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시대를 읽는 연극이란 이런 것 : 연극 < 12인의 성난 사람들 >

절대성에 의심을 보내는 개인을 핍진하게 담아내는 방식, 그리고 부지런한 번안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글 입력 2017.12.3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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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시대의 거울이다.” 대학로 연극 포스터 게시판을 장식하는 문장이다. 대학로를 거닐다가 저 문장을 만나면, 연극과 무대에 대한 묵직한 애정이 샘솟지만, 어디 현실이 그러한가. 낡은 감수성과 이미 지나간 시대의식을 세련된 양 포장한 스테디셀러가 무대에 오르기도 하고, 몇백여 년 전 고전을 재해석하겠다고 손 걷고 나서서는 오히려 원작보다 더 뿌연 거울을 내놓기도 한다. 아무렴, 지금 한국사회에서 연극이 그 옛날 그리스 시대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이에 후안 마요르가는 연극 <비평가>에서 볼로디아를 통해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뿌리 깊은 거짓의 시대에 살아서” “자신들의 거짓을 지지해주”는 연극에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볼로디아의 지적처럼, 관객들이 보내는 박수는 어쩌면 자신의 거짓에 대한,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시대의 거짓에 대한 박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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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성’을 향한 의심의 시선

    
그런 점에서 류주연 연출의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만난 깨끗하고 세련된 거울이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절대성’에 대한 의심의 시선을 견지하며, 시대와 공동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남긴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의심에서부터다. 한 소년이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모든 정황과 증거가 가리키고 있는 상황에서, 한 배심원의 작은 의심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살해한 소년의 동기, 소년이 사용했다는 둔기, 아랫집 노인의 증언과 건너편 이웃의 목격, 불확실한 소년의 알리바이, 이 모든 것은 11인의 반대편에 선 한 남자의 의심으로 다시금 파헤쳐진다. 명백해 보였던 증거와 증인의 절대성은 남자의 의심을 통해 진실의 의장을 하나씩 벗는다. 11:1로 소년에 대한 유죄를 주장했던 배심원들은 단 한 사람의 의심으로 변화하기 시작하고, 싹튼 의심은 차차 번져가며 결국, 배심원 전원이 무죄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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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이 벗겨진 절대성은 소년에게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관객은, 그리고 무대 위 배심원들은 소년이 범인인지 아닌지 막이 내린 후에도 알 수 없다. “그 소년이 무죄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유죄인지도 모르겠다.”라는 불확실성만 있을 뿐이다. 완전무결하게 여겨졌던 진실에 대해 배심원들은 의심을 보내고, 결국 무죄를 선언했지만, 소년은 정말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일 수도 있고, 배심원들이 살인자를 사회로 풀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오로지 단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면, 배심원 각자가 어느 편에 서서 의사 표현을 했다는 것뿐, 절대적이고 확고하고 완벽한 진실이란 무대 위에 없다.
 
 
 
이토록 현실적인 12인의 군상들

    
그렇다면 이는 불쌍한 소년을 구제한 선량한 시민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살인마를 사회로 복귀시킨 우둔한 시민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재판의 틈에 의심을 가지고,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려 했던 배심원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마치 링과 같은 무대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토론을 잇는 12인의 배심원은 각각 뚜렷한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다. 최초의 의심을 가졌던 건축가, 건축가의 말을 처음으로 지지했던 한 노인, 가변적인 사고의 광고업계 종사자, 빈민가 출신의 사람, 예의 있게 행동하는 쥬얼리 디자이너, 아들에게 상처 입었던 아버지, 자수성가한 사업가, 이들을 통솔하던 유치원 선생님 등. 12명의 배심원은 각기 분명한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그들의 삶에 비추어 소년을 판단한다. 한 무대 위에 12인의 인물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각자의 논리를 펴는 것은 하나의 텍스트가 짊어지기엔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나, 잘 잡혀진 캐릭터의 설정에 배우들의 열연이 덧입혀져, 12인의 얼굴과 목소리는 너무도 안정적으로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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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해 보이지만 각기 다른 논리와 시선을 가진 12인의 모습은 핍진하게 이어진다. 12인의 배심원은 우리 옆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인물들로, 그들의 캐릭터와 논리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관객은 재판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기에, 이 12인 중 어느 한 인물의 논리에 공감하며, 각자의 입장을 세우게 된다. ‘빈민가 소년’이라는 기호에 집중하기도 하고, 증인의 말을 맹신하기도 하고, 소년의 이상한 알리바이에 힘을 실기도 하며, 작은 객석이 마치 또 다른 배심원석인 것처럼, 관객들의 판단을 요한다. ‘나였다면’이라는 가정법 하에 관객은 고민하게 된다. 이 더운 날, 자식이 혼자 남아 있고, 야구 경기를 보러 가야 하며, 거의 확실시 된 진실 앞에서, 이해 관계없는 한 소년에게 어떤 선고를 내릴 것인가. 진실의 절대성과 기다리고 있는 일상에 사형이 온당하다고 생각했던 관객들은 11인의 배심원처럼 어느 순간에(그 순간은 각자 다 다를 것이나) ‘유죄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관객의 판단 역시, 소년의 무죄를 확증하진 못하나,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만을 안게 된 것 자체로도, 극의 정공법은 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대를 읽는 연극이란 이런 것


재미있는 건 여느 추리소설과는 다르게, 소년이 진범인지 아닌지, 그래서 소년은 전기의자로 보내졌는지 아닌지조차 비밀에 부치며, 극은 어떤 카타르시스마저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탐정 포와로의 추리과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하나씩 증거와 증인을 되짚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확고한 진실이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만을 담아낼 뿐이다. 확고한 결말과 진실 대신 오롯한 대사와 배심원들의 변화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잘 짜인 캐릭터성과 팽팽히 이어지는 대사 속에서 이야기는 꽤나 힘 있게 이어진다. 우리가 흔한 법정물에 기대하는 한 방의 일격은 없을지언정, 차곡차곡 쌓여가는 의심들과 핍진한 인물들의 변화는 부지런한 세공력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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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돋보이는 성실함은 50년도 더 된 원작을 2017년 한국 무대 위에 불러오는 방식이다. 극은 지명과 인명을 밝히지 않은 채로 배경 상황을 설정하는데, 이로 인해 텍스트는 한 사회, 한 인물로 고정되지 않은 채 수많은 방향으로 열리게 된다. 특정한 상황과 사회를 상정해야 하는 텍스트도 물론 있으나,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보여주는 절대성에 대한 회의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존중은 오히려 고정되지 않은 설정 속에서 무한히 확장된다. 더욱이 주목할 만한 것은 원작 영화와는 다른 배심원의 구성이다. 원작은 모든 배심원을 남성으로 구성했던 것에 반해,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12인의 배심원을 다양한 성별의 구성으로 번안하여, 현실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젠더 문제까지 세심히 다룬다. 한 사람의 생명을 두고, 의견을 개진하는 자리에서, 배심원의 성별은 의견의 타당성을 보장하지 않고, 각자의 선택과 논리는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속 지켜지지 않는 것들을 이 극은 성실하게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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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절대성에 의심의 시선을 보내는 개인을 핍진하게 담아내는 방식, 그리고 부지런한 번안으로 시대를 읽어냈다. 젠더와 세대, 가치에 관한 많은 의견이 오가는 시대에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보여주는 회의와 끝까지 붙드는 인간의 존엄은 분명 유효한 일격을 가한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가짜 인물'의 '가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고도 흥미롭게 풀어내는 세공력에 박수를 보낼 수 밖에. 다시 볼로디아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거짓을 지지해주기에 보내는 박수가 아니라, 관객이 유의미한 무대에 보내는 진정한 의미의 박수를 말이다.



공연 정보



INTRODUCTION

기    간
2017년 12월 6일(수) – 2017년 12월 31일(일)


시    간
평일 오후 8시 / 주말 오후 3시
화요일 공연 없음
  *12월 25일 월요일 3시

장    소 : 미마지 아트센터 물빛극장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8가길 129)

주최·제작 : 극단 산수유
관람연령 : 만 13세
(중학생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 100분

관 람 료 : 30,000원

예    매 : 인터파크


CREATIVE STAFFS


작    가 : 레지날드 로즈
(Reginald Rose)

번    역 : 김용준

연    출 : 류주연

무    대 : 이희순

조    명 : 박성희

음    향 : 윤민철

의    상 : 최  원

디자인ㆍ사진 : 김 솔

기    획 : 강선영, 김신영

조 연 출 : 오세창

출    연 : 홍성춘, 강진휘, 남동진, 이종윤
유성진, 신용진, 한상훈, 현은영, 김애진
박시유, 반인환, 홍현택, 서유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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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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