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하늘에서 걷다 - 화가가 말하는 법 [책]

김점선 에세이 '10cm 예술'
글 입력 2018.03.15 07:4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그 날에도 도서관에 가서 아무 책이나 들쳐보았는데, 하필 '죽었다'는 말이 여러 번 보이기에 나도 모르게 읽어버렸다. 수필치곤 또 짧아서 그야말로 단숨이었다. 읽고 나니 글의 주인이 예전보다 더욱 궁금했다. 화가 김점선. 지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글에서 말하길, 자기는 전생에 말 등 위에서 죽었단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의 인생을 질주하는 말 위에서 종식했노라고 담담히 고백하고 있어서, 이게 정말일까 라는 생각보다는 어쩐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매우 용감했기 때문에, 그리고 물불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20 p.)’ 최전방에서 적들에게 돌진하다가 죽어버렸다고 말하는 이. 화가 김점선의 전생에는 항상 전쟁과 죽음이 있었나보다. 그리고 말(馬)도.
 
 
734e5e0d90d232c2c3289ddf0b6080a3_ckufMLRTwrvs3PFWNGmyurX.jpg
 


말(馬), 요람이자 죽음의 침상


나는 전쟁터에서 달리는 말을 생각하면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든다. 날아오는 창과 비의 화살을 뚫고 질주하는 말은- 그 격렬한 근육의 수축과 팽창을 떠올리면 - 의심할 바 없는 가장 뜨거운 생령 같다. 가장 살아있으면서 죽음의 턱밑까지 단숨에 도달하는 힘은 틀림없이 순수한 것일 테다. 여기에 너도 죽고 나도 죽어버리자는 식의 악(惡)이 끼어들 틈새 같은 건 없다. 그런 말의 잔등에서 숨을 거두고, 얼마간 짐짝처럼 실려 몸을 맡기는 일은 얼마나 큰 위안일까. 김점선 화가에게 말이란 요람이자 죽음의 침상이다.
 
   
14.jpg
 


허무하데 무엇이 아까우랴


같은 전생을 몇 번이나 답습하던 모진 싸움꾼이 이번 생에서는 여자로 태어나 그림을 그린다. 전장을 질주하는 대신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화폭과 씨름을 한다. 조금도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혹독한 나날들이다. “허무하데 무엇이 아까우랴. 목숨을 아끼지 않기로 결심했다." (38 p.) 그러다가 왼팔에 문제가 생기고 다시 오른팔에 문제가 생겨 붓을 들을 수 없을 지경이 되자, 컴퓨터 작업으로 눈을 돌린다.

김점선 화가는 2002년 처음 컴퓨터로 그림을 시도했고, 그해 첫 디지털 판화 전시회를 개최했다. 컴퓨터로 그린 그림을 판화지에 인쇄해 값싸게 판매하면서 ‘대중과 영합한 예술’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죽기 일 년 전, 그녀는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테크놀로지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외칠거야. 예술을 감상하는데 돈에 대한 공포가 따라가면 안 돼.“

 
734e5e0d90d232c2c3289ddf0b6080a3_Kiq3bbkpGWeqzZ7x5Mw3gdP1nnGw.jpg
 
734e5e0d90d232c2c3289ddf0b6080a3_vXYdXVI5WrfTHKstS.jpg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기

 
김점선 화가의 디지털 판화 작품들은 개인적인 성격이 강하다. 누군가에게 보여준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로 몰입해나가는 진솔한 과정 그 자체이다. 그녀는 컴퓨터로 동물 그림을 많이 그렸고 그중에서도 특히 말을 즐겨 그렸다. 말을 그리는 동안에는 무척 행복하고 그만큼 만족을 모른다고 말한다.

그녀가 쓴 에세이 ‘10Cm 예술’ 속에 실려 있는 말 그림들을 곰곰이 뜯어본다. 아이가 그린 것 같은 말들이 순진하게 웃고 있다. 사람의 웃는 눈처럼 휘어진 눈매가 퍽이나 다정하다. 김점선 화가의 살아생전 웃음은 어떠했을까. 사진을 보면 무뚝뚝한데 어쩐지 말은 재미나게 하셨을 것 같다. 가까운 지인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대개 글을 쓰는 글쟁이다. 공통분모가 무엇일지 나로서는 짐작을 못하겠지만 그들이 어울리면 참 즐거웠을 것 같다.
 
 
734e5e0d90d232c2c3289ddf0b6080a3_yo8ey4LJs5Sr.jpg
 


하늘에서 걷다


그녀가 남긴 여러 편의 수필을 찬찬히 읽어본다. 그녀의 글과 그림들은 서로 묘하게 닮아있다. 아이 같이 솔직하면서 어이없고 그만큼 자유분방하다. 그림도 좋지만 나는 특히 그녀가 쓴 글을 읽으면서 정체불명의 희열을 느낀다. 자유로운 마음가짐에서 우러나오는 소탈한 언어구사... 그럴싸해 보이려는 노력 같은 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겸양도 없고 내숭도 없다. 누구나 살아오면서 흔히 가질 법한 피해 의식의 그림자도 살펴볼 수 없다. 가난도 어려운 시절도 자초한 것이요 병도 잘 살아있음을 깨닫기 위한 축복이라는 것. 김점선은 살아생전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유명했다. 몸이 아파도 아픈 줄을 모르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녀는 몸을 아껴 쓸 줄을 모르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슬그머니 전생의 탓으로 돌린다. 윤회가 실재하는지 잘 모르지만 그녀가 느낀 대로라면 다시 한번 태어나 몸을 아껴 써보기도 하는 삶을 살아갈 것 같다. 그 세상에는 모쪼록 전쟁도 암(癌) 덩어리도 없었으면 한다.
 
   

인상적인 구절 :

어떤 치욕이 우리를 짓누를지라도 우리는 벌떡 일어서 만세를 부르자. p.18
함부로 정신 분석하지 말라. 나는 고양이다. p. 128
태양은 지나치게 잉여 대접을 받고 있다. 단 하나뿐이라는 이유만으로. 멍청이들이 정신을 번쩍 차리도록 태양이여 한꺼번에 백 개가 떠올라라!  p. 95


[강사랑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5896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E-Mail: artinsight@naver.com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Copyright ⓒ 2013-2022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