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픔이 길이 되려면", 춥고 어두운 곳에 서는 일에 관하여 [도서]

글 입력 2019.04.01 00:2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I shall not live in vain (나는 헛되게 산 것이 아니리라)


"혐오의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비를 멈추게 할 길이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기득권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면서 또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작게라도 배운 게 있다면,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피하지 않고 함께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p.219)


나는 늘 두려웠다.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따스한 말과 행동에는 서투르더라도 마음만은 온기를 머금은 사람이고 싶은데, 삶을 견뎌내려는 노력이 동시에 내 마음까지 무디고 차갑게 만들고 있는 것만 같아서 두렵고 무서웠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자꾸만 싫어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타인의 행동에 대한 관용 범위가 좁아지고, 사회 현상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의미 있는 것보다 돈이 되는 것에 가치를 두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게 겁이 난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것 같아 좌절감이 든다.

어쩌면 나는, 너무 이기적이어서 '인권' 같은 담론을 논할 자격조차 되지 않는 사람인 건 아닐까?


photo-1519692933481-e162a57d6721.jpg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한 줄기 위로의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혐오의 비를 멈추기 위해 우산을 만들어낼 용기는 없어도, 그저 혐오의 대상이 되어 온몸으로 아픔을 받아내고 있는 그들 옆에 설 용기만이라도 있다면 - 그리고 적어도 '혐오'라는 단어가 갖는 막중한 무게를 느끼고, 혐오를 혐오하기보다도 불관용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아직 나는 살아 있다. 코와 입으로 호흡하고 팔다리 관절을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의 길을 찾아나설 수 있다는 인륜적 의미에서 살아 있다.

나는 도무지 비맞는 사람들 옆에서 고고히 우산을 든 채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내 처지를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그들 옆으로 가고 싶다. 물론 들고 있는 우산을 내팽개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실 내팽개치지 않는다고 크게 비난받지도 않을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다. 낮고, 춥고, 어두운 곳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한 삶을 살고 싶다. 한 사람의 찢어진 마음이라도 달래주었다면 헛되게 산 인생이 아니라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 구절처럼, 이름이 남겨지지 않아도 의미가 남겨지는 인생을 살다가 죽고 싶다.

그건 내 오랜 꿈이다.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I shall not live in vain."
(만약 내가 찢어진 마음 하나 달랠 수 있다면, 나는 헛되이 산 게 아니리라.)

- Emily Dickinson




근대의 원자론적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 개인의 원형으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사회역학'을 말하는 책이다. 아마 내가 그랬듯이,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사회역학을 처음 접했을 것이다. "사회역학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학문이다.(p.6)" 우리는 질병의 원인으로 면역 체계의 약화라거나, 돌연변이 세포라거나, 바이러스의 전염 등 생물학적이고 유전적인 원인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만일, 사회구조적 원인으로 야기된 정신적 불안과 스트레스가 면역 체계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면? 특정 계층이 비자발적으로 질병에 더 취약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면? 사회역학자들은 이러한 생소한 질문을 던지는 학자들이다.

책에 제시된 통계들은 놀랍다. 어쩌면 예상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숨기고 싶었던, 혹은 드러나더라도 애써 부인하고 싶었던 진실들의 속살을 노출시킨다. 공동체의 와해로 인해 사회적 고립을 경험한 사람들이 폭염으로 인한 사망에 더 취약하다는 것, 갑작스런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전쟁 포로보다도 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비율이 높았다는 것, '동성결혼 금지' 법안이 통과된 뒤 성소수자들의 불안장애가 유의미하게 증가했다는 것,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통계들을 보다 보면 "우리 사회의 수준은 어디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xxlarge.jpg
 

사회적 소수자의 개념은 상대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종종 자신은 절대 약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참 바보 같다. 외국에 나가면 한국인도 소수자인데, 옆집에 사는 외국인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자신의 딸이나 아들이 동성애자일 수도 있는데, 퀴어 페스티벌을 신문에서 보면서 조롱하고 경멸한다. 당장 내일 교통사고의 불행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장애인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많아지는 것이 역차별이라 여긴다. 그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상상력이다. 상대방의 입장에 선다면 내가 얼마나 아플지, 그 아픔의 십분의 일이라도 알았다면 그토록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롤즈가 '무지의 베일' 상태를 가정하게 된 것도 인간에게 이런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걸 이미 알았기 때문이리라. 이해관계와 사회적 계층을 가진 현실의 인간은 결코 온전한 정의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라 가정했기에, 자신의 심리적 정향, 사회적 지위, 재능과 능력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 원초적 상태에서 사람들이 정의의 원칙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 결론내린 것이다. 롤즈가 구상한 정의의 원칙에서 핵심은, 인간은 모두 평등한 기본권을 가지며, 사회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이 되는 한에서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롤즈는 자유주의자였지만 그의 이론 내에서 복지 제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하지만, 롤즈는 여전히 지나치게 '원자론적인 개인'을 가정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가 가정한 무지의 베일 상태에서, 개인들은 상호무관심하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는 관심이 있는 인간들이다. 그런 인간들이 정의의 원칙에 합의했다고 해서 과연 그것을 제대로 실천해나갈 수 있을까? 롤즈의 원칙을 실현해나가기 위해서는 "사회적 연대"가 필수적이며, <정의란 무엇인가>를 집필한 마이클 샌델에 따르면 그러한 연대는 원자론적 개인이 아닌 사회적 개인의 모습으로만 달성 가능한 목표다. 그래서 샌델을 비롯한 공동체주의자들은 사회 내에서 정체성을 형성해나가는, 자유의지를 갖기는 하지만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그 선택을 제약받기도 하는 개인을 상정한다.


00402129201_20110820.JPG
 

나는, 자유주의자보다는 공동체주의자에 가깝다. 아마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저자, 김승섭 교수도 그렇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는 이 책에서 끊임 없이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공동체를 지키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사회적 관계로부터 단절된 인간이 더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통계를 제시하며, 관계망의 양극화와 더불어 좋은 자원이 특정 관계망으로 집중되고 있음을 우려한다.

물론 근대의 탄생과 함께 우리가 발전시켜온 '근대적 개인', 즉 독립적이고 이성적이며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모습이 지금의 현대 사회를 형성시켰음은 자명하지만, 이제는 근대적 개인을 넘어선 새로운 인간의 원형을 모색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최소한의 의무론적 윤리를 넘어서 타인과의 상생을 위한 '미덕'을 윤리의 영역에 포괄시키고, 이성 뿐 아니라 감정 역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임을 인정하고, 공동체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그런 인간상을 세워봐야 할 때가 아닐까.

근대가 진보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 때로는 과거의 원시적 공동체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야 우리 인류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우리 공동체의 수준은 어디인가?


"그럴 때면, 누군가 반문하기도 합니다. 가벼운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야 그렇다 쳐도 성폭행이나 살인으로 들어온 이들에게도 그런 치료를 해주는 게 맞느냐고, 그들의 인권도 존중해야 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런 질문을 들을 때면, 어찌 답할지 몰라 작은 목소리로 답하곤 했습니다. 인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공동체의 수준은 한 사회에서 모든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요. 조심스럽지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p.249)


shutterstock_724345753-1024x683.jpg
 

재소자의 인권에 대해 논할 때 이성적이 되기는 쉽지 않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강력 범죄들의 수위를 보고 있으면, 인간의 잔혹함에 놀람과 동시에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되기 마련이다.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저렇게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살아 있어도 되나? 우리 사회가 저들을 위해 세금을 써서 밥을 마련하고 잠자리를 제공해줘야 하나? 한 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아 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생각에 조금 균열이 일었던 것은, 천종호 판사의 책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를 읽고 난 뒤였다. 실무 경험 상 소년범죄를 저지르고 법정에 서는 아이들의 70% 이상이 빈곤 계층이거나 가정에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는 글을 읽고, 범죄의 구조적 원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평등하다. 정서적 지지 기반이 되어주지 못하는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나는 것, 절대 빈곤의 환경 속에서 늘 물질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학창 시절을 보내는 것, 학업을 수행해낼 만한 지능을 타고나지 못하는 것, 다수의 호감을 사기 어려운 외모를 가지는 것, 어느 것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것 뿐 아니라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에 대해서도 차별의 잣대를 들이댄다. 오히려 더 무감각하게 차별하기도 한다. 스스로 악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지만, 악해지지 않고는 못 견딜만한 극한의 환경으로 몰아내졌던 사람들도 존재한다.

물론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추호라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뉴스에 보도되는 자극적 사건들로 인해 우리가 재소자 전반에 대한 부정적 낙인을 강화해 나가는 것,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 인권도 박탈당하는 것은 마땅하다'와 같은 인식을 공유하기 시작하는 것은 분명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김승섭 교수가 이야기하듯이,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처우는 곧 공동체의 수준과 품격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photo-1510193806518-f731c70a35bb.jpg
 

'혐오의 시대'라 해도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다수가 다수를 혐오하는 시대가 도래해버린 것 같다. 여성과 남성은 분리된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서로를 헐뜯고, 상대 성별을 비하하는 용어들까지 만들어냈다.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고, 세월호 사건 이후 시민들은 재난의 순간에 국가가 나를 구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상실했으며, 20-30대는 윗세대를 꼰대로 지칭하는 한편 10대들은 '요즘 애들'로 불리우며 졸지에 버릇 없는 집단이 되어 버렸다. 언론이 제 역할을 수행한다고 믿는 사람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심지어 인권 운동을 하는 시민 단체 역시 기존의 기득권층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많은 이들이 탄식한다.

한국인들은 참 많이 아프다. 한국이 OECD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통계는, 우리의 경제 수준을 고려해볼 때 믿기 어려운 수치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덜 아픈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픔을 아픔으로 남기지 않고 하나의 길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결국 답은, 내가 이 글에 인용한 첫 번째 문장들에 있다고 생각한다. 쏟아지는 비를 피하지 않고 함께 맞아주는 것. 유교 문화에서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가족주의적 문화를, 자신의 자아를 내세우면서 타인을 재단하는 용도로 활용하지 않고 타인을 조건 없이 보듬어줄 수 있는 관용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 비교하거나 순서 매기지 않고, 결국 우리 모두는 이 지구의 미세한 일부분을 점유하면서 유한한 삶을 살다 떠나는 부랑자와도 같음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너와 나는 크게 다르지 않음을, 똑같이 존엄하고 진귀한 존재임을 끊임 없이 되새김질 하는 것.

이렇게 쓰다 보니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교사로 일할 때 수업을 들어갔던 거의 모든 학급에서 소개했던 노래다. 이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이 이 노래를 들으면서 잠시라도 행복하길 바란다. 잠시라도 나를 아프게 했던 혐오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을 에워싼 혐오가 내 가슴을 냉동시키고 말 것이라는 공포에 대해서 잊어버릴 수 있기를 - 그래서 더 희망찬 내일을 노래할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조용필 - 바람의 노래 (소향 ver.)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수가 없네 
내가 아는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수가 없네 
내가 아는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것들을 사랑하겠네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수 없다는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아무리 우아한 이론을 가져와도 혐오는 혐오이고, 어떤 낙인을 갖다 붙여도 사랑은 사랑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혐오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저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분명 그럴 거라고 저는 믿어요." (p.219)


[이창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