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서로를 겨냥한 욕망 - 연극 단편소설집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지만
글 입력 2019.05.17 12:1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고등학교 때 한 선생님이 생각난다. 난 그 선생님의 모든 것을 존경했고, 좋아했다. 다른 과목은 몇 점이 나오든 상관하지 않았는데, 유독 그 선생님 과목은 높은 점수를 받고 싶어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이전부터 좋아하는 과목이기도 했지만 그 선생님을 쫓아다닌 후로 그 과목은 나의 ‘최애 과목’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과목을 대학에서까지 배우고 있다.

선생님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이렇다. ‘저렇게 되고 싶다’는 존경심, 선생님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따라오는 감정이다. 가끔 선생님에게 느끼는 실망이나 원망도 존경에서 파생한 감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극 ‘단편소설집’ 속 1막의 리사가 절절하게 공감되었던 이유기도 하고, 2막의 리사를 비난하지 못했던 이유기도 하다.



스승과 제자, 가깝고도 먼


사제관계. 어쩌면 그 수많은 관계 중에서 쉽기로, 어렵기로, 가깝기로, 또 멀기로 손꼽히는 관계가 사제관계다.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안 되는 어려운 관계지만, 목정성이 뚜렷한 관계이므로 유지하기는 비교적 쉽다. 스승은 잘 가르치면 되고, 제자는 잘 배우면 된다. 사실 사제관계의 본질은 교수와 학습에 있지만, 선생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고, 제자와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싶다는 욕심 탓에 균열이 가기 마련이다.


_S7A3062.jpg
 

연극 ‘단편소설집’은 이런 모순적인 사제관계를 공간으로 드러냈다. 집밖에서 집안으로, 다시 집안에서 집밖으로 이동하는 리사의 이동을 통해 루스와의 관계를 가시화했다. 스승의 공간에 들어온 제자, 그리고 스승의 마음에서 벗어난 제자. 리사는 루스의 공간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과할 정도로 경외감을 표현한다. 반면 깔끔하고 성숙한 복장, 본인의 규율대로 정리된 책상에서 루스의 권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루스는 자신의 시간과 일상을 방해하는 벨소리 철저히 차단한다. 자신의 삶,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둘러싼 장벽을 공고히 유지하는 사람이 바로 루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모습은 반전된다. 거대한 스승 앞에서 조금씩 자신의 주관을 펼치게 되는 리사, 그리고 리사가 성장하는 만큼 늙어가는 루스. 첫 만남 때 루스의 권위를 한층 높여주었던 깔끔한 정장은 이제 리사의 몫이 되고, 루스의 머리는 점점 희게 변한다. 결국 이들이 공유했던 시간이 조금씩 흐려지면서 이들의 관계에도 빨간 불이 켜진다. 더불어 사제관계를 지탱했던 ‘배움’의 시간도 줄어들어, 루스와 리사는 한층 더 솔직해진다. 스승과 제자 관계일 때는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욕심이 고개를 들게 되는 것이다.


_S7A3355.jpg
 


예술의 딜레마


결국 루스와 리사의 갈등을 촉발시킨 것은 욕망이었다. 제 인생에 공고한 장벽을 두른 채 전화벨을 무시해왔던 루스는 리사에게 마음을 연다. 루스의 욕망은 바로 리사였다. 리사의 서툰 글, 빛나는 재능, 그리고 작가로 자라며 겪는 온갖 성장통까지 루스는 부러워했다. 루스에게는 성장의 여지가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스는 리사와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싶다는 인간적 욕구도 있었지만 리사의 앞날과 인생 그 자체를 원했다고도 볼 수 있다. 기성세대가 어린 세대를 바라보는 단순한 시기를 넘어, 자신의 손으로 키운 제자가 자신의 바운더리를 넘어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간다는 사실이 루스에게는 큰 상실로 다가왔을 터다.

리사가 욕망한 것은 글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글 쓰는 실력이라기보다는 글의 소재를 원했다. 스승처럼 다채로운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고난을 겪은 것도 아니며, 그저 평범한 10대와 20대, 그리고 30대를 보내고 있던 작가가 리사였다. 그런 리사에게 스승의 삶은 매력적인 소설로 귀에 박혔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스승의 이야기는 더 이상 스승의 마음속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야기로 변모해버렸다. 그 과정에서 스승의 단단한 장벽을 한 번이라도 고민했다면 좋았겠지만, 리사에게는 용기가 없었다.


_S7A3271.jpg
 

예술과 윤리성이 취해야 할 균형점은 여전히 어렵다. 매력적인 이야기라면 윤리는 조금 눈 감아도 되지 않나, 싶다가도 예술이 전하는 파장을 생각하면 윤리성을 외면하기 힘들다. 스승의 이야기를 훔쳤다는 죄책감, 그러나 이제 그 이야기는 내 안에서 재창조되었으니 나의 이야기기도 하다는 자신감이 리사의 마음 안에 공존했다. 그 결과 리사와 루스의 갈등은 아주 조금씩 그 크기를 키우게 되었다.

루스가 리사를 제자가 아니라 동료로 인정했을 때, 그는 리사에게 자신의 단편소설을 보여준다. 평생 부엌에서 갈등하던 인물들이 결국 마지막 요리를 만들고 결말을 맺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리사는 결말이 찜찜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갈등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 시한부 설정이 들어가 신파로 흐른 것이 아쉽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루스는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답한다. 봉합되는 상처는 없고, 치료되는 갈등은 없다. 영원한 친구도 없고 이상적인 친구도 없다.

루스의 단편소설 속 마지막 요리는 결국 리사의 첫 장편소설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술, 그리고 사제관계 안에서 미묘한 갈등을 겪던 루스와 리사는 결국 리사의 장편소설을 마지막으로 관계의 종말을 맞는다. 이들의 갈등은 치료되지 않은 채, 리사가 루스의 집을 떠나면서 극은 막을 내린다. 루스의 말대로 인생이란, 그리고 관계란 원래 이런 법이라지만 선악을 뚜렷하게 구분 짓지 못한 채로 끝나버려 어딘가 씁쓸함도 남는다. 그리고 이 씁쓸함이 ‘단편소설집’을 한층 더 훌륭하게 완성한다.

*

나는 어쩔 수 없이 리사에게 조금 더 마음이 갔다. 나와 공통된 부분도 많았고 공감 가는 면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스의 처절한 분노를 마주하고 나니 리사가 조금 철없어 보이기도 했다. 이렇듯 리사와 루스는 뚜렷한 선도, 뚜렷한 악도 아니다. 그저 그들의 욕망이 서로를 겨냥했기에 갈등이 짙어졌을 뿐이다.

리사와 루스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루스가 마지막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리사가 집을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전화벨은 울리고 있었다.


시놉시스

문예창작과 교수 루스 스타이너는 존경받는 단편소설 작가다. 루스를 숭배하던 대학원생 리사 모리슨은 6년 동안 루스의 지도를 받으며 인정받는 작가로 성장한다. 단편소설집 출간 후 호평을 받은 리사는 ‘루스와 시인 델모어 슈워츠의 사적인 관계’를 담은 장편 소설을 발표한다. 자신의 인생이 제자의 소설 소재로 쓰이자 루스는 분노한다. 예술가가 했어야 하는 선택을 했다고 주장하는 리사를 용서할 수 없는 루스. 가까운 스승 제자 사이였던 루스와 리사의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 간다.


2019단편소설집.jpg
 


문화리뷰단.jpg
 

[정지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