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양귀비가 맺은 파국의 열매, 연극 ‘누구의 꽃밭’ [공연]

글 입력 2018.01.27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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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누구의 꽃밭’은 전쟁 중인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집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극이다. 배경에서부터 소품 하나하나에까지 담긴 의도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극보다 치밀하게 계획되어 보는 동안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폭력’을 주제로 어떤 말이 하고 싶었기에 이렇게 세밀한 장치를 극 전반에 심어놓았던 걸까.
 

 
대한민국은 전쟁 중


극에서 대한민국은 전쟁 중이다. 언뜻 보면 북한과의 전쟁을 암시하는가 싶지만 누구와 무엇을 위해 하는 전쟁인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외부적 변화로 발생한 폭력이 극을 이끌어가지만 전쟁이라는 상황만 강조될 뿐 정작 그 주체는 무엇인지 등장하지 않아, 극 전반의 긴장감은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시선은 또다른 폭력의 주체(어쩌면 대상이기도 한)가 존재하는 집으로만 집중되어 그곳 또한 전쟁 상황임을 암시한다. 개인의 자유는 사라진 채 같은 패턴만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폭력은 점차 지워져, 분노의 대상조차 모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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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폭력


세 인물이 있던 집에 의문의 외부인이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스스로를 집의 유일한 주인이라 생각하는 남자는 양귀비를 군에 납품하며 돈벌이를 하고 때때로 성욕을 아무런 통제 없이 분출하는 폭력을 행사한다. 아내는 아들을 전쟁으로 잃은 뒤 원인 모를 병을 앓고 있다. 남편의 정부는 전쟁이 난 뒤 이 집에 살게 되면서 온갖 집안일을 맡아 할 뿐 아니라 남편의 성욕이 분출되는 대상으로도 역할한다. 기이하고 이상한 이들의 삼각관계에 외부인 영민이 들어오자 미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폭력은 사라지지 않은 채, 이제껏 본 적 없는 다른 모습으로 그들을 찾아온다. 전시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하는 영민과 그런 그를 깊이 의지하는 정부 선애, 그리고 그를 아들삼으려는 아내의 감정은 언뜻 사랑처럼 보이지만 이는 또다른 폭력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맹목적이고 자신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둘의 행동과 대사에서 영민은 사라지고 그들을 집에서 나가게 해 줄 ‘외부인’만 남기 때문이다.
 

 
양귀비의 열매


이런 그들이 그나마도 전쟁 상황을 버티며 유일하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수단은 양귀비였다. 알다시피 양귀비의 열매는 마약으로 사용되는데, 누군가의 환각이 될 그 마약이 이들의 생계수단이었다는 점에서 한 차례의 아이러니가 나타난다. 양귀비는 계속해서 피고 지며 그들에게 먹고 살 거리를 제공해주었지만, 결국 그들이 파국을 맞게 된 것 또한 양귀비였다는 데서 한번 더 모순이 발생한다. 애지중지 키우던 꽃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완벽하게 사라지고 남편이 자살한 자리에 남은 세 인물에게서 희망은 자취를 감춘다.

그들이 키우던 꽃과, 노력의 결실같았던 열매는 어쩌면 파국을 맺기 위해 계속 그들의 손에 자라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 치밀하고도 방향성 없는 폭력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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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큰 폭력의 틀 안에서 네 인물 간의 미묘한 감정선을 그리며 미시적인 폭력을 보여준 누구의 꽃밭 속 이야기는 먼 곳에 있는 어느 나라의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다. 시간적 배경도 이유도 알 수 없지만 권력층만을 위해 발발하는 전쟁에서 국민들이 희생된다는 아주 보편적이고 불합리한 이해관계, 외부 갈등 상황에서라면 더욱이 동반되기 쉬운 내부 분열, 제3자의 우유부단함과 희생. 이 세 가지의 큰 줄기로 얽히고 설키는 극 전개는 폭력이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형태도 방향도 없이 실재하는 그것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을 때의 결과는 영민의 목을 죄던 최후의 쇠사슬보다 참혹할 수 있으니, 개인은 언제나처럼 폭력에 예민한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슬프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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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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