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베토벤' 아닙니다, '루드윅'입니다 - '루드윅 : 베토벤 더 피아노' [공연]

그럼에도 꿈을 꾸는 루드윅의 이야기
글 입력 2019.06.0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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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윅 메인포스터.jpg
 

광기 어린 예술가, 참 매력적인 소재다. 예술을 향한 그들의 열정이 부럽기도 하고,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서사에 긴박감과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음악이나 미술, 소설에 미쳐 결국 자기파멸에 이르지만 예술의 세계는 완성을 이루어 아름다운 레퀴엠이 흐르는 결말. 벌써 한 편의 서사가 만들어진 것만 같다.

사실 이런 작품은 과거에도 많았고 현재도 많다. 뮤지컬 ‘모차르트!’나 뮤지컬 ‘광염소나타’, 이 외에도 미친 예술가를 다룬 작품은 넘쳐났다. ‘모차르트!’는 ‘올 뉴 모차르트!’로 개편되면서 고전적인 느낌을 탈피하고자 노력했다. ‘광염소나타’는 원작에서 강조한 광기보다도 인물의 내면을 세밀히 그려내어 클리셰에서 벗어났다.

그래, 이제 ‘예술에 미친 주인공’은 더 이상 독특한 소재가 아니다. 그랬기에 뮤지컬 ‘루드윅: 베토벤 더 피아노’에서 베토벤을 어떻게 그려낼지, 극을 보기 전부터 호기심과 걱정이 공존했다. 베토벤이야말로 광기 어린 예술가의 대표 격이기 때문이다.



걱정은 기우였다


다행히도 이런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음악에 미친 비운의 예술가 베토벤은 극 초반에만 잠시 등장한다. 물론 극 내내 어딘가 미쳐있기는 하지만, ‘예술에 미쳐 주위를 돌보지 못하는’ 식의 클리셰는 초반에 잠깐 등장했다가 금세 지워진다. 이 극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미친 예술가를 뻔하게 그려내지 않고, 그 광기를 희망과 연결 지어 새로운 맥락을 창조했다. 너무나 익숙해 질릴 법도 한 베토벤의 생애를 소재로 삼았지만 서사까지 뻔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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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초반, 무섭도록 빠른 전개 속도는 후반 서사를 위한 밑바탕이었다. 관객들이 익히 알고 있는 베토벤의 생애는 초반 20분에 모두 담겨 있다. 엄한 아버지, 모차르트에 대한 양가적 감정, 희미해지는 청력과 선명한 열정까지, 이 모든 서사가 머뭇거림 없이 한 번에 진행된다. 덕분에 몰입도가 높아지기는 했으나, 그 빠름이 조금 과하지는 않았나 싶다. 무대 바닥에서 오열하며 신을 원망하는 청년 베토벤이 안쓰러움과 동시에, 그 짙은 감정에 공감할 만큼의 시간까지는 주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그러나 빠른 전개 덕에 중후반부 서사를 밀도 있게 그려낼 수 있었다. 이 극의 주인공은 음악에 미친 베토벤이 아니다. 그럼에도 꿈을 꾸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인간 베토벤이다. 신께서 나의 청력을 앗아갔으니 나는 더 이상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좌절은 지워지고, 당신의 선율에만 귀를 기울이도록 다른 소리는 모두 꺼주었다는 희망이 드러난다. 즉 이 극은 ‘귀가 멀었는데도 역작을 탄생시킨 베토벤의 이야기’라기보다, ‘귀가 멀었기에 꿈을 꿀 수 있었던 루드윅의 이야기’에 가깝다.



마리, 시도는 좋았지만


이 극의 등장인물은 넷이다. 베토벤, 청년(젊은 베토벤과 카를), 발터, 그리고 마리. 남성우월주의 시대에 건축가를 꿈꾸던 마리는, 제 스승의 아들인 발터가 피아노에 천재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더 이상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지 못하자 베토벤을 찾아간다. 그리고는 발터의 레슨을 부탁하지만 베토벤은 그 부탁을 거절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발터는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고, 이는 베토벤의 마음속에 커다란 죄책감으로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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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와 발터의 서사는 순수 창작된 스토리다. 남성주의적이던 시대에서 주체적으로 꿈을 찾아가는 마리, 그리고 베토벤과 카를의 스토리에 개연성을 넣어주는 발터는 극에서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캐릭터다. 하지만 이 중요한 캐릭터들이 과연 극 속에 잘 녹아들었나, 하면 조금 의문이 남는다.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과 존재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대다수의 작품이 남성 캐릭터 중심이라는 것, 몇 안 되는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 캐릭터를 뒷받침해주는 도구로 기능한다는 것, 그도 아니라면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에 갇혀 있다는 것 등등 최근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 시류를 반영한 여성 서사들도 많이 등장하였고, 기존의 작품에서도 대사나 캐릭터, 혹은 서사 전반을 재검토하는 시도도 꽤 이루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마리의 서사도 의미가 있다. 여성이기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해 남자의 옷을 입고 살아가던 마리는, “나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 세상은 나랑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라고 말하며 울분을 토한다. 세상과 맞서 싸우며 꿈에 도전하는 여성 캐릭터, 정말 매력적이고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 극의 주인공은 베토벤이고, 서사의 중심도 베토벤이다. 즉 마리가 베토벤의 서사에 얼마나 어울리는가, 이 점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마리의 설정은 서사 전반과 그다지 합치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베토벤이 꿈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점이 청력 상실이라면 마리의 걸림돌은 남성주의적 시대다. 베토벤은 그 걸림돌을 현명하게 이겨내고 본래의 꿈을 이루었다.

하지만 마리는 '남의 옷'이 아닌 '나의 옷'을 입는 결말을 택했다. 남성중심 시대에 꿈을 위해 남자의 옷을 입는 것이 그렇게나 큰 잘못일까, 라는 주관적 시선은 넣어두더라도 마리가 건축가로 성공하는 결말을 보고 싶었던 미련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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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리는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바꾼 것이고,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주제의식은 베토벤이 아닌 마리의 입에서 나온다. 아울러 베토벤의 또 다른 꿈이었던 카를은 결국 베토벤의 바람대로 음악가가 되지 못했다. 이 극은 꿈의 변화와 실패를 모두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마리의 서사도 이러한 맥락 하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에 마리 캐릭터의 문제는 ‘건축가를 포기하고 수녀가 되었다’가 아니다. 문제는 남성주의적 시대, 건축가, 수녀 이 키워드들이 베토벤의 서사와 유의미한 공통점이 적었고, 그래서 마리 캐릭터가 조금은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점이다.

*

아쉬운 점도 존재했지만 베토벤의 익숙한 생애를 뻔하지 않게 그려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극이었다. 더불어 베토벤의 명곡인 ‘합창’, ‘비창’, ‘월광’ 등이 넘버 속에 녹아들어 있어 귀도 즐거웠다.

극장을 나오면서 과연 나는 꿈을 꾸고 있는가, 하는 물음도 생겨났다. 실제로 베토벤이나 마리를 만날 수 있다면 한 번쯤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지금도 꿈을 꾸고 있나요?



시놉시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와 같은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사랑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뇌했던 ‘인간’ 베토벤이 무대에서 다시 태어난다.

얼마 남지 않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앞두고 쓰여진 베토벤의 편지 한 통. 그리고 그 편지가 한 여자 앞으로 전달된다. 청력을 일고 좌절의 늪에 빠져 있던 청년 베토벤이 죽음을 마주하고 있던 바로 그날 밤, 세차게 내리치는 폭풍우 소리와 함께 낯선 여자 마리가 어린 소년 발터를 데리고 무작정 찾아와 그에게 발터의 피아노 선생님이 되어 달라 청한다. 망가진 청력, 나락으로 떨어진 자괴감에 베토벤은 그녀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하고, 마리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또 다른 세상의 문을 열어 두고 떠난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인연을 마주한 베토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 되는데…


공연 정보

공연 기간: 2019. 4. 9 ~ 2019. 6. 30
공연 장소: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
공연 시간: 평일 20시 / 주말 및 공휴일 15시, 18시 30분 / 월요일 공연 없음
관람 시간: 110분
티켓 가격: R석 60,000원 / S석 40,000원
프로듀서: 허강녕
작/연출: 추정화
작곡/음악감독: 허수현
주최/기획/제작: 과수원 뮤지컬 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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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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