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결국 그녀는 심연으로 도망쳤다 - 창작극 '함익'

그녀는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사람이었다.
글 입력 2019.04.21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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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보고 있는 '함익'과 '익.'



“마지막 부분이요, 이해 됐어요?”

“직관적으로 와 닿지는 않던데요, 난 좀 생각이 필요할 것 같아.”

“같이 손잡고 걸어간 사람, 또 다른 자기 자신 맞죠.”

“응. 모두를 쓰러뜨리고 결국 그 사람이랑 손잡고 나아갔지.”

“그게 자기 자아를 찾은 거라고 볼 수 있나? 난 사실 그 장면 때문에 직전까지 내가 연극 보면서 해석했던 내용이 완전 달라지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러게요, 나도 엔딩이 좀 의아하네. 어렵다. 나는 이거 리뷰 써야하는데, 어쩌면 좋아. (웃음)”



 

1. ‘공백’을 이용한 연출


 

연극에 관한 개인적인 감상평을 늘어놓기에 앞서, 연극의 연출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연출력이 굉장히 뛰어났다. 연극의 흡입력이 대단했다. 연극이 열렸던 세종문화회관의 M씨어터는 이전에 다른 공연을 보러 왔을 때도 느꼈지만 국내 극장들 가운데에서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의아했다. 보통 100분 이하의 창작극 공연이 열릴 때 장소가 M씨어터인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공연장에서 100분 정도의 연극을, 흡입력 있게 연출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연극을 본 뒤 내 걱정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극의 완급조절이 적절했고 조명의 위치와 활용도, 사용한 소품들도 탁월했다.

 

완급조절의 경우에, ‘함익’처럼 극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어둡고 무거울 때 특히 중요하다. 잘못하면 관객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관객이 극의 흐름을 어떻게 따라갈지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연극 속 인물에게만 집중하여 가슴 아픈 서사를 늘어놓기만 하는 공연이 그것이다. 이때는 인물의 일방적인 감정 쏟아내기식 공연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배우가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적당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흡입력 있는 공연과 피곤한 공연을 결정짓는 경계이다. ‘함익’은 후자에 해당했다. 조화를 잘 이루었다는 뜻이다.

 

극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은 모두가 예상하듯 ‘함익’이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겉으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과 내면이 일치하지 않아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집안에서는, 집안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되는 도구에 불과하다. 이런 인물이 주인공일 때 대부분의 공연은, 그녀의 내면적인 서사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플롯이 만들어진다. 더군다나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그녀에게 지극히 ‘폭력적’이기에 그녀가 공연에서 보여주어야 할 감정들은 극도로 불안정하고 우울하다. 극의 연출진들은 ‘공백’이라는 장치를 잘 활용했다. 감정을 쏟아내지 않는 부분에서는 음악이나 효과음 등, 무대에서 들려줄 수 있는 소리를 최소화하였다. 이 장치가 작동할 때에는, 인물이 조용하게 자신의 대사를 내뱉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관객의 피곤함을 덜어줄 여건을 마련했다. 서사가 고조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탁월하게 분리한 것이다.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공연에 몰입할 때 몰입하고, 쉴 때 쉴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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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대화를 나누었을까,

아니면,

한 쪽이 다른 쪽에게 세뇌를 시킨 것이었을까.



 

2. ‘함익’의 또 다른 <자아> - 파멸로 인도하는 환영


 

앞서 말했듯 ‘함익’은 본인의 외적인 이미지와 진짜 속내가 달라, 고통에 허덕인다. 외적으로 보았을 때 그녀는 모든 것을 가졌다.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성공’의 지표라 칭하는 요소들을 전부 가지고 있었다. 부유한 가정환경, 사회적인 명예가 보장되는 교수라는 직위, 아름다운 외모, 그녀에게 구애하는 또 다른 재벌가(맞나? 그녀의 집안만큼 명성이 대단한 집안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비슷한 정도의 부를 지닌 집안일 것 같다.)의 자제. 누가 그녀를 불행한 사람으로 보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불행했다. 단지 그 집에서 그녀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권위적인 아버지는 함익을 언론플레이를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후에 새어머니랍시고 들어온 젊은 여인은 그녀의 눈에 그저 속물로 보였다. 어쩌면 저 여인이 친어머니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의심도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중이었다. 분명히 그녀는 괴로웠다. 그래서 ‘익’이라는 또 다른 자아, 어쩌면 환각에 불과한 존재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이것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였다. 익은 함익이 자신의 고통과 속내를 털어놓고 위로를 얻을 구원자였을까, 아니면 단지 그녀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던 환각에 불과했을까. 어떤 사람들은 전자의 관점에서 공연을 이해했을 것이다. 연극을 같이 관람한 내 지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함익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또는 집에서 아버지의 훈계와 화풀이를 받을 때 차마 면전에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속마음을 익에게는 자유롭게 털어놓는다. 그렇게 위로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익이 그녀에게 주었던 것은 위로가 아닌 ‘광기’였다. 의심을 확신으로 나아가게 할, 고통에 고통을 더하는, 감정의 골을 깊어지게 하는 환각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새어머니가 친어머니를 죽인 게 아닐지 의심하는 수준에만 그쳤었다. 이는 추측하건대, 친어머니가 죽은 후 그 자리를 보란 듯이 차지한 새어머니를 증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새어머니가 친어머니를 죽였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친어머니를 죽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한 번이라도 그녀의 시점에서 에피소드가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극중에서는 단 한 번도 새어머니가 단독으로 등장하거나, 새어머니의 독백이 진행되는 구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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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학생들 입장에선,
함익의 행동이 이해 안 갈만도 했다고 생각한다.

그저 히스테리 가득한 교수로 보였을 게 당연하다.


  

그런데 함익은 익과 대화를 나눈 후에 새어머니가 친어머니를 죽였다고 ‘확신’하게 된다. 익이 계속해서 함익에게 어머니의 목소리로—네 새어머니가 나를 죽였다고, 복수를 해야 한다고 되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익과 대면한 후에 그녀의 의심은 확신으로 탈바꿈한다. 자연스레 집안에 대한 증오는 커져만 간다. 어머니를 죽인 사람과 함께하는 집안에서, 그리고 자신을 기업의 홍보를 위한 수단으로만 보는 곳에서 어떻게 숨을 쉬며 살아가겠는가.

 

‘연우’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연극학과 학생들이 기획하는 연극 <햄릿>의 지도교수다. 학생들은 나름대로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을 내놓지만, 그녀의 마음에 썩 와 닿게 분석하지는 않는다. 그런 와중에 연우만큼은, 자신의 역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을지- 햄릿이라는 인물이 복수라는 감정 이외에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을지,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해석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연우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연우를 향해 느끼는 애정을 익에게는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익은 마치 친구의 짝사랑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공감한다. 하지만 이내, 어머니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말로 함익을 부추긴다. 증오의 심연으로 그녀를 몰아붙인다. 그러면 함익은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다가도, 마치 사명을 각성한 듯 ‘복수’라는 감정으로 자신을 가득 채운다. 광기에 휩싸인다. 익은, 함익의 또 다른 자아였지만 그녀를 구원해줄 자아는 아니었다. 익을 만나면서 함익은 더더욱 불안정한 사람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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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처럼 보였던 연우는 구원자가 아니었다.

그는 함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끝내 그도 함익에게 등을 돌린다.

연극이 참 현실적이라고 느껴졌던 대목이다.



 

3. 꿈을 꾸고 싶었지만, 도착한 곳은 심연이었다


 

같이 연극을 본 지인이 말하기를, 이 장면만 보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해석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장면만 아니었더라면 여전히 안과 밖의 부조화로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마지막에 둘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해석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나도 당황스러웠다. 마지막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토록 그녀가 외치던 ‘복수’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하나? 아니, 그러기에는 극중에서 햄릿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아버지나 친어머니를 죽이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들이 악의적으로 공연을 마치고, 집안에서 그녀가 애완 원숭이인 햄릿을 죽이는 등-감정의 골이 깊어져가는 모습만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엔딩 장면은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연극을 보고 난 후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다름 아니라 내가 작성했던 프리뷰를 보면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었다. 앞선 프리뷰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연극 함익이 담고 있는 것은, 자아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이 아닐까—라고 말이다. 그녀는 집안의 가족들, 자신이 지도했던 학생들, 심지어는 연우까지, 모두를 쓰러뜨리며 익과 손을 잡고 무대의 뒤편으로 걸어간다. 익은 그녀의 또 다른 자아였다. 그러나 더욱 정확히 표현하자면, ‘또 다른 자아’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본연의 자아이기도 했다. 다만 오랜 시간동안 그녀의 마음 한 곳에서 자그마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가, 무언의 계기로 하나의 형태가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비록 그녀만이 보고 느낄 수 있었던 만큼, 물리적인 형태라 보기는 어렵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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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의 연출이 유독 압도적이긴 했다.

마치 춤추듯 앞으로 걸어갔던 둘.

그리고 그들이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천천히 쓰러지던 사람들.


  

그리고 그 계기는 ‘복수’였다. 이는 그녀의 꿈이기도 했다. 익의 존재로 그녀는 복수라는 꿈에 한 발 다가가고자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을 얽매왔던 속박의 굴레, 가면을 쓴 듯이 연기를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피폐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복수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깊게 파헤쳐 놓은 증오의 구덩이로 깊숙이 들어가고 말았다. 여전히 집안에서 그녀는 사람으로서 대우받지 못한다. 애완 원숭이였던 ‘햄릿’을 죽였으니 이제는 완전히 미친 인간이라 무시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학생들에게 그녀는, 자기 주관이 지독하게 센 낙하산 교수일 뿐이다. 그녀를 둘러싼 상황은 나아지긴커녕 나빠지기만 했다.

 

하지만 이미 분출된 감정은, ‘자아’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심해진 그녀의 상태는 돌이킬 수 없다. 이렇듯 절망적인 상황을 표현하고자 마지막 장면을 연출한 게 아니었을까. 그녀라는 자아가 지향했던 것은 복수였으나 그녀는 지향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익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그녀의 옆에서 그녀를 절망의 심연으로 끌고 갈 것이다. 엔딩 장면에서 그 둘이 손을 잡고 나아간 곳은 이러한 심연이 아니었을까. 함익은 꿈을 꾸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그녀의 도착지는 심연이었다. 깊어질 일만 남은 괴로움의 심연.


*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삶이냐 죽음이냐는 그녀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살아있느냐, 죽어있느냐가 문제였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익이 나타남으로써,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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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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