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은 자신을 ‘진짜로’ 사랑하고 있나요? [기타]

외모 콤플렉스를 버리자 보이는 세상
글 입력 2019.04.18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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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띵-‘하고 얻어맞은 듯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지난 1월, 단순히 친구와 영화를 보는 평범한 저녁을 기대했던 나는 몇 시간 뒤, 머리며 마음이 한껏 무겁게 내려앉아 얼얼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영화가 끝난 후, 가볍게 시작한 대화는 질문에 질문을 물고 늘어졌고, 나를 통째로 드러냈다. 깊게 인식하지 못했던 콤플렉스의 영역을 뿌리째 직면한 그 날 밤, 그 깨달음 이후 나는 가히 다시 태어났다.

***

10살, 나는 옷 입고 치장하는 데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였을까?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소위 사회가 말하는 ‘예쁜 외모’의 기준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에서 콤플렉스의 싹을 피어 갔다. ‘사춘기의 짓궂음’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엔 입은 상처가 너무 컸던 트라우마 적 순간도 여럿 겪었다.

아빠는 항상 기를 쓰고 겉모습에 신경 쓰는 내게 “너 나이 때는 흰 티에 청바지만 입어도 예쁜 거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난 언제나 “내가 흰 티에 청바지만 입어도 되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든지 그랬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아빠는 남자니까. 내가 지독히도 벗어날 수 없었던 매일, 매 순간의 ‘평가’를 이해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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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난 외모 콤플렉스를 정성스럽게 키우며 24살까지 자랐다. 대학 시절 내내, 스스로 못나게 생각한 부분을 가리고자 엄한 부분을 부각하는 옷차림을 고수했다. 10cm 이상의 높은 굽, 짧은 치마, 파이고 딱 붙는 옷……. 그렇게 입어야만 자신감이 생겼다. 난 응당 그런 옷을 선호하고 ‘어울리며’, 이게 내 ‘스타일’이라고 참 당당하게도 생각했다.

거리를 걸을 때 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바쁘게 갈 길만 갔는데, 원체 빠른 걸음걸이를 만든 데에는 이 같은 콤플렉스도 한몫했다. 내가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쳤을 때, “저 사람은 뭔데 날 쳐다보지”라고 생각을 할까 무서워 의식적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이처럼, 내 외모를 보고 평가받는 게 싫으니 나부터도 이 같은 구실이며 언급에 대해 일절 배제되려고 했다.

살이 조금 찌면 바쁜 일상에 힘입어 단식을 감행하고, 그걸 조절이며 관리랍시고 나불거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체중계에 오르내리고, 외출할 때면 수시로 다리 붓기 상태를 체크했으며, 콤플렉스가 성공적으로 가려진 모습에 만족스러워했다. 밖에 나가는 이상, 지금껏 단 하루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딱 그 안에서 살았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남들의 시선에 무수히 돌 맞으면서 이겨낼 인물도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이게 내가 이 삐뚤어진 세상에서 상처를 최소화하며 사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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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은 마지막 학기를 끝내고 바쁜 일상에서 처음으로 벗어나 지내던 때였다. 동시에 계획했던 것들이 잘 안 되고, 나태해진 자신에게 실망을 일삼던 번아웃 시기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살까지 찌자 참 엉망이라고 한숨 쉬기 일쑤였다.

영화가 끝나고, 친구에게 “맥락 없는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난 살을 다시 빼면 이 모든 걸 힘차게 시작할 동기부여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킬로 수에 스트레스받는 것부터 해결하면 힘을 얻어 다시 집중할지도 모른다는 내게 친구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갑자기 살 이야기를 가져오냐”고 했다. 난 예의 테두리 안에서 살며 몇 번이나 반복한 설명을 읊었다.

친구는 내 의견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그렇게 친구는 내가 오랜 시간 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던 확신에 대해 한 마디씩 의문을 던졌고, 난 그에 대답했다. 처음엔 ‘항상 그렇듯 쉽게들 하는 속 편하고 입 바른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습관처럼 의견을 말하던 나는 질문이 계속될수록 생각이 많아졌고, 갈수록 어렵게 반박을 이어갔다. 그렇게 일종의 불편한 감정과 함께 대화가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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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자신도 그런 적이 있었다”며, “나도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했었고, 살을 빼니 행복했다. 그런데, 그 행복은 다시 살이 찌면 없어질 행복이더라”라고 말했다. 자꾸 바꿀 수 없는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나’를 우려하는 내게, “그런 걸 다 떠나서, 너는 그렇게 살고 싶어?”라고 물었다.

지금껏, 이 문제가 취사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는 처음으로 ‘그렇게 살지 않을 가능성’을 고려했다. 확실한 건 그렇게 늙고 싶지 않았다. 체중 1~2 킬로에 좌지우지되며 지금까지처럼 날 채찍질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주름이 늘고 살도 쳐질 텐데, 이렇게 살다간 나보다 어린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저 부러워할 것이고, 내 지난 어린 날을 회상하면 한없이 그리워할 것이며, 영원토록 거울 속 내 모습에 만족이란 걸 하지 못할 거라는 끔찍한 미래가 마치 이미 겪은 듯 생생하게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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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간 굳건히 다져온 땅을 헤집은 소용돌이에 뒤죽박죽이 된 머리, 내려앉은 마음으로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고 샤워기를 틀었다. 방금 한 대화와 내 안에서 처음으로 든 반기를 하나씩 되짚었다. 그렇게 차차 생각이 정리되고 나서, 얼마나 엉엉 울었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자존감이 높다고 자부하며 열심히 내면적으로만 성장을 꿈꿨지, 외적인 부분은 두 손 놓고 내팽개친 채 바닥을 기고 있었다. 내면만 사랑할 줄 알았지, 외면은 진정으로 사랑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 자신에게 학대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한 것이, 온전히 사랑해 주지 못한 것이 숨 막힐 정도로 미안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다른 사람의 시선이 관여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나를 나로서 사랑하는 것만 집중하면 될 일이었다. 비만과 같이 건강에 위협이 되지 않는 이상, 살은 찌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는 것이며, 나는 그때의 내 몸에 어울리는 옷을 입으면 된다. 나의 행복에 내 체형은 관계없으며, 진짜 걱정해야 하는 것은 건강이다. 이 기본적인 것을 깨닫기까지 참 아픈 길을 자처해왔다.

당장 내일이라도 사고가 나거나 병이 생겨서 얼굴이 일그러지고 몇십 킬로가 찌는 상상을 했다. 그대로 살았다가는 도무지 어떤 나락까지 떨어졌을지 차마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날, 내 작은 원룸의 화장실은 자칫하면 그렇게 됐을지도 몰랐다는 두려움, 그것에게서 벗어났다는 안도, 이 기본적인 것을 깨닫는 데까지 죽어라 몰아세운 ‘나’에 대한 죄책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것들을 물과 함께 배수구에 흘려보내며 난 길고 길었던 위선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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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옷장을 여니, 입을 수 있는 옷이 없었다. 죄다 불편하고 지금 내 몸에 맞지 않는 옷들이었다. 난 처음으로 입고 마구 돌아다닐 요량으로 편한 맨투맨과 긴치마, 스포츠 속옷, 차마 사지 못했던 따뜻한 롱패딩을 주문했다. 길을 걸으면서 사람들의 얼굴이 궁금하다면 용기 내 의식적으로 흘긋 보기도 했다. 체중계는 그날 이후 올라서지 않았으며, 습관적으로 다리 붓기를 확인하는 것도 그만뒀다. 하나씩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바꾸자고 다짐했다. 난 자유로워졌고, ‘진짜로’ 날 사랑하게 되었다.

내 안에 깊숙하게 박혀있던 큰 뿌리를 드러내니, 그로부터 자랐던 크고 작은 가지들까지 덩달아 변화했다. 예를 들어, 나는 다리 콤플렉스로 인해 다리가 얇거나 마른, 체구가 작은 남자에게 한 번도 이성적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 내게 굳이 이상형의 외적인 부분을 묻는다면, 내가 힐을 신을 것을 고려해서 키가 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부터 고수한 이 태도가 한순간에 엎어진 것이다. 애초에 거리를 느낀 이유가 내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 원인이 제거되니 더 이상 그런 건 중요치 않고,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할 사람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바라게 되었다.

그날의 깨달음은 내가 작년 말부터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면서 더욱 관심을 가진 ‘나’ 자신과 ‘내면’을 대하는 데에서도 단단한 토대가 되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내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야 맞는 길에 들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준을 외부에 두는 순간 해결하지도 못할 불안과 불행이 생기게 마련이다. 언제나 답은 내 안에 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기준을 내 안에 두는 것. 이 새로운 행복을 깨달은 요즘, 나는 나로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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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승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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