엄마'가 된 에바는 아이 케빈이 견디기 힘든 소음처럼 버겁다. 늘 악을 쓰며 울어대던 아기는 자라서 집요하게 에바의 심기를 건드리며 괴롭히는 소년이 된다. 그 소년은 또 자라서 모교(고등학교) 학살극의 주범이 된다. '왜 그랬을까'를 모멸감과 수치 속에서 말없이 되짚는 에바의 시점으로, 카메라는 돌아간다.


케빈은 상대방의 말과 행동 이면을, 감추어진 생각과 태도를 정확히 파악해내는 명민한 아이였고, 그걸 악의적으로 이용할 줄도 알았다. 에바 또한 케빈의 그런 성정을 여러 사건을 통해 겪는다. 서로에게 앙심을 품고 되갚아주며 둘의 관계는 점점 지옥적으로 뒤틀려간다.



케빈2.jpg
 


에바가 사는 곳은 두 개의 이질적인 세계가 공존한다. 통속적인 노래 속에 사는 남편 프랭클린의 세계, 즉 역할극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무심하고 무지한 세계. 그리고 음악이 싫다며 꺼달라고 말하는 케빈의 세계, 즉 음악이 꺼졌을 때의 불핀절한 대화와 불편한 침묵, 시선까지도 감내해야 하는 세계.


케빈을 '겪어보지' 못했던 프랭클린은 이유도 모른 채 쉽게 죽임당한다. 그러나 케빈의 '끝'까지를 다 보았던 에바는 그의 악행의 이유를 끝끝내 묻고자 한다. 그를 버리는 대신에 그가 저지른 참극으로 인해 영원히 속죄하고 고통받으면서.



20190605173509.png
 


마지막 장면에서 에바가 케빈을 두 팔 벌려 안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그 둘의 관계만이 진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수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