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극 ‘7번 국도’, 함부로 공감하려 하지 말 것

남산예술센터 2019 시즌 프로그램, '여기는 당연히 극장' 공동제작
글 입력 2019.05.0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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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연극을 피해왔다. 어설픈 위로와 어색한 공감이 싫었다. 연극이 진행되는 한시간 반 동안 해결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 내에 치유를 해내려는 작품들이 많았다고 느낀다. 어떤 극들은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 포커스를 맞추고, 어떤 극들은 그걸 극복해가는 과정을 담는 데에 포커스를 맞췄다. 나는 둘 다 싫었다. 사회 문제를 어설프게 다루면서 피해자에게 공감하려는 그 과정이 싫었던 것 같다.

‘7번 국도’는 그런 면에서 정말 고무적이다. ‘7번 국도’를 보고 난 뒤, 그 날은 하루 종일 먹먹한 마음으로 말도 잘 잇지 못했다. 와, 기분이 왜 이러지? 싶을 정도였다. 결국 그 날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잠들었다.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남기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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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바닥에는 분해된 차체가 흩뿌려져 있었다. 뒤편에는 동훈이 운전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택시의 커다란 차체 틀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 무대는 차 안인 것 같기도 했고, 해체된 마음 같기도 했다. 배우들은 마치 정해진 길을 따라 운전을 하듯이 직진, 혹은 90도 회전으로 방향을 찾아 무대를 오갔다.

연극에 나오는 사람들은 전부 피해자다. 우리는 전부 피해자라는, 이 힘 빠지는 말은 안타깝게도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공장에 다니다가 병이 생겨 사망한 딸의 부모님, 같은 사건의 피해자 누나, 군대 내 폭력의 피해자, 그리고 그의 애인. 마음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지만 같은 원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눈물 흘린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아픔은 각자 다르다. 각자 정확히 마음이 아픈 이유도 다르고, 그래서 하는 행동들도 다르다. 연극은 이를 통해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지도 날카롭게 질문한다.
 
공감은 한자 그대로 풀면 함께 느낀다는 것이다. 함께 느낀다는 것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함께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가능할까? 각자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사고(思考)가 다른데 우리는 정녕 함께 느낄 수 있는 걸까? 연극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대답한다. 꽤 시니컬한 대답이다. 그리고 이 대답은 내가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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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처리 방식도 독특했다. 작은 공연장이니 마이크를 차지 않음은 이해가 되었지만 배우들의 발성은 여타 공연과 달랐다. 배우들은 거의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관객석을 향해, 정면을 보고 소리치는 식으로 대사를 말했다. 대사를 칠 때마다 배우들의 배가 쑥쑥 들어갔다. 단전에서부터 이끌어올리는 힘이랄까. 대사를 소리치듯 처리하는 방식이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닌가, 부자연스러운 요소의 하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익숙해졌고, 극의 후반부로 달려갈 수록 대사는 일종의 절규 같았다. 한 번만 참고 넘기라 말했던 기주(주영의 여자친구)의 후회, 자신이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상황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던 주영의 회고,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딸을 지켰던 동훈의 슬픔. 이 모든 것들이 소리치는 대사 속에서 아프게 다가왔다.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응원하고 있어요’라는 말이었다. 주영은 택시에 탄 뒤 동훈에게 응원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주영의 사정을 전혀 몰랐던 극 초반에는 이 말이 참 공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극 후반에서 주영의 사정을 알게 된 뒤, ‘응원하고 있어요’라는 말은 너무 아팠다. 똑 같은 대사를 다르게 느끼는 나 자신을 보며 당황스럽기도 했다. 응원에도 자격이 필요한 걸까? 나는 누군가를 응원할 수 있을까?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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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 같아서 그래!’
‘나도 다 겪어봐서 그래!’
‘나도 다 알아!’
‘같은 처지야 우리는’

동훈은 계속해서 군부대 앞에서 시위하는 기주에게 저렇게 말한다. 그리고 기주는 이 말의 공허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같은 처지라면 더 그래서는 안되는 거 아니냐고, 그냥 응원하지 못할 바에는 지나가달라고 소리친다.

기주의 마음도 동훈의 마음도 모두 이해가 가서 안타까웠다. 지금은 주영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기주, 그리고 결국 좌절하게 될 결말을 알아서 말리고 싶은 동훈. 사실 좌절하게 될지, 혹은 정말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동훈은 직접 싸워본 사람으로서 남겨진 사람이라도 덜 상처받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상처는 셀프다. 치유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난 상처는 스스로만 돌볼 수 있고, 자상인지 찰과상인지 그 아픔의 형태와 크기도 본인만 알 수 있다. 피가 난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이 아프고 괴로운 건 아니다. 치유의 방법도 다르다. 집에서 혼자 침잠할 수도 있고, 시위에 나올 수도 있고, 합의를 하며 떠나 보낼 수도 있고, 모두가 떠난 자리에 혼자 서서 눈 부릅뜨고 진실 규명을 요청할 수도 있다. 극 중 인물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상처를 치유하거나 마주하고 있었다.

*

집에서 조용히 눈물 흘리는 사람만 피해자가 아니다.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혹은 내다가 멈춘 사람도 모두 피해자일 수 있다. 우리는 상상한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라면 쉽게, 피해자가 그래서는 안되는 것 아니냐고 간섭하고, 적당히 좀 하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피해자인지 아닌지는 피해 사실의 존재 여부로 가려지는 것이지 그 사람의 태도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함부로 규정하지 말자. 함부로 공감하려 들지도 말자. 나의 이해와 공감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일 수 있다는 걸 생각하고, 아픔을 더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생각이 많아지는 극이었다. 아직 조금 마음이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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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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