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부조리한 선택, 주체적인 삶 [도서평론]

- 시대를 풍미한 이방인,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를 읽고
글 입력 2018.11.1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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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부정(否定)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세 가지 형식으로, 즉 소설 분야에서는 <이방인>, 극으로서는 <카리큘라>와 <오해>, 사상에는 <시지프의 신화>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말하자면 그것은 데크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 역시 나는 세 가지 형식으로 긍정(肯定)을 예상했었습니다. … 소설로서는 <페스트>, 극으로서는 <계엄령>과 <정의의 사람들>, 사상으로는 <반항적 인간>이었습니다."


- 시지프의 신화 186p 中



우리는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대다수가 삶을 살아가면서 이 둘의 미묘한 차이를 뭉뚱그려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안다고 인지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안다고 생각만 할 뿐이지, 정작 제대로는 모른다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아직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어떠한 사실에 대해 잘 안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치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는 편이다. 아마도 그 자신에게 있어서 미묘한 차이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거로 생각한다. 설사 알더라도, 애써 부정하고 싶은 것이거나.


쉽게 생각해보자면, 삶을 살아가면서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도 역시 이와 동일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타인과 여러 관계를 맺으며 사이가 가까워졌을 때, 그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한다. 반은 맞을 수도 있는 말이겠지만, 반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해한 타인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들을 미루어 짐작한 거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우리는 타인이 집적되어볼 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아닌 존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신을 두고 볼 때도 비슷하다. 우리는 누구보다 자신이라는 존재를 잘 인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확히 나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설명해 내지 못한다. 겨우겨우 어렵게 나에 대하여 말했다고 하더라도,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은 언어라는 모종의 형태를 빌려 표현한 것으로밖에 이르지 못한다. 결국 나 자신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면서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셈이다.




부조리한 삶, 자살



말로써는 표현하기 모호한 감정에 까뮈는 집중한다. 그는 이를 삶에 대한 '부조리'라고 정의하고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한편으로는 해석을 토대로 우리가 어떻게 잘 살아나가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 시도에 초석이라고 불릴만한 철학적 사고들이 결집하여 있는 책이 바로 <시지프의 신화>라고 할 수 있겠다.


실상 까뮈만이 이러한 시도를 한 것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들의 수기>에 대하여 짧게나마 언급했듯이, 개인주의의 도래 이후 나 자신을 스스로에게서 분리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한 '실존주의'자들은 상당수 존재했다. 방법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은 나름의 관점으로 이를 일종의 가치로 승화시켰다. 그들은 모두 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했고, 보다 인간적으로 살아가기를 강렬히 원했다.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에서 돋보이는 점은, 이러한 사고를 나름대로 종합시켜 인간적인 가치를 토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본질적인 의미로서의 자살이란 개념에 초점을 둔다. 즉, 자살이라는 하나의 행위를 사회적인 현상으로서 보는 게 아닌, 그 자체의 의미를 해석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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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까뮈는 이 자살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까? 이에 대하여 그는 <시지프의 신화>의 핵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부조리한 논증'이라는 챕터에서 이를 자세히 다룬다. 한편으로는 이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조리'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부조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행동과 그것을 초월하는 것 사이의 '단절(divorce)'를 의미한다. 개념이 어렵다면,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낯섦 내지 모순'이라고 생각해도 나쁘지는 않겠다.


까뮈는 우리가 보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것은 이 부조리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이 점이 우리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죽어간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허무하다고 느끼게 되고 결국 자살을 통해 사람들이 이를 극복하려 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까뮈는 결코 자살이라는 행위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나, 옹호하지 않는다. 다만,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먼저 헤아려 본 것뿐이다. 책의 전반적인 기조를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자살은 '패배하는 것'이라고 매듭지어 버린다.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도피하는 거라고 보는 셈이다. 또한 그는 아무리 자살을 결심하고 그 근거가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사람은 눈앞에 죽음이 닥치면 감성에 논리가 흐려지며 결과적으로는 자살하려고 시도했을 때의 본질 역시 상실된다고 판단한다.




부조리하지만, 주체적인 인간 '시지프'



이와 관련해서 까뮈는 '부조리한 인간'과 '부조리한 창조'라는 챕터에서 동 쥬앙을 시작해 킬리로프, 연극가, 그리고 강자들을 내비치며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결국 까뮈는 이러한 논증을 통해 자살을 지양하고 오히려 더욱더 그 부조리를 수용하고, 이방인의 관점에서 사고하며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니체의 운명론적 가치관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삶은 본질 자체가 부조리가 가득하고 허무한 것이므로, 이에 낙담하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은 희망이라는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게 되고, 인간은 더욱더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쉬울 수 있으면서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혼자서, 자기 자신의 율법의 수호자와 판관이 된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일'이라고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했듯이, 분리된 나를 사유하고 그 안에서 발아하는 부조리를 온전히 수용하는 것은 쉽사리 해낼 수 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까뮈는 마지막 챕터 <시지프의 신화>에서 시지프를통해 더욱 인간적인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전반적으로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치 또한 이것인데, 바로 반항, 자유, 그리고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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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는 신들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죽음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민둥산을 바위를 밀며 오르내리는 형벌을 받는데, 이와 같은 형벌에도 그는 묵묵히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충실한 채로 발걸음을 내디딘다. 즉, 그는 자신의 삶을 저당하려고 시도하는 초월자에 대해 반항하고, 자신의 삶을 자각하고 스스로 주체적인 의식을 갖고 행동하며, 그 행동을 실현하는 데에 있어서도 자신의 모든 열정을 소진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까뮈는 시지프와 같이 반항과 자유를 만끽하며 최대한 열정적으로 오래 사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에 대해 충실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열심히.



삶은 당장 내일조차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아마 용납을 하지 못하겠지만, 결국 우리는 그 '부조리'한 나날들을 하나씩 채워가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부조리하고 불확실한 미래는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변한다. 쉽게 말하자면,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사실들을 애써 두려워하며 회피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게 아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결국은 그나마 '타인과의 관계'나 '자신의 내면'을 가장 위하는 방법이 아닐까. 마치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면서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권능을 부여하고 군림하는 초인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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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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