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너무 많은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5필리어

글 입력 2018.03.04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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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너무 많은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5필리어>
 

극장을 나오는 동안 뮤지컬 <사랑에 관한 다섯 가지 소묘>가 떠올랐다. 소재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라, 소재 자체가 너무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다보니 제작자의 욕심이 넘치는 점이 그렇다. 부분적으로 흥미로운 연출을 시도했고, 실제로 재밌는 소재들을 가져왔지만 아쉽게도 그 결과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 때문에 연극이 참 무거워졌다. 비빔밥처럼 다른 소재들이 적절히 어우러져 하나의 완성품이 되면 좋은데, 오필리어가 꺼내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무겁고 격렬해서 벅찬 숨을 몰아쉰다. 그러니 관객입장에서는 다소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 밖에. <사랑에 관한 다섯 가지 소묘>도 다섯 커플의 이야기였고, <5필리어>도 다섯 명의 여성 피해자의 이야기였다. <사랑에 관한 다섯 가지 소묘>는 로맨스 코미디라는 장르에 맞춰 가볍게 극단을 나올 수 있었지만, <5필리어>는 사회적 병폐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회적 메시지를 내포한 탓에 마냥 가볍게 극장을 나올 수 없었다. 오필리어들은 ‘ME TOO 운동의 확산’이라는 적절한 시기에 무대에 올랐고, 그런 시류에 맞춰 적절한 이야기를 하려는 극단의 용기가 돋보였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한 탓에 약간의 아쉬움을 남겼다.
 
의미있는 사회 현상을 지적한 연극이었고, 오필리어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기에 아쉬움이 크다. 오필리어들의 고통을 표현하는 부분에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필자는 고통을 노골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소비’하듯이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심리적 상처는 인간이 어떻게 어떤 몸짓과 이미지로 표현하건, 그 안에 있는 것보다 잔인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는 피해자를 중심으로 둔 섬세한 접근과 연구를 진행해야할 의무가 있고, 평가는 더욱 신중히 여겨져야 할 것이다. <5필리어>의 제작자는 ‘누군가’가 아니라 ‘오필리어’를 내세움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피해가려 애썼다. 필자는 그들이 실명을 가진 누군가가 아니라, ‘오필리어’로 비유된 것이 만족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극단은 오필리어를 애도하고, 상처를 치유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오필리어들은 그냥, 여성 피해자들이 당한 고통의 상징일 뿐이다. 그것이 예술가의 손을 거쳐 격렬한 표현이 되었다면, 필자는 그것을 존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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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5필리어>에 갖고 있는 아쉬움은 표현방식이 아니라 너무 많은 이야기와 노골적인 구호로 마무리된 구조다. 필자는 언론과 또다른 힘을 가지고 있는 예술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그 사실이 어떤 것을 호소하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필자는 호소의 역할은 언론이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는 예술가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만을 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가 보이면 예술은 얼마든지 프로파간다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예술의 정치화와 정치의 예술화가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필자는 좋은 예술을 성찰을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으로 정의한다. 병폐와 문제의식이 확실한 문제일수록 우리에게는 더 많은 물음표가 필요하다. 물음표는 느낌표와 다르다. 왜, 같은 의미라도 ‘이런 세상인데 괜찮으십니까?’와 ‘이런 세상인데 일어나자!’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호소를 위한 연극은 구조가 다소 단순해지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5필리어>가 다소 그런 방향을 향해 걸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화된 구조에 대해서 몇가지 지점을 짚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우선 <햄릿>의 오필리어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권력에 휘말린 여성 피해자의 역할에 머문 것이 아쉽다. 오필리어가 그러한 특성을 가진 캐릭터는 맞지만, 단순히 ‘여성 피해자’라는 캐릭터만 가져오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는 캐릭터지 않은가. 여성 피해자 캐릭터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있고, 실제로 <5필리어>의 오필리어들은 ‘허난설현’같은 이름으로 바꿔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 허난설현도 남성에 억압되어 비극적으로 살다 시를 태운 천재 여류시인이지 않은가. 더 풍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특성을 끌고 온 것에 대해서 큰 아쉬움이 남는다. 또 세월호의 여학생도 다소 뜬금없는 전개로 당황스러웠다. ‘큰 권력에 희생당하는 약자’를 표현하고 싶었다면, 왜 하필 ‘오필리어’여야 했는지를 묻고싶다. 마지막으로 오필리어들이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고 선언하는 부분이다. 기억되길 바라는 오필리어를 표현한 것은 좋았지만, 일련의 과정이 필자에게는 너무 ‘교훈적’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 극장이 아니라 시위에 참가한 것 같다고 해야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배우를 포함해 이러한 ‘어려운 시도’를 해낸 극단에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필자가 오늘 더 신중히 감상평을 쓰는 이유도 이들의 시도가 사뭇 진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오필리어 중 모두는 아니어도 하나쯤은 분명 이 연극으로 인해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배우들의 집중력과 커튼 콜 때 나와 인사하는 객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 또한 우리 시대에 중요한 시도였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씩 인권의식을 넓혀가는 이 시대에 상처는 더욱 많이 이야기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상처를 후비지 않는다면, 다양한 표현으로 시도되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오필리어는 오늘날 우리에게 참 중요한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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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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