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고추가 매울까? 문고본의 귀환

글 입력 2019.02.22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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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의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8화 전주 편에서 소설가 김영하는 종이책의 용도를 설명하며 “종이책으로는 싸울 수도 있어요. 그때, 한국 책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미국 쪽은 재질이 펄프로만 되어 있어요. 한국 책은 거기에 돌가루를 섞어요. 누군가와 책을 들고 싸우게 된다면 한국 책을 쓰는 것이 더 타격이 강합니다.”라는 말을 한다. 그는 가벼운 농담조로 말했지만, 이는 우리나라 책의 가장 큰 특징을 보여준다. 한국의 책은 단단하고 무겁다.

  

우리나라 책을 단단하고 무겁게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가 종이의 재질이다. 책의 내지를 희고 두껍게 만들기 위해 탄산칼슘, 쉽게 말해 돌가루를 충전재에 포함시킨다. 출판 업계에서는 독자들이 흰 종이를 선호하기 때문에 돌가루를 종이에 충전하여 책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종이를 희게 만들수록 뒷면이 비치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내지를 두껍게 만드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책은 미국 책과 비교해봤을 때 돌가루가 3배 이상 많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양장본, 즉 하드커버가 더해질 경우 책의 무게는 더 무거워진다.


잘 망가지지 않는 양장본 표지, 희고 두꺼운 내지로 구성된 책은 소장하기엔 좋은 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가볍게 휴대하면서 책을 읽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에서는 페이퍼백 형식의 책 제본을 보편화하였다. 페이퍼백이란 대중 보급용 형태의 책으로 일반 단행본보다 작고 내지의 질도 다소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단행본보다 약 30~40% 저렴하게 판매된다. 영국의 '펭귄북스', 미국의 '포켓북'등 다양한 출판사에서 페이퍼백 형식의 책이 출간되고 있다. 가격 부담이 적고 휴대하면서 읽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이를 구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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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페이퍼백 형식으로 출간되는 문고본이 유행한 시기가 있었다. 문고본이란 책의 내용은 다르지만 같은 방식으로 계속 간행되는 총서를 말한다. 이는 대체적으로 작은 판형으로 가볍게 제작되었다. 저렴한 가격을 통한 대량 보급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고본 시장은 한국에서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리다가, 1980년대부터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문고본 시장을 위축되게 만든 원인은 다양하다. 첫째,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번역본을 위주로 출간하던 문고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해외 저작물을 무단으로 사용하고, 문학을 2차적으로 가공하는 관행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낮은 번역의 질도 영향을 끼쳤다.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보급해야 하기 때문에 번역에 금전적 투자를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단행본 시장이 성장하면서 총서는 독자에게 소개될 기회가 적어졌다. 이는 출판사가 문고본 출판보다는 단행본 출판에 집중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까지 출간되고 있는 문고본은 시공디스커버리총서, 살림지식총서 등 손에 꼽히는 수준이다.

  

문고본의 몰락과 함께 페이퍼백 형식의 출판도 급격히 감소하였다. 몇몇 고전 번역서와 총서 외에 일반 단행본이 따로 페이퍼백 형식으로 새롭게 출간되는 경우는 드물다. 일반 단행본, 페이퍼백 두 가지 종류의 책을 출간한다고 해도 현재처럼 작은 규모의 출판 시장에선 수익이 크게 향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문화콘텐츠 소비 방식의 변화가 문고본의 재도약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스마트폰의 대중적 보급과 SNS의 활성화에 따라 사람들이 긴 글보다는 짧은 글을 다양하게 접하려는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독서 문화에 있어서도 책의 내용이 요약적으로 담겨있고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문고본이 다시금 주목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망에 따라 출판 업계에도 새로운 물결이 일렁이고 있다. 일명 ‘진화한’ 문고본이 출간되고 있다. 기존 문고본은 소장가치보다는 저렴한 가격과 휴대성에 초점을 두는 반면, 최근 출간되고 있는 문고본은 휴대성과 가격은 물론 소장가치에 있어서도 일반 단행본에 밀리지 않는다. 대형 출판사부터 독립 출판사까지 작은 형태에 어울리는 감각적인 디자인을 통해 소장하기에 적합한 책을 만들어내고 있다. 단행본을 축약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짧은 문학 작품, 에세이 등을 기획하는 출판사도 늘어나고 있다.

  

민음사에서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한 <쏜살문고>가 대표 주자이다. 민음사는 2017년 여름,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문고본을 동네 서점에만 판매하는 협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위고, 제철소, 코난북 세 개의 1인 출판사에서 기획한 <아무튼 문고> 시리즈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아무튼 게스트하우스”, “아무튼 쇼핑”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작가들의 에세이를 150페이지 이내로 제작하여 약 2시간 안에 독자들이 책을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무튼 시리즈의 목표다. 이 외에 마음산책의 <마음산문고>, 플레이타임의 <오브젝트 레슨스>, 창비의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 디자인 이음의 <청춘문고> 등이 새로운 시장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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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발표에 따르면 미국인은 1인당 월평균 6.6권, 일본인은 6.1권인데 비해 한국인의 독서량은 1.3권에 불과하다. 출판 업계에서는 매년 출판 시장이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유행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시작된 문고본의 부활은 책을 많이 읽지 않는 독자들의 독서 진입 장벽을 낮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많은 출판사들이 새로운 문고본 시리즈를 통해 어떤 사람도 단숨에 읽어낼 수 있는 짧고 작고 저렴한 책을 통해 일반 단행본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여러 독립 출판사에서는 일반 단행본 정도의 분량을 집필하기에는 역량이 조금 부족하지만 이보다 적은 분량을 빠르게 쓸 수 있는 신인 저자들을 문고본을 통해 발굴하기도 하였다. 단행본에 비해 제작 비용도 저렴하여 독립 출판사의 경우에는 문고본 출판이 비용 부담도 더 적다.

  

여전히 단행본이 출판 시장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지만, 문고본의 재도약이 이전만큼 어렵지는 않아 보인다. 크기는 줄어들고 가격은 떨어져도, 그 소장가치는 떨어지지 않는 한국식 페이퍼백 문고본 책들이 많은 출판사에서 탄생하고 있다. 진화한 문고본의 등장과 확산을 통해 가볍고 읽기 편한 책들의 출판영역이 확장되는 것을 기대한다.



[김세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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