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리한 고통, 누구의 꽃밭

글 입력 2018.01.2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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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영리한 고통
누구의 꽃밭


 충격적이다. 공연장을 나오면서 필자의 머리는 온통 '충격'이라는 단어로 가득 찼다.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불현듯 스탠리 큐브릭의 <풀메탈자켓>이 떠올랐다. 내용과 구성에서 비슷했다기보다, 전쟁이라는 광기 속 꽃 피운 비극이 스크린을 뚫고 나왔다는 점이 닮았다. 지금까지 필자는 그런 것이 제한 없는 시공간인 화면이나 지면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누구의 꽃밭>이 그 생각을 돌파하게 했다. 비극은 현장성을 가지면서 더욱 뚜렷한 색으로 빛난다. 하지만 필자의 이런 평가가 단순히 '충격적인 소재에 의해 파생된 쇼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물론 연극은 특수강간, 강간, 마약, 전쟁, 아내와 정부라는 끔찍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필자와 함께 연극을 관람한 친구는 멱살을 잡혀 집중하게 만드는 이야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극은 결코 끔찍한 소재에 함몰되지 않는다. 이들의 이야기는 비참하면서도 한편 우습다. 블랙 코미디의 대가 찰리 채플린도 웃음과 절망이 거리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필자가 리뷰의 제목을 '영리한 고통'이라고 지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소재지만 너무 아프지 않고, 쉽게 이해되는 상황인데도 현실적이지 않다. 이들의 고통은 예리하지만, 영리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감정이 부글부글 끓다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펑'할 수 있는 것도, 상반된 감정과 소재가 부조리와 광기를 띨 수 있는 것도 영리한 설계 덕분이었다. 종소리와 케첩 냄새 속에서 관람객들은 이야기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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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실과 환상의 경계, 무대 위의 비극

 <누구의 꽃밭>은 연극의 공간과 특성을 잘 활용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무대라는 현실에서 일어나지만, 비현실적인 소재로 가득 차 있다. 무대 위에서 사물은 새로운 이름과 형태를 갖는다. 연극에서 옥수수는 흰 막대기로, 라디오는 강아지 인형으로, 케첩은 칼이 된다. 마요네즈를 짜내 얼굴에 바르고, 고추장으로 볼 터치를 하는 선애는 비현실적이다. 건축 자재 같은 뽁뽁이를 뜯으면서 맛있다는 듯이 먹는 등장인물들은 부조리하다. 하지만 관람객들은 이들의 촌극을 보면서도 웃지 못한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이들의 행동은 비참하고 이미 미쳐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면서도, 상황의 의미를 크게 부각했다.

 이들이 치환한 도구들은 현실을 가르는 경계의 역할만 수행하지 않는다. 도구들에서 우리는 연출가의 치밀한 설계를 찾을 수 있다. 옥수수나 선애의 화장품은 시각/청각적인 연출을 하면서도 부족한 물자를 잘 드러내고 있는 사물들을 이용했으며, 라디오는 말 그대로 '개'같다. 작은 집에서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폭력보다 거대한 정부는 라디오를 통해 끔찍한 소식만을 전한다. 선애의 화장대에 있을 것 같이 생긴 케첩은 칼이 되었는데, 선애가 재중을 유혹함으로써 유지하는 '생존방식'의 이미지를 고수하면서도, 빨간 흔적을 남김으로써 관객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주었다. 재중이 든 바나나도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다. 재중은 이 끔찍한 집안에서 가장 '남근'적인 존재다. 그는 커다란 종을 허리춤에 달고 있다. 그는 자랑스럽게 종소리를 울리며 돌아다닌다. 집안에 종소리가 들릴 때, 모든 구성원이 숨을 참는다. 그는 자신의 남근을 통해 이 집안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나나는 종과 비슷한 의미를 공유한다. 남근을 닮은 바나나는 불안한 재중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지배적 권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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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개의 방을 오가는 '나쁜 희망'

 무대는 크게 5가지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재중의 방, 선애의 방, 주정의 방, 집 안의 거실과 외부다. 세 명의 방은 거실을 둘러싼 형태로 되어 있다. 외부 공간은 문 아래에 두는 빨간 천을 통해 이어진다. 첫 입장 때 관람객들도 '외부의 공간'에서 이들의 집으로 들어온다. 영민을 제외한 모두가 자신의 방에서 멍하니 시간을 때운다. 이들이 식사를 위해 가끔 나오는 거실은 안정의 공간이 아닌 폭력의 공간이다.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주정은 선애를 음식으로 때리고, 재중은 선애를 강간한다. 이들에게 폭력은 이미 생활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방문한 레이스 치마를 입은 여장소년, 영민은 유일하게 이들의 방을 오갈 수 있는 인물이다. 전쟁 통에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는 소년에 인물들은 모두 '희망'을 꿈꾼다. 영민이 쾌활하게 방을 오가는 모습은 밝고 깜찍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사랑은 기대 때문에 두려운 것이라고, 종소리 아래에서 묻어뒀던 기대와 사랑은 영민으로 인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한다. 잃어버린 강아지를 일 년 만에 다시 만난 것처럼,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이 긴 이별 끝에 다시 돌아오듯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품에 안겨 오는 사랑은 너무 소중해 우리를 미치게 만든다.

 하지만 영민이 소년임을 드러나면서부터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영민은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모두 극단적인 것들이었다. 그는 많은 걸 바라지 않았지만, 이미 이 집은 마약과 같은 환상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곳이었다. 순수한 영민은 자신에게도 재중과 같은 작은 방울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이 밝혀졌을 때는 식탁의 쇠사슬에 묶이게 된다. 그는 여전히 세 개의 방을 오가지만, 그는 예전처럼 활짝 웃지 않는다. 그를 맞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끔찍한 상황 속에서 영민만이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거대한 폭력 속에서 그들조차도 누군가를 쇠사슬에 묶고 고통을 주지만, 그들도 어딘가에서 종소리를 듣고 케첩으로 몸을 긁힌다. 전쟁은 끝나고, 재중은 자살한다. 이들을 단단히 묶어줬던 양귀비는 없다. 재중은 죽기 전에 영민을 '네가 나타나고 모든게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박살났을 때, 영민은 풀리지 않는 쇠사슬을 내리치며 비명 지른다.

*

 네 명이 정성스럽게 키우는 양귀비 꽃밭에는 모두의 소망이 깃들어 있다. 사실 영민만이 '희망'이었던 것은 아니다. 양귀비 꽃은 우리의 삶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속삭인다. 전쟁 통에서 폭력에 휘둘리고 휘두르면서 꽃밭을 돌보았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집안 사람뿐만 아니라 모두가 꽃밭을 바라지만, 그 누구도 꽃밭을 가질 수 없다. 영민이 그렇듯이, 꽃밭 자체가 폭력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씨앗이 심어졌기 때문이다. 정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서 이들에게 큰 부를 가져왔다고 해서 이들의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의 폭력보다 더 거대한 폭력, 전쟁과 생존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 기억은 그 누구도 열매를 맺지 못한 꽃밭을 떠나게 하지 못한다. 폭력으로 시작과 끝을 맺은 꽃밭에 그들이 꿈꿨던 희망은 없다. 이처럼 암울한 주제의 <누구의 꽃밭>은 별다른 교훈을 남기지는 않는다. 관람객들은 자리에 남아 '희망'이었던 것이 '욕망'으로 치닫고 결국 파괴되는 과정을 지켜본다. 필자도 연극을 이리저리 얼굴을 대입하면서 봤다. 우리도 글쎄, 꽃밭을 지키면서 종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쇠사슬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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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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