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 봄날은 간다 >, 라면같은 여자, 밥상같은 남자 [영화]

글 입력 2017.12.23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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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당하기 짝이 없다. 어느 날 헤어지자고 했다가 어느 날 다시 찾아와 보고 싶었냐며 늘 당당하게 웃으며 묻는 여자 은수. 그런 그녀에게 화를 내지 못하고 웃으면서 힘들게 흔들리는 남자 상우. 여자가 봐도 사람 돌게 만드는 여자다. 그런데도 왠지 미워할 수가 없다. 이영애의 리즈시절이 그대로 담겨 있어 그녀의 미소와 눈빛 때문이 아니라고는 말을 못하겠다. 하지만 꼭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당돌하면서 당당한 모습 때문이다. 이미 한 번 이혼을 했다는 그녀, 은수가 사랑하는 방법은 훅 들어오면서도 결정적일 때는 꼬여 있다. 영화 < 봄날은 간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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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수와 상우의 첫만남은 이상했다. 은수는 빨간 목도리를 칭칭 감고 기차역에 널부러져 있었고 상우는 그녀 옆에 앉아서 전화를 울리곤 여기요, 하면서 툭툭 인사를 했다. 처음부터 그녀는 이유없이 당당했다. 그가 늦었다면서. 그들의 사랑은 눈보다는 귀로 시작되었다. 대나무숲의 잎은 사각사각 스산하게 바람과 춤을 추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 산사의 풍경 속 물고기가 기지개를 켜며 울리는 종소리를 함께 들었다. 물이 졸졸 흐르는 강가에서, 파도가 휘몰아 치는 바다에서 그들은 자연이 들려주는 노래를 반주삼아 자신의 노래를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칼자루는 늘 그녀에게 있었다. 그녀가 부르는 곳에 그가 함께 했고 그를 보내기 싫은 밤 그녀는 라면 먹고 갈래요, 자고 갈래요, 하며 그에게 너털웃음을 짓게 했다.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단숨에 그녀를 안고 싶었던 그에게 조금 더 친해지면 하자면서도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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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마음은 넘치듯 왈칵거렸다. 그녀가 보고 싶다고 하면 서울에서 강릉까지 택시를 타고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의 집 김치까지 어느새 그녀의 냉장고에 있었다. 김치를 담그지 못한다는 그녀에게 그는 자신이 담겠다고 한다. 아버지가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데려오라셔. 늘 당당하던 그녀가 말문을 잃고 멈칫하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였다. 사랑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 벽이 등장하는 순간. 그 때부터 그녀는 달라진다. 그녀가 처음 끓이던 라면은 이제 그의 몫이다. 라면이나 끓이라는 그녀의 말에 그는 화가 난다. 그녀는 그들의 사랑이 라면 같았으면 했던 모양이다. 부담스럽지 않은 사이로도 충분한 지금을 원했다. 그는 술에 취해 돌아온 그녀에게 갓 지은 밥과 북엇국, 계란후라이와 김치로 한 상을 차려놓았다. 손이 가고 깊은 맛이 나는 아침. 그는 그녀에게 따뜻하고 부담스러운 더 많은 시간과 사랑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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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묘미는 그들이 실제로 함께 한 시간보다 떨어졌다 만나는 그 애매한 시간에서 빛이 난다. 그들은 만나다가도 시간을 갖자며 헤어졌다. 대체로 그녀의 의사였다. 그녀는 그 사이 다른 사람도 만나며 잘 사는 듯 싶다.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해 강릉에 찾아가 하염없이 기다리고 울고 있는데. 크게 결심한 듯이 버스에서 내린 그녀는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는 뭘 해야 할 지도 모르면서 잘 하겠다고 말한다. 그녀의 눈빛을 보곤 그는 특유의 명대사를 남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치매에 걸린 그의 할머니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바람을 피우고 딴집살림을 차린 남편을 매일같은 시간 기차역에서 기다린다.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도. 그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미 남편의 마음은 변했다. 하염없이 사랑으로 애달파하는 손주를 쓰다듬으며 할머니는 버스랑 여자는 떠나고 나면 붙잡는 것이 아니라는 할머니표 명대사를 남긴다. 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남자도 떠나고 나면 붙잡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녀가 붙잡고 싶었던 것은 사랑을 하던 그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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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아련한 이 말만 들으면 상우는 철저하게 버림받은 약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상우와 은수를 지켜본 관객이라면 알 수 있다. 아마도 상우는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그의 사랑도 변했다는 것을. 사랑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다. 갈 곳을 잃은 마음은 영원히 헤맬 수 있지만 변치 않는 사랑은 없다. 흔들리며 이어지는 사랑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게 서로를 위해 흘러가던 시간에서 벗어나 그는 라면이나 끓이라는 그녀에 말에 내가 라면으로 보이냐며 그녀에게 화를 냈다. 그녀가 모르는 자신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 애썼다. 그녀의 사랑은 그녀가 인지하고 있지만 변하고 있었다. 다른 남자와 술을 마시고 들어와 상우에게 안긴다. 그 남자를 거절할 수 있는데, 상우가 마음에 걸리면서도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부터 이미 마음이 변한 것이다. 이 일이 끝나간다고 그 뒤에 뭐 할 거냐는 그녀의 질문을 여러 번 하게 하는 상우에게 그녀는 과하게 화를 낸다. 끝이 보이는 건 비단 그들의 일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도 끝이 보이는 것 같아.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말이다. 안정적이지 않은 그들의 모습이 이대로도 좋냐고. 왜 이렇게 말을 어렵게 하냐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 만큼 어려운 게 없지 않을까.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아는데 못하게 되지 않던가. 상처받기 싫어서 심술부려본 적 있지 않은가. 나의 진심이 드러날까 두려워 부려보는 얄팍한 술수.

 그가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흔들리고 있구나 은수씨. 흔들려도 괜찮아. 내가 흔들리지 않을거니까. 내가 더 은수씨한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시 잠잠해질 때까지 계속 함께 하겠다고. 그러니까 나를 밀어내지 말고 믿어달라고.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상우씨, 당신이 좋아. 그런데 다시 결혼하는 건 너무 두려워. 많이 힘들었거든. 이 일이 끝나면 우리 계속 잘 만날 수 있을까. 걱정 돼. 사랑만으로 결혼하는 게 힘든 걸 알거든. 나한테 실망할 수도 있잖아. 살다보면 실망할 일이 늘어날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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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말이 쉬운 얘기다. 자기 계발서나 올바른 소통 방법의 예시같은 얘기다. 하기야 그랬다면 상우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은수를 쫓아가 차에 기스를 내기야 했을까. 그녀가 상우에게 갑자기 시간을 갖자며 헤어지는 걸 수도 있다며 뜬금없이 이별을 고했을까. 은수도 이해가지 않고 상우도 이해가지 않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마음 속에 그런 상상이 가득한 날도 있었다. 내 마음이 아프다고 상대에게 생채기를 내고 싶어지는 것. 부담스러워하는 상대의 집을 느닷없이 찾아와 울어버리고 서성이는 것. 상대방이 그리워 아무렇지 않게 연락하고 만나는 것. 하지만 용기가 없어서,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욕심으로 참아넘기는 것들. 마음이 아프게도, 사랑은 서로 다르게 변했다는 걸 다시 마주하기 두려워서.

 그는 그의 할머니를 닮은 듯 닮지 않았다. 한 켠으로는 계속 그녀를 그리워하면서도 다시 느닷없이 찾아온 그녀를 힘들게 거절한다. 그에게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게 하고서 다시 해맑게 웃으며 돌아온 그녀가 나마저도 황당할만큼 밉다. 대체 왜일지 생각해봤다. 그녀는 다시 상처받기 두려워서 상우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면 알 수 있다. 상우처럼 자신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하지만 그녀도 이미 한 번 결혼을 통해 알았으라. 그 때의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을테고 사랑만으로는 결혼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알았을 것이다. 결혼은 둘 만의 일이 아니다. 치매걸린 할머니, 홀로 남은 아버지, 화투를 치기 바쁜 고모가 함께 온다. 김치를 담그는 삶, 가족끼리 도란도란 모여 앉는 삶이 있다. 그녀는 상우와 떨어져 있을 때 혼자다. 가족 얘기도 없고 방송국 사람들, 가끔 만나는 남자. 혼자는 쓸쓸하지만 여럿은 버겁다. 그들은 사랑하지만 결혼을 거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싸우게 될 것이다. 넉넉하지 않은 돈 때문에, 힘든 일상에 쌓이는 서운함, 아이라도 생긴다면 아이 문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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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그의 마음을 때로 이용하듯, 가슴을 잘게 저미듯 헤어짐과 만남을 병주고 약주듯 하는 은수의 행동이야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잊어버리라는 수많은 말에도 보고 싶다며 굳이 강릉을 오가는 상우의 행동도 요즘은 쉽게 볼 수 없다. 라면같은 여자와 밥상같은 남자는 거기서 어긋나면서도 계속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음이 든든히 차고 싶은 소망은 둘다 본질적으로 같기에. 그래도 자꾸 생각이 나서. 다른 사람을 보아도, 계절이 바뀌어도. 마음에 남아 있어서. 이제는 지겹도록 붙였다 떨어져 이음새가 문드러진 문을 다시 안간힘을 써 열어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상우는 이제 그 문을 닫기로 한다. 그들 사이는 늘 그럴 것이다. 그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결혼을 생각할 것이고, 그녀는 그가 그럴 때마다 도망치며 헤어질 것이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벚꽃이 눈처럼 쏟아오는 날 그녀가 그를 찾아온다. 매번 똑같이. 어김없이 갑작스럽게 다시 만나보자고 하며 짓는 미소. 이번에는 다르겠지, 정말 보고 싶었던 마음을 참고, 돌아봤다가, 뒤돌아 걸어간다. 사랑이 아니다. 어쩌면 기회를 놓치는 걸지도 모르지만 사랑이 아니다. 그가 이 관계의 칼자루를 제대로 쥔 건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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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는 지금 눈이 내린다. 영화는 눈이 오는 날 보면 좋을 것 같다. 눈은 꿈을 꾸듯 갑자기 찾아왔다 사라진다.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 가도 경이롭고 아름답다. 그러나 손에 쥐려고 하면 차갑고 형체조차 잡을 수 없다. 눈은 기쁘면서도 슬프고, 포근하면서도 으슬으슬하게 만든다. 맑고 하이얀 웃음과 눈물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매정하게 색에 물들을 수도 있다. 그녀는 눈 같은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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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스름한 갈대밭이 흔들린다. 그녀와 함께 녹음하러 가던 자연 속에 그가 혼자 있다. 그녀와의 좋은 기억이 알려준 자연의 좋은 소리. 그는 가을 같은 사람이다. 늘 푸근하게 웃어넘기며 정감 넘치게 그가 거둔 것들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이에게 나눌 사람이다. 그의 사랑은 겨울 대나무숲의 바람소리처럼 빠져들듯 시작되었고 다음 봄에는 바닥에 떨어진 꽃잎처럼 고개를 떨궈야 했다. 그러나 갈대밭에 서있는 그는 웃을 수 있다. 봄날은 갔지만 그는 여기에 더 큰 사람이 되어 서 있다. 멋진 가을날에.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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