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한 이유 [문화 전반]

글 입력 2019.06.06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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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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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부작용 중 하나는, 문화예술을 '탁상공론'이라거나 '생산적이지 못한 활동'으로 여기는 경향성이 농후해졌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부작용이 가장 명약관화하게 드러나는 곳은 대학교다. '문과는 상경(경영, 경제) 아니면 무조건 취직에 불리하다'는 인식이 당연시되며, 애석하게도 실제로 취업 준비생들에게 체감되는 바도 그 인식과 일치한다. 어문, 역사, 사범, 기타 사회대 학생들의 경우 취직을 생각한다면 저학년 때부터 미리 상경 복수전공을 준비하거나, 각종 대외활동 및 인턴 경험으로 '학부 전공에서 배운 것 이외에도 다양한 실무 경험을 축적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증빙 자료를 모아야 한다.

이 광경이 한편으로는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실 기업의 주된 업무들, 마케팅, 영업, 회계, 기획 등에 역사학이나 철학, 교육학이 어떤 점에서 기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 경제학이나 경영학에 부여된 임무만큼이나, 인문학과 문화예술도 인간의 삶에서 맡고 있는 중대한 소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원시 인류는 수렵과 채집 등의 '물질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행동들을 하는 동시에, 동굴에 벽화를 그리고 그 벽화에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불어넣으며 원시적 형태의 예술도 완성해 나갔다. 이처럼, 경제적 안락함을 얻고자 하는 욕구만큼이나, 문화예술에 대한 인간의 욕구도 근본적이며 본유적이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어떤 기능을 하는가?', '어떤 예술이 좋은 예술인가?'와 같은 지루해보이면서도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져보고자 한다. 필자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더 깊은 사유의 폭에서 고민한 철학자들의 의견을 빌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논쟁


근대에 이르기 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예술은 이성의 영역 안에 갇혀 있었다. 예컨대 플라톤은 이성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불변의 완전한 세계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이며, 그 불완전한 현상계를 다시 한번 모방한 것이 예술이라 논증하며 예술의 가치를 평가절하했다. 그 외의 다른 철학자들도, '황금율'과 같은 완벽한 비례의 원리 등의 객관적 속성들을 예술과 결부시키면서, 예술이 비합리적이거나 주관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주의의 틀 안에서는, 예술이 과학이나 관념철학과 분리되는 독자적 지위를 갖기 어려웠고, 따라서 예술은 주체가 되기보다 과학적 사고의 부속물이 되기 일쑤였다.

이러한 객관주의적 관점에 대한 반대급부로 등장한 관점이 '주관주의'이다. 주관주의의 대표적 이론인 취미론에 따르면, 예술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객관적 속성은 없으며, 마음의 감관을 이용해서 이해관계가 개입되지 않은 무관심적 즐거움을 느낄 때 비로소 예술의 핵심인 '미'가 성립된다. 취미론의 뒤를 이은 미학 이론의 발전은, 인간의 주관적 감정을 미의 정의적 요소로 포함시킴으로써 비합리성에 대한 기존 예술철학의 부정적 평가를 전환시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주관주의는 인간의 미적 감관으로 느낀 모든 즐거움을 예술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기 때문에, '어떤 예술이 훌륭한 예술인가'에 관한 우열을 나누기 어렵다는 한계를 가지기도 했다.

이처럼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논쟁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분석철학자들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족 유사성'이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언어의 개념을 완벽히 정의하려는 시도를 비판했는데, 그 말인즉 각국의 서로 다른 언어들은 누가 봐도 언어라는 것을 알 수 있을만큼 유사하지만 그 모든 언어들이 담지하고 있는 공통적 특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이러한 분석을 예술에도 적용하면서, 예술 작품들은 딸이 엄마와 아빠를 닮듯 서로 유사하기는 하지만, 모든 예술 작품에 공통되는 하나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는 어리석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의 말이 맞다면, 비트겐슈타인 이전의 철학자들이 해왔던 예술의 정의하려는 시도들은 무의미하며 앞으로 미학자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는 '예술의 구체적 사용례들을 밝히는 일'로 한정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예술 정의 불가론'은, 비디오 아트나 움직이는 조각처럼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예술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양상을 비추어볼 때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개념의 외연을 확정하고 그 내포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려 하는 것은 모든 학문에서 공통적으로 수행해왔던 일이기에, 예술에 대한 학문을 정립함에 있어서 그 작업을 생략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도리어 예술에 대한 이토록 다양한 시각들이 편재한 현대 사회이기에, 이른바 '교통정리'를 해줄 수 있는 확고한 이론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낭만주의의 출발과 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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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비합리적 활동으로 바라보는 또다른 관점에는, 18세기 말부터 있어온 '낭만주의'가 있다. 기존의 계몽주의 사상을 근간으로 일어난 일련의 혁명들이, 오히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킬 만한 혼돈을 낳았음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담고 있는 이론이다. 이처럼 수다한 이론들의 학문적 배경을 조사하다 보면, 결국 모든 이론적 관찰 및 일반화들은 그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규정된 프레임 안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절대적으로 위대한 이론도, 절대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이론도 없는 것인지도.

혼자 미학 입문 서적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되고 마음에 와닿았던 철학 사조이기도 하다. 낭만주의 예술 철학은, 고대의 플라톤 전통이 아닌 '영감론'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다. 예술의 가치를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던 고대에도, 예술은 '신'과 같은 존재로부터 번뜩이는 영감을 받아, 그 영감이 인간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탄생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존재했다. 낭만주의는 근대 이후의 철학이기에, 영감의 개념을 신에 의존하기보다 '인간화' 시키고자 했다. 즉 예술 창조의 활동을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에 기대어 설명하면서, 기존에 '예술 작품'의 특징에 집중하던 미학을 예술가 중심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현대의 삶에서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 중에서는, 예술의 합리적 특성보다 비합리적 특성에 기대어 그것의 정의를 바로세우려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낭만주의 예술은 예술을 객관화시키려는 기타 시도들에 비해 우리의 직관에 더 부합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초의 진보는 최후의 보수로 귀결되기 쉽기에, 낭만주의 역시 종국에는 배타적이고 편협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예술가의 천재성에 집중하다 보니, 이미 예술계에서 존경 받는 '천재 예술가'들의 권위가 후배 예술가들의 다층적 정체성을 억압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특히 페미니즘 예술 철학가들로부터 제기되어 왔다.



예술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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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미학 이론들이, 부분적 진리만을 담지할 뿐이며 예술이라는 광대한 현상의 전체를 온전히 반영할 수 없다면 - 우리는 이제 예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혹은 예술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어떤 학문이든, '닿을 수 없는 곳에 닿기 위한' 시도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진리는 비가시적인 이상향과도 같은 것이라서, 우리가 아무리 그 상태에 도달하려 해도 진리의 핵심부가 아닌 주변부만을 인간에게 허용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숙고와 비판을 멈춘다면,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진실이 아닌 신화에 머물게 될 것이며 모든 학문의 귀결은 회의주의가 되고 말 것이다.

예술은 예로부터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 중에 하나였다. 물론 과학적 탐구처럼 귀납적 일반화를 통해 법칙을 도출하려는 목적 의식을 갖고 있지도 않고, 역사학처럼 특정한 과거의 기록에 얽매이지도 않으며, 경제학처럼 인류의 물질적 번영에 기여하려는 직접적 의도를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예술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으로써 여태까지 그 독자적 영역을 유지하고 확장시켜 왔다. 그러한 예술의 순기능을 인정한다면, 여태까지의 미학적 시도들은 분명 유의미한 노력이었고 우리는 앞으로도 그 노력을 축적시켜 나가야 한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함께 발생한 예술에 대한 경시 풍조는 사뭇 안타깝다. 이러한 풍조로만 판단한다면, 도리어 근대 이후의 현상들을 '퇴보'로 일컬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타인에게 나의 의도와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체는 수도 없이 많지만, 예술적 창작물들은 그 많은 매개체들 중에서도 가장 역동적이고 포용적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합당하면서도 양립 불가능한' 의견들이 난무한 다원주의 사회에서, 예술의 임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막중한 것 아닐까.

예술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한 요즘이다.


[이창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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