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nion] '허무주의 격파' 실용도서 『모든 것은 빛난다』 [도서]

『모든 것은 빛난다』는 현대인의 의미잃은 삶을 다시금 빛나게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글 입력 2018.10.22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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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모든 것은 빛난다』



『모든 것은 빛난다』는 현대인이 처한 허무와 무기력을 대상으로 삼아 탐구하고 그 해결 방안을 과거의 작품들 속에서 찾아가는 책이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다가 그저 이상한 기분이라고 넘겨버릴 일에서 저자들은 문제를 캐치하고 그 원인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고 한다. 역사상 가장 발전했으며 풍요로운 이 시대에서 현대인은 정확히 어떤 문제 상황에 처했는가? 그것은 바로, ‘허무’와 ‘무기력증’이다. 이것들은 현대인이 삶을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게 만든다. 살아갈 이유가 없다. 권태는 마치 늪처럼 헤어나올 수 없게 인간을 점점 집어 삼킨다. 이건 자살로도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다. 우리시대가 맞닥드린 상황은 대부분의 현대인이 이러한 문제를 겪고 있으며, 그들은 그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질환인 ‘권태’는 어디서 오는가? 이 책의 저자들은 현대 허무주의의 원인과 해결의 실마리를 바로 서양 문학 작품들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우리가 처한 실존의 문제



얼마 전에 내가 사랑하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만났다. 그녀만큼 거침없이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예민하고 까칠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던 친구다. 그러나 대학에 가고 나서부터, 그녀는 정말 많이 부드럽고 유연해졌다. 그렇게 그녀가 변했기 때문에 당연히 더 사교성 좋게 대학 생활을 잘 하고 있겠거니 했는데, 직접 만나본 친구는 지금껏 내가 한번도 보지 못했던 무기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최근 들어 뭘 하고 싶은 욕구도 생기지 않으며, 인문학 서적이나 읽어보고 있다고 했다(친구는 태생 이과생이다).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친구는 기숙사 룸메이트 이야기를 했다. 대학에 와서 사회적인 능력을 길러야만 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만나는 사람들을 최대한 이해하고 배려하는 노력을 했다. 같은 방으로 배정된 룸메이트에게도 잘 대해주려고 한창 노력하는 중이었다. 룸메이트가 일찍 잠드는 사람이라 그녀는 늦게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데도 전등을 꺼주고, 소음에 민감한 룸메이트를 위해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고, 공부할 때는 바스락 소리도 내지 않으려 신경 썼다. 한번은 음식 씹는 소리를 싫어하는 룸메이트를 위해 그녀가 없을 시간을 골라 기숙사에서 밥을 먹으면서, 친구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배려를 주체할 수가 없어!”


뭔가 손해인 것 같은데, 내가 더 희생하며 사는 것 같은데, 그렇지만 어디까지 룸메이트를 위한 생각을 해야 하는 지, 그 마지노선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지금껏 타인에 대한 생각을 크게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저자들이 지적하는 현대인이 처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에겐 그 지침이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 만들어가야 할 텐데, 무슨 근거로 나의 지침을 만들 수 있지?




자기 확신의 양면



'너무 자유로워서 오히려 불행한' 현대인은 선택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한다. 선택 상황에서 사람들은 나쁜 길로 빠질 수 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 확신이다. 자기 세계에 매몰된 사람은, 자신의 주관에서 비롯된 강한 확신에 의해 선택을 한다. 자신의 이상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옳다고 믿고,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조종하려 든다. 자신감 넘치는 사람은 확신이 자신의 장점이라고 믿지만, 사실 자기 확신에서 오는 자신감의 원천을 들춰보면, “공허하다”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감은 필수불가결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가치기준들 속에서 진정 필요한 자세는 자신을 믿는 일이다. 전쟁 같은 삶 속에서 나를 믿어줄 것은 나 밖엔 없다! 사실 이러한 생각이 나오게 된 원천은, 주관 없음에 대한 ‘불안감’일 것이다. 실제로 나는 나의 주관에 대한 고민을 항상 안고 있다가, 최근에야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정말로 모든 사람의 입장이 이해가 가는 사람이다. 학창시절 친구들끼리 싸움이 나면, 둘 다의 입장이 이해가 가서 나는 어느 한 편에 설 수가 없었다. 회의에서 사안을 결정을 해야 하는데 치열하게 자신의 의견을 어필하는 사람들을 보며, 모두가 각자의 장점이 있고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나의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주관이 없다면 여러 사람과 소통하며 사는 것에 큰 문제가 생긴다. 주관이 없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선동 당하게 될 수 있다. 교실의 예를 들자면, 학교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이 한 친구를 음해하고 왕따시키는 것에 쉽게 동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무슨 나쁜 일을 하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즉, 선악의 구별을 다른 사람의 판단에 맡겨버린다. 그것은 책임감 없는 행동이다. 세상이 권력자의 욕망대로 움직이도록 방관하는 일이다. 방관으로 인해서 결국 해를 입는 것은 자신일 것이다.




처방 : 자연과 인위 사이의 중도



그렇다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우선 나와 세상을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차원에서, 나는 어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수많은 광고와 유혹들로 둘러 쌓인 세계에서 나는 흔들리지 않고 나의 굳은 신념을 가지고 그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오로지 믿고 따라야 할 것은 나의 신념이고, 나는 스스로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의 마스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욕망투성이인 이 세상에서 옳은 일을 하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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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모비딕』



이러한 생각은 본 책에 나오는 자기 확신형 인간인 시민 케인과 『모비딕』의 애이해브와 같은 것이다. 저자들은 그들이 공허한 것을 쫓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스스로 파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확신의 극단에 치닫는 인물이다. 나는 타인과 소통하며 살 수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의 자기 확신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견이 없는 사람과는 소통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위기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모비딕』의 핍이라는 인물이 처한 문제와 같다. 핍은 다양한 모든 관점들을 이해한다. 각자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한가지 사건이라도 누구 눈에는 옳고 누구 눈에는 그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옳고, 모든 것은 그르다. 이런 식으로 어느 순간 그 모든 관점이 한눈에 들어오자, 핍은 미쳐버린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죄수가 갑자기 이데아 세계의 환한 빛과 마주쳤을 때, 눈이 멀어버리는 것과 같다. 어두운 동굴 속에 있던 죄수가 진리를 만나기 위해선, 동굴 입구부터 느껴지는 따스한 빛에서부터 서서히 적응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진리의 세계는 오랜 훈련을 거친 철학자만이 안정적으로 입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핍과 애이해브 사이의 이슈메일에게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내가 아예 없어도 안되지만, 내 세계 속에서 완전히 갇혀서 살아도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들이 결론짓는 허무주의에 대한 해결책과도 일맥상통한다. 저자들은 위대한 스포츠맨들이 보여주는 빛나는 행동의 방식을 메타 포이에시스meta-poiesis라고 명명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가장 자연적인 정조인 퓌시스physis와 예술적인 장인의 기술(창조)을 의미하는 포이에시스poiesis 사이의 대안이다. 즉, 저자들은 퓌시스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 상황마다 오는 그리스 신들(정조)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면서도, 그의 위험성(집단 광기)을 막기 위해서는 자연의 진리를 ‘육화’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포에이시스는 자연을 양육하는 것이다. 몸으로 체득된 앎이라면 퓌시스의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아무도 해줄 수 없다. 정해진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이렇듯 실존에 대한 답이 정해지지 않은 허무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가 모든 것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는 창조의 원천이며, 삶의 원동력이다. 나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예술가가 될 것이다. 먼저 호메로스 시대의 행복한 다신주의자들처럼 경이와 매혹을 누리기 위해서는 퓌시스를 받아들이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휘둘려서 혹여나 악한 일을 저지를 가능성은 막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다루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강조하던 ‘육화된 앎’일 것이다. 나는 자신을 믿어야 하지만, 그 원천은 성스러운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따를 수 있는 신은 없지만, 몸을 내맡길 수 있는 경이로운 정조들이 있다. 이를 이용해 나는 의미를 잃지 않는 삶을 누릴 것이며, 성스러운 다신들을 뒤에 받치고서는 건강한 자신감으로 내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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