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르코에게 초콜렛 도넛을 건네주세요, <초콜렛 도넛> [영화]

글 입력 2019.03.2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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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면 ‘사회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자주 보려고 하는 편이다. 영화는 다른 사람, 다른 삶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해주는 매체이기 때문에 영화를 통해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된다. 차별과 억압으로 고통을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보다 더 확실하게 다루고 있는 사회문제를 인식하게 해주며, 이에 관한 비판적 사고가 이루어지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인간적으로 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부당한 위치에 처한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다루게 될 <초콜렛 도넛>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게 되었다. <초콜렛 도넛>은 동성부부인 ‘루디’와 ‘폴’이 다운증후군 소년 ‘마르코’를 키우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지만, 동성부부가 양육권을 가진다는 건 상당히 염려스러운 상황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도 그럴게 사회 전반적으로 동성애에 대해 짙게 깔린 편견과 차별이 아이에게도 영향을 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콜렛 도넛의 배경은 동성애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1970년대 미국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콜렛 도넛>은 이러한 난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어떻게 관객들을 설득시킬지 궁금했다.




<초콜렛 도넛>은 다름아닌 가족영화



여장을 하고 여성모사를 하는 쇼댄서 ‘루디 도나텔로(알란 커밍)’와 검사 ‘폴 프래커(가렛 딜라헌트)’는 게이바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대조되는 직업만큼이나 루디와 폴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르게 묘사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루디는 사회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숨기지 않을 만큼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또한, 폴이 전화를 받지 않자 무작정 폴의 사무실을 찾아갈 정도로 성미가 급하고 감정적이다. 반면에 폴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경찰에게 오히려 논리적으로 행위의 잘못을 지적할 정도로 이성적이고 차분하다. 또한,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미칠까봐 루디와의 관계를 사촌관계로 속일만큼 현실적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 보이는 이 두 인물은 다운증후군 소년 ‘마르코’를 만나게 되면서 서서히 가족이 되어간다.


‘마르코’는 유일한 가족인 친모가 마약으로 교도소에 가게 되자 아동보호소로 가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마르코와 이웃 관계이자 그를 신경 쓰고 있었던 루디가 이를 목격하게 되자 자신이 마르코와 가족이 되어주기로 한다. 루디는 폴과 함께 마르코의 친모로부터 양육권을 받고, 폴의 집에서 마르코와 함께 살며 가족으로서의 추억을 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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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부부와 장애아이의 조합. 이들은 거리를 지나가기만 해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낯설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가족의 형태다. 심지어 폴의 상사가 폴과 루디의 관계를 알게 되자 폴은 해고시키고 아동복지국에 신고하여 마르코의 양육권을 두고 재판까지 열게 된다. 재판은 마르코와는 관련 없는 ‘아이 앞에서 키스를 하신 적 있나요?’와 같이 온갖 수치스러운 질문들로 루디와 폴을 공격하며 결과적으로 동성부부의 양육은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만을 미친다는 쪽으로 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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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과정에서 루디는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에게 소리친다.


“당신들과 다르다고 나쁜 부모가 아냐!”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의 자격을 루디와 폴은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족이 됨으로써 생기는 변화들을 보면 ‘가족’에 대한 편견을 완벽하게 무너뜨린다. 훌륭한 노래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경제적 형편이 안 되어 립싱크 무대만 섰던 루디는 경제적 여건이 되는 폴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공연을 하게 된다. 또한, 성정체성을 숨기고 사회적 시선을 신경 쓰던 폴은 루디의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에 점차 자신도 성소수자임을 당당하게 여기고 마르코의 양육권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마르코는 초콜렛 도넛, 해피엔딩, 인형을 좋아한다. 폴은 마르코에게 초콜렛 도넛을 주고 루디는 매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마르코에게 들려준다. 마르코는 이러한 루디와 폴의 보살핌 아래에서 지능과 사교성이 크게 올라가고, 점차 밝고 활기를 띤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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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들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고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영락없는 ‘가족’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마르코에게 필요한 것은 마약에 빠져 자신을 방치하는 친엄마가 아니라 애정으로 자신을 돌보는 폴과 루디였다. 이들이 보여주는 서로간의 애정과 순수한 교감은 동성애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을 넘어 ‘남녀부부와 혈연으로 맺어진 친자녀’라는 ‘가족’의 견고한 규정을 흔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퀴어영화’이자 하나의 ‘가족영화’라고 할 수 있다.




서사성을 증폭시켜주는 루디의 노래



초콜렛 도넛에서 좋았던 점은 ‘음악’을 서사적 장치로써 잘 활용했다는 것이다. 극에는 루디가 노래를 잘 부르고 ‘쇼댄서’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루디는 노래를 통해 자신의 감정과 메시지를 전달한다.


처음 루디와 폴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면, 루디는 'Honey Cone One Monkey Don't Stop No Show' 라는 노래를 통해 폴을 향해 ‘내게 와요, 당신이 원하는 사랑 내가 줄게요’라며 유혹한다. 루디가 처음으로 폴과 마르코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부른 ‘Come to me’라는 노래 역시 폴과 마르코로 인한 행복과 기쁨이 담겨져 있다. 재판에서 첫 패소를 경험한 후에는 ‘Love Don’t Live Here Anymore‘이라는 노래로 자신의 비극적인 상황을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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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극의 마지막에 부른 ‘I shall be released’는 작품의 주제의식을 뚜렷하게 담고 있으며 극의 여운을 남기는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 노래는 언젠가 나는 해방되어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갈 거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루디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표정이 강렬하게 다가와 메시지 역시 강하게 가슴에 박히게 되었다. 동시에 차별과 억압을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던지는 노래도 될 수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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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해방’되어야 한다



<초콜렛 도넛>은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긴 했다. 인물들의 행동동기와 감정변화에 대한 설명이 적어 전개가 다소 빈약하게 느껴졌다. 인물들이 애정을 쌓아가는 과정 역시 마치 스냅사진을 연달아 붙인 것처럼 짧게 보여준 것에 불과했다. 더하여 마르코의 비중이 적고 마르코가 앓고 있던 ‘다운증후군’이라는 병에 대한 설명은 부족해서 작품에 완전히 공감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초콜렛 도넛>은 단순한 만큼 주제의식 하나는 굉장히 뚜렷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결국 루디와 폴은 양육권을 빼앗기자 마르코는 루디와 폴에게 돌아가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지만 3일동안 길을 헤매다 결국 죽고 만다. 마르코의 죽음은 비극성을 강화해 정서적 파장을 일으키고자 하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이는 설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차별에서 비롯된 판단과 미흡한 제도가 죄 없는 아이를 죽음으로까지 이르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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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초콜렛 도넛>의 원제는 <Any Day Now>다. ‘언젠가는’이라는 의미로 루디가 마지막에 부른 ‘I shall be released’라는 노래와 맞아떨어진다. 루디, 마르코, 폴이 함께 가족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언젠가’는 결국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역시 모든 선입견으로부터 해방되어 이들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 작품은 제목부터 극의 끝까지 뚜렷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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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량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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