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 속 괴리감, 괴리감 속 공존에 대하여

<색맹의 섬, The island of the Colorblind>
글 입력 2019.06.22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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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장은 기사로 일하게 된 주인공 기택의 행동에 대해 ‘선을 넘을락말락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택에게서 풍기는 반지하 냄새, 지하실에 숨어 살던 근세의 악취에 얼굴을 찌푸린 그의 행동은 도리어 기택에게 ‘선을 넘은 행동’으로 받아들여지고, 기택은 충동적으로 박사장을 죽인다. 이는 2019년 개봉한 영화 <기생충> 속 장면으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 결과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계층간 ‘선을 넘는다’는 것은 영화 속처럼 예민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선을 지킨다’는 것 또한 계층 간의 격차를 관조한다는 불편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자연과 인간 혹은 순수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는 어떨까? 선을 지키는 것 혹은 선을 넘어서서 함께하는 것, 이 문제에 대해 <색맹의 섬>은 후자를 택한 듯하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 중인 전시 <색맹의 섬>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인상과는 달리 ‘공통의 경험과 지식, 감수성, 관점을 매개로 하나로 맺어진 공동체들’을 의미한다. 이 전시는 삶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공존을 주제로 ‘공감’을 시각화하는 방식들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 속 다양한 관계들에 대한 확장적 생각들을 고찰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공감과 관계의 형태 속에 숨어있었던 불일치와 괴리, 불협화음에 집중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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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의 첫 번째 전시실은 에콰도르 석유채굴업자들의 강제적인 석유채굴로 인한 아마존의 파괴를 두고 일어났던 소송에 대한 영상 작품 <산림법>으로 시작한다. 자연 속에서 살아온 원주민들은 숲과 자연의 권리를 대변하며 재판에서 승소하였다. 우르술라 비에만과 파울로 타바레스는 <산림법>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대립에서 결국 인간이 물러났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에콰도르 아마존지역 원주민민족성동맹과 같은 원주민 단체들은 개발을 통해 그 이익을 원주민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는 점이다.  설사 환경보전을 외쳤던 원주민이라 할지라도 순수하게 자연을 지키기 위한 이유보다는, 자신들이 살아야 하는 장소를 빼앗기면 안 된다는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이 작품은 인간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연, 그리고 자연을 대변한 인간들을 담아내려 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대립일 뿐이다. 인간은 자연을 100% 대변할 수 없다.


이렇듯 <산림법>에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에 대한 방심은 비요른 브라운의 <무제>에서 메워진다. 그는 살아있는 새, 쥐와 협업한다. 작가가 새에게 둥지를 지을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하면 새는 자신들의 방식대로 둥지를 만들어 나간다. 혹은 이미 쥐가 지나간 흔적을 석고로 캐스팅해 조각으로 재탄생시킨다. 새는 자신의 본능대로 둥지를 만들고 쥐는 아무런 의도 없이 흔적을 남겼지만 작가는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들은 진정한 협업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 곧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교차점이 가감 없이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작업은 솔직하다.


환경미학자 마틴 젤이 말했듯이 자연은 인간에게 자연 그 자신의 언어를 전달하지 않으며, 단지 인간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자연현상을 미적으로 인지할 뿐이다.  따라서 자연과의 공존의 문제에서 궁극적으로 지녀야 할 태도는 자연과 우리들 사이의 동떨어진 경계, 즉 괴리감을 인식하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각자의 영역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의 ‘괴리’는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산림법>과 비요른 브라운의 <무제> 사이에는 우평남 작가와 임동식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번 전시는 두 작가의 교류를 통해 탄생한 작품들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조명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큰 메시지를 던지지는 않았지만 조화롭게 1전시실의 작품들과 어우러졌다. 다만 아트선재센터의 전시실은 혼선을 유발하기 쉬운 부채꼴 형태이기도 했거니와 작품 번호가 쓰여진 도면상 문제가 있었는지 2번 작품은 찾기 쉽지 않았다. 작품 옆에 캡션 번호를 다는 것이 전시 관람하는 입장으로는 더 나을 것 같다. 그리고 임동식 작가의 <자연예술가와 화가>를 우평남 작가가 다시 그린 <자연예술가가 그린 풍경>의 배치도 혼란스러웠다. 각각의 작품들은 네 점의 캔버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평남 작가의 작품은 각기 다른 네 가지 작품으로 구분되어 있었던 반면 임동식 작가의 작품은 하나로 취급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품의 분류는 작가의 선택이겠지만 미술관 측에서 1-1, 1-2, 1-3, 1-4 등의 방법으로 기재했으면 한결 편했을 듯하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2층 전시실에서 한 발짝 나아가, 3층 전시실의 작품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과 갈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김주원 작가의 <과거가 과거를 부르는 밤>에서, 마치 일기처럼 일상적이고 단발적인 기억들은 각종 사건사고들과 함께 나란히 병치되어 재생된다. 그 사건들은 오랜 시간 동안 기억될 사회적 사건들과, 익명의 누군가에게 일어난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하나의 키워드는 각기 다른 현상과 사건들 안에서 다른 무게를 갖게 된다. 가령 영상 속 ‘행진’이라는 키워드는 희망찬 앞날을 그리는 들국화의 노래 제목으로 등장했다가도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퀴어퍼레이드의 행진으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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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은 안에서는 기억들이 개탄스러운 사건들 사이에 등장해 께름칙하고 숙연한 기억이 된다는 점에서, 일상과 사회적 사건 사이의 1차적인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그 사건들은 이성적인 언어로 설명되지만 우리 마음 속의 불편한 구석을 쿡 찌르며 무엇보다도 감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2차적인 괴리감을 유도한다. 이러한 이중의 괴리는 무엇보다도 효과적으로 우리의 무심함을 일깨운다.


그리고 필자가 지속적으로 주목한 작품들 속 괴리는 유 아라키의 <쌍각류>에서 절정에 치닫는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컨테이너는 그 자체로 동떨어진 장소이며 그 안의 작품들 또한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 속에서 재생되는 영상 중 하나에서는 굴 껍데기를 죽은 자의 유품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체가 바다에 가라앉으면 플랑크톤이 몰려들게 되고, 이는 조개를 유인한다. 그리고 조개 안에 이물질이 침투해 긴 과정을 거치면 진주가 탄생하게 된다. 거칠고 흉측한 굴 껍데기 속에서 매끈하고 뽀얗게 빛나는 진주알은 그 자체로 괴리를 형성하지만, 그보다도 영롱한 진주의 기원이 시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진주가 지니는 보석으로서의 가치는 우리 머릿속에서 흐려진다.


이 작품은 인간이 어떤 대상에게 부여한 가치가 항상 옳은지에 대해 질문한다. 굴은 진주를 만들며 어떤 물질적 가치도 추구하지 않았다. 앞서 전시된 <산림법>과 <과거가 과거를 부르는 밤>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자연은 그 상태 그대로 항상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연의 영역에 침범해 개입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행동해 왔다. 그리고 김주원 작가의 작품에서도 인간과 인간은 크고 작은 구조 안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대립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안에서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공존을 표방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안의 괴리는 나의 시선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마치 권위적인 국회의사당 건물을 포장해버린 크리스토 자바체프의 작업처럼, 주변 환경과 동떨어져 자신만의 존재감을 유지하는 자하 하디드의 건축물처럼 괴리감이란 종종 1차적인 의미보다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왜 우리는 공존을 떠올리고 주장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까? 이제 와서야 공존을 외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파트타임스위트의 <이웃들 ver.1.0>은 미술관에서 촬영되는 실시간 영상들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작은 점이 여러 점이 되어 확산되고 다시 하나의 점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함께 공존하자는 메시지를 음성으로 전달한다.


그러나 공존한다는 것은 하나의 점으로 통합되자는 의미가 아니다. 제각기 다른 각자의 점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지만 않는다면 되는 것이다. 앞서 계속해서 언급한 괴리는 경계의 인식이 될 수 있고 이는 서로의 영역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될 수 있다. 글머리에서 언급한 영화 <기생충> 속 대사처럼, 선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인간 대 인간 혹은 인간 대 자연의 관계에서 우리가 가졌어야 할 태도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옳은 방향으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영역과 그가 해야 하는 일에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감은 선을 넘어 또 다른 갈등을 낳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각자의 영역을 확고히 정의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직자의 부정한 금품 수수를 막겠다는 취지로 제안된 소위 ‘김영란법’ 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적 문제를 공존으로 해결한다는 전시의 주제 자체는 물음표를 남겼음에도, <색맹의 섬>이 사회 문제 안에서 예술이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해 고민한 것은 유의미하게 느껴진다. 피카소가 말했던 것처럼, ‘회화는 아파트를 치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시 서문에서 ‘변화를 구하는 작업들’을 소개한다고 설명했던 것과 달리 실천적 차원이 결여되었다는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토마스 사라세노가 에너지 낭비로 인한 지구의 종말을 우려하며 과학자들과 협업해 태양열과 복사열로 떠올라 공기의 흐름으로 이동하는 비행선인 에어로센을 만든 것처럼, 직접적으로 자신의 작업활동 속 비판점을 사회적 차원으로 드러내는 작가가 한 명쯤 더 있었다면 어땠을까?


또한 전시 구성에서 1층은 쉬탄의 영상 작품과 아카이브로 구성되었는데 얼핏 보기에는 전시의 일부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쉬탄의 작품은 2층과 3층의 전시실에 포함시키고 1층을 본 전시에 대한 아카이브로만 활용하는 것이 더 완성도 있게 느껴졌을 것 같다. 그리고 전시실 군데군데에는 시퀀스 데스크로 제작된 김주원 작가의 <과거가 과거를 부르는 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작품 설명이 리플렛 끝부분에 들어간 탓에 전시를 보는 내내 의아한 마음으로 감상하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서야 작품 설명을 읽게 되었다. 마지막보다는 맨 앞 부분에서 먼저 제시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다.


 *
 

이번 아트선재센터의 <색맹의 섬>에서 선보여지는 작품들은 각각 따로 보면 동떨어진 듯하지만 전시장을 찬찬히 돌다 보면 하나의 이야기처럼 머릿속에 새겨진다. 순수한 회화부터 조형작품, 미디어, 아카이브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들이 기획자의 손길로 한 장소에 모여 공통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것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색맹의 섬>은 공존을, 필자는 경계에 대한 인식이라는 다른 생각을 내놓았지만 그 목적이 공동체가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아트선재센터가 다음 기획전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



[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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